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11. 예수님의 여성제자

solomong 2024. 11. 16. 11:12

11. 예수님의 여성제자

(본문: 요12:1-8, 20:11-18)

 

1. 서론: 근래 여성들의 시각에서 성서를 보려는 노력은 남성중심에서 본 성서 해석에 대한 제동을 걸고 있으며, 특히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흐름입니다. 유대사회 전통의 원천인 구약에서의 여성관은 남성위주의 사회가 고착됨에 따라서 남녀차별이 고질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우선 남녀차별의 기본적인 근거인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그를 도울 누군가가 필요해서 여러 종류의 짐승들을 창조하여 아담에게 예속시켰으나, 저들은 아담을 돕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이는 남자와의 관계에서는 이브는 창조질서로 볼 때, 종속적이라는 것이고, 또한 아담의 외로움을 달래 줄 대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구약의 가부장제도 하에서 혈통을 잇는 기능으로(창38장), 性에서 남녀 차별의 말씀도 있습니다.(레12: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에 대한 말씀 속에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 하고 있습니다. 세리와 더불어 창기들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말씀 속에서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마21:31) 그토록 정결 법을 주장하는 사회임에도, 부정한 죄로 인해서 정죄 받았다고 하는 혈루 증으로 앓는 여인에게 “딸아”라고 부르며, “평안히 가라.”고 한 것은 아주 다정한 예수님의 자세가 잘 드러납니다.(막5:34) 예수님은 가부장제도 사회에서 자주적인 존재로 여인을 대했을 뿐입니다.(막10:6-8, 11-12) 그런고로 여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노릇을 똑똑히 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마리아는 3가지를 예수님께 받쳤습니다. 첫째는 값비싼 향유를 드렸고, 둘째는 자신 몸의 한 부분인 머리털을 바쳤습니다. 유대의 풍습에는 부인들이 그 머리털을 公衆 앞에서 푸는 것은 대단한 치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소중한 머리털을 풀어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예수님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극한 행동이었습니다. 셋째는 그녀 자신의 마음을 바쳤습니다.

 

②.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유대인은 장례 때, 시체에 기름을 바른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이 기름을 주님의 몸에 미리 바른 셈이 됩니다. 예수님 수난의 서론을 장식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과 관련시켜 보면, 장례를 위한 것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죽임 당함을 기정사실로 아는 예지(銳智)를 가졌고, 주님께서는 고귀한 마리아의 봉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③. 요20:11-18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본문 12:1-8에 나오는 마리아는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등의 3남매 중, 마리아를 지칭하고 있습니다만, 막달라 마리아는 눅8:1-3에 나오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를 말합니다. 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부활한 주님을 제일 처음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고하였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 갈 때도, 뒤 따라 갔으며, 그들이 돌아 간 뒤에도 그녀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강열한 여인의 애정은 여인의 연약한 天性을 덮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⑵.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그녀는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오열하는 중에, 부활하신 주님의 첫 음성은 동정과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⑶. “동산지기인줄 알고.......당신이 옮겨갔거든.......내가 가져 가리이다.”-그녀는 아마도 동산지기가 주님의 새 무덤에 십자가의 죄수를 같이 둔 것이 싫어서 옮겼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여기에서도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애정은 풍성히 엿보입니다. 그 첫째는 그녀는 한 번도 시체라고 하지 않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를’(αὐτόν-3번 나타남)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둘째는 그녀는 주님(시체)을 가져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산길에서 일개 연약한 여인이 남자의 죽은 시체를 어떻게 매고 가겠다는 말인지요! 그녀의 가슴에 불타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이런 담대한 용기를 발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에, 저마다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와 같은 성도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3. 본론(Context):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다닐 때, 열두 제자와 더불어 많은 여인들이 동행하였습니다.(눅8:2-3) 그들은 특별히 병으로 고통 중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은 여인들이었으며,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 주변에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맨 처음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서(15:40-41)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투하시면서 종래 운명하실 때, 이를 지켜 본 여인들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면서, 마지막 수난기간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자기들의 안전을 개의치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23:27)에는 그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해 슬퍼하며 통곡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뒤 따르는 女 弟子 집단 속에 있는 개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나 신앙고백에 대해서 성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여인들에 대한 기사는 마태복음서(26:6-13)와 마가복음서(막14:3-9, 16:9-11)에도 나오지만, 그 이름을 요한복음서에만 밝혀서 ‘베다니의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사의 序幕을 장식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었으며, 베다니의 마리아는 3가지를 예수님께 받쳤습니다.

 

그 첫째는 값비싼 향유를 드렸고(물질), 둘째는 자신의 몸의 한 부분인 머리털을 바쳤습니다. 유대사회의 풍습에는 부인들이 公衆 앞에서 그 머리털을 푸는 것은 대단한 치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소중한 머리털을 풀어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눅7:36-50.비교참조)예수님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극한 행동이었습니다. 셋째는 그녀 자신의 마음을 바쳤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께 대한 고마움에 대한 사랑과 信心의 발로였습니다.

