
13. 침묵의 예수님
(본문: 마 27:11-14, 막 15:2-15, 눅 23:3-5)
I). 서론: 소크라테스는 AD. 399년 그의 나이 70세에 '폴리스'(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부인하고, 젊은이들을 부패시켰다는 죄목으로 피소되었고, 재판관은 아테네 시민이었으며, 배심원만 약 5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서 재판과정에서 나타난 소크라테스 인간성의 眞面目을 쓴 것이 소위“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악법도 법’이라고 하면서, 소위 그의 유언과 같은 유명한 말인 “이제 나는 가야 합니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앞길은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신(god)만이 알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독배를 스스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석상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주님의 태도에 빌라도가 놀랄 정도였습니다. 왜 주님은 침묵하셨을까. 우리는 여러 가지 면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고독을 사랑하는 성격 때문에, 대답할 기력이 소진되어서, 대답할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대답해도 별로 유리치 않아서 스스로 자포자기했던 것인가. 여러 가지를 얼핏 추측도 해 봅니다만, 이제 본문을 터전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왜 침묵하신 것인지 그 진정한 이유를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유대 공회에서 심문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라는 종교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은 “네가 말하였느니라.”라고 메시아 임을 긍정하였습니다. (마 26: 63-64) 대제사장은 예수의 이 답변을 하나님 모독죄로 규정하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레 24“16) 그러나 당시 유대는 로마의 치하에 있었기에 사형의 최후 선언은 로마 총독의 권한에 있었기에 빌라도 법정으로 고소를 하였던 것입니다.
②. 유대 공회는 정치적 이름으로 전환하여 1. 유대인의 ‘왕’, 2. 로마‘Caesar Augustus’에게 세금 불납 선동, 3. 민심 교란 등으로 고소한 것은 빌라도의 관심을 끌고, 예수님을 처단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유대 총독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 막 15:2, 눅 23:3)고 질문한 관심의 속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치적 야심>(Jesus' political ambitions) 즉 정치적 반역죄로 재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③.“네 말이 옳도다.”(σὺ λέγεις) - (마 27:11, 막 15:2, 눅 23:3)-빌라도 질문에 왕권에 긍정은 정치적인 것으로 이해되지만, 여기서는 메시아임을 긍정하는 의미로 “당신이 말하는군요.”라는 답변이라고도 할 수 있고, “네가 그렇게 말하느냐?”라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④.“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는지라.”(마 27:12, 막 15:5)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사 53:7) 고난의 종으로써 위대한 신념과 심적 평화로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⑤. 예수의 침묵 - 예수님은 참새 같이 지껄여대는 대제사장 앞에 붕새처럼 말없이 서 계셨고, 빌라도 앞에서는 침묵의 威嚴으로 서 계셨습니다. 흔히 속어로 ‘雄辯은 銀이요, 沈默은 金이라.’라고 하듯이, 주님께서는 변론보다는 침묵의 威儀를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씀하신 이도 없었거니와 주님처럼 힘 있게 침묵하신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신앙의 참 옹호자는 말로 변론하는 자가 아니라, 믿음을 실행으로 보여 주는 자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혼자 계시기를 좋아하는 고독한 성격에서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홀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기를 즐겨 하셨지만, 결코 고독을 일삼는 명상가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독한 영혼들을 찾으시었던 분주하신 분이었습니다. 군중과 접촉을 즐기시던 사교가였습니다. 무리 속에서 같이 同苦同樂을 하셨습니다. 눅 12:1 이하에 무리가 너무 많아서 서로 밟힐 만큼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상 답변할 기력도, 지식도 없어서 침묵하셨던가.
사두개인들이 자기들의 지식에 교만하여 예수님께 여러 가지로 질문했을 때, 하나씩 답변을 하실 뿐만 아니고, “나도 너희에게 묻노니....”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역습으로 도전하셨던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당신의 할 말씀이 궁해서 침묵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닌, 십자가의 형을 질만 한 실수와 죄를 범했기에 침묵하신 것입니까.
주님은 결코 이 빌라도의 심판대 앞에 나설만한 잘못을 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실이지, 얼마든지 자신의 변호를 할 수 있는 증거가 있고, 할 말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묵비권을 행사하여 대답해도 유리치 않아, 침묵하신 것도 아니 이었습니다. 다만, 주님은 침묵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위대한 언행을 하시기 위해서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은 가부간 침묵하시고, 빌라도가 질문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나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라, 빌라도 당신이 말했듯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나라는 사랑의 나라와 평화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서 온 메시아’라고 긍정하는 의미로 依然하게 침묵의 威嚴으로 서 계셨던 것입니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기에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웅변적인 것이 됩니다.
우리는 침묵을 여러 가지 뜻으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敬畏입니다. 말이나 행동으로 깊은 존경심을 표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선망의 침묵이 있습니다. 상대자의 변론이나 말이 말 같지 않아서 답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침묵할 때도 있습니다. 공포의 분위기가 겁나서 말 못 하는 부끄러운 침묵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슬픔에 직면하여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 속에는 당신 자신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에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자들이었고,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힘의 철학의 대변자인 빌라도는 말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셔서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 죄악의 종합적인 계획과 그 실천이 마침내 ‘義로우신 예수님’을 합세하여 죽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 앞에서 받는 예수님의 재판은 이런 모함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상대하고 계신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이나 로마 재판관 빌라도라기보다는, 총체적 人間 惡이었습니다. 의로운 예수님은 정의의 실재와 인간 죄악의 근원적 실존과 더불어 마주 대좌(對坐)하고 그것과 더불어 대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인을 대항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력과 폭력으로, 교활한 잔꾀로, 악과 타협하여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침묵 속에는 당신 자신을 악인에게 일단은 내어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악이 세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악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그 악인이 승리하게 한 다음, 그 승리하는 순간이 곧 패망하는 순간이 되게 하는 하나의 역설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될 대로 될 것이니 그 어떤 주장도, 반항도 해 보아야 소용없다는 체념은 아니었습니다.
인간 악이 승리케 한 다음, 그 인간 악의 승리가 곧 패배인 것을 똑똑히 알게 하는 방법이 곧 예수님의 침묵이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에게 고소를 당했다고 해서 당신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좁은 생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잡힐 때, 무력이 없어서 잡히신 것도 아닙니다. 열두 영(十二 營) 더 되는 천군을 불러서 일신의 수호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 의해서 도적 떼와 같이 환도와 몽치를 가지고 온 그 폭력배들에게 당신 자신의 몸을 맡기셨습니다.
마치 도살당할 양이 도살장으로 끌리어 가듯이,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끌려갔습니다. 그 악이 어떻게 당신 자신을 처결한다고 해도 그것이 겁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인생관은 선(線)이 굵었습니다. 사람의 일시적인 감정이 다 꿰뚫을 수 없을 만큼 폭이 넓었습니다. 악한 사람의 입이 한마디 독소를 품는다고 같이 핏대를 올리면서 반응하며, ‘악의 세력이 당신을 때린다.’라고 그와 같이 대항하고 멸시하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칼로 쳤으나,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 주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인생관은 이 지상에서 전개되는 것보다 훨씬 고상하고 심오한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면서도, 그 채찍질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대항할 수 없이 연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과 도움을 이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인간성의 참패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 같은 범인은 누가 자기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로 응수합니다.
사실이지 억울한 경우를 치자면, 예수님의 경우 이상의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통이 터지는 일이 예수님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으며, 창피와 망신의 경우를 따지자면 예수님의 경우 이상 가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일체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변호를 해야 할 그곳에서 법적으로 용인된 그 재판정에서도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못나서가 아니라, 무서워서가 아니라,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침묵이 자기변명보다 더 좋은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굳게 침묵을 지키신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 아픈 십자가를 지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억울한 경우에도 참고, 침묵을 지키라는 교훈도 함께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 어떤 공동체가 시끄럽고 문제가 있다는 것은 곧 침묵의 덕과 은혜를 체험치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죽이려고 고소한 사람들에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주님을 ‘바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말 없는 대항, 침묵의 저항이 오늘의 우리 현실의 삶에 이다지도 그립기만 합니다. 신앙의 참 옹호자는 말로 변론하는 자가 아니라, 믿음을 묵묵히 실행으로 보여 주는 자라고 하겠습니다.
4). 결론: 자기의 경우와 입장을 떳떳이 사사건건 밝히는 것이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인종(忍從)하는 것도, 우리는 매일 매시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세상의 그 어떤 영웅이나 철인 보다, 진실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바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봐도, 땅을 굽어보아도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더욱 요청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멸시에도, 조롱에도, 억울함도 참을 수 있는 묵묵한 침묵의 기독 신자로 이 험난한 인생길을 헤쳐가면서 주님 침묵의 모습을 묵상함으로써, 성숙한 기독 신자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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