 

그런데 3복음서에서 남자 제자들은 일상적인 입장에서 여인의 낭비성을 비판합니다.(본문에서는 가롯 유다로 국한시킴.) 그러나 이 여인은 비상한 때(주님의 수난)를 예지하고, 비상한 행위를 감행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루살렘 상경 길인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의 수난의 예고를 듣고서 예수님의 수난선언을 철회하시라는 말을 진언했습니다. 이는 수난의 길을 거부한다는 뜻도 포함된 것이었습니다.(마16:21-28)

 

이와 같이 베드로는 그의 위대한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은 상부(相扶) 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주님은 비장한 각오로 메시아로서의 속죄의 대업을 완성하시려는 그 길목에서, 야고보 형제를 비롯한 제자들은 아롱진 연분홍 장밋빛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마20:20-28, 막10:35-45) 마태복음서에는 야고보 형제의 어머니 되는 살로메가, 마가복음서엔 직접 야고보 형제가 예루살렘에 상경(上京)하여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좌우 정승 자리에 오르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 형제를 제외한 제자들도 꼭 같은 공명심이 있었고, 그래서 시기심이 나서 분히 여겼던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마리아의 행동은 그 어느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인식한 것이며, 그 인식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였음에도 스승의 갈 길을 몰랐는데, 그녀는 예수님의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통찰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보답으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함이 그녀의 눈을 뜨게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란 이 여인은 결코 그 사랑에 침몰되지 않고, 사랑하는 주님을 잃는다는 아픔을 넘어서는 강인함을 행동으로 그녀의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주님을 따르는 기독자들! 특히 여전도회 회원들! 여성은 연약하고 감수성이 예민하여 사랑을 옆으로 아래로 주고 받아서 먹고사는 존재일지라도, 일단유사시엔 이런 강인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한 ‘에스더’와 같은 결단력이 있는 신앙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 중에서 사람의 뜻을 선택했기에, ‘사탄’이라고 비판을 받은 대신에, 이 여인은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 중에서 사랑의 아픔을 견디면서, 메시아의 길을 선택했기에 예수님께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것입니다.(막14:9)

 

다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관련된 말씀들을 묵상해 보십시다.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자로서(심한 정신병자), 일곱이라는 숫자는 최악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때(눅11:26), 그녀의 병이 重病이었음에도 예수님에 의해서 치유된 자로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의 여 제자 반열에 우뚝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막16:9, 눅8:2-3)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있을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인 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2제자들이 죄다 도망해 버렸음에도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예수님의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 처형의 현장을 멀리서 눈물지으며 바라보았으며(막15:40), 주님의 시체를 둔 곳까지 확인하였습니다.(막15:47)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몇 여인들과 함께 주님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죽은 시체라도 섬기겠다는 애절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막16:1-2)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님의 현시체를 처음 그리고 홀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사건의 중심적인 증인으로 부각된 것입니다. 그녀는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출되어 새사람이 된 그 사실을 두고두고 가슴에 아로새기면서, 생명의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의 이 엄청난 사건에 증인 노릇을 당당히 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새벽 미명에 죽은 예수님이 무덤을 찾아 갔다가 빈 무덤 곁에서 울고 있는데, 부활한 주님께서 홀연히 나타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자 마리아는 ‘랍오니’(나의 선생님)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지금까지의 지상에서 육적 주님을 보며, 말씀을 들으면서 사귐을 나누어 왔던 신앙에서 탈피하고, 이제는 영적인 성령의 교제를 통해서 하라는 의미에서 만류하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고하였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 갈 때도, 뒤 따라 갔으며, 그들이 돌아 간 뒤에도 그녀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강열한 여인의 애정은 여인의 연약한 天性을 덮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계속 울고만 있는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시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첫 음성은 동정과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동산지기가 주님의 새 무덤에 십자가의 죄수를 둔 것이 싫어서, 부활한 주님을 향하여 “동산지기인줄 알고.......당신이 옮겨갔거든.......내가 가져 가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도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애정은 풍성히 엿보입니다. 그 첫째는 그녀는 한 번도 ‘시체’라고 하지 않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를’(αὐτόν-3번 나타나고 있음.)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둘째로, 그녀는 주님(시체)을 가져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산길에서 일개 연약한 여인이 남자의 죽은 시체를 어떻게 매고 가겠다는 말인지요! 그녀의 가슴에 불타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이런 담대한 용기를 발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에, 교만(驕慢)과 獨善에서가 아니라, 희생정신과 신앙으로 저마다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와 같은 성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결론: 우리는 예수님의 남성 제자 群인 12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교훈과 행적에 관한 기사는 복음서에서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만, 예수님과 여성제자들과의 관련된 말씀 내용은 그렇게 많이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에 대한 예수님의 일반적인 평가는 당시 사회풍조로 보아서, 예수님이 여성들과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명예스런 일이 아니었기에, 성령의 지시함에 따른 복음서 기자들이 축소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의 이름도 거명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사건을 예감한 베다니의 마리아와 부활의 목격자인 막달라 마리아를 위시한 여인들의 이름이 본문 요한복음서 외에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여인을 이야기의 주인공을 삼을 때는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것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략, 예수님 편에서 여성을 보는 시각의 그 대표적인 관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정한 재판관과 과부 이야기(눅18:2-5)속에는 과부라는 신세가 말해 주듯이 가난하고 외로우며, 아무런 힘도 못 가진 여인으로서 억울하게 수탈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남성재판관과 대결시켜서 여인의 집요한 투쟁 끝에 재판관이 항복한 것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끈질기게 인종하여 이겼다는 표본이 되는 교훈의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과부는 돈 많은 부자 남자와 대조하여 등장시켜서, 물량적인 면에서 보면 남성이 우세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여인은 가진 것 全體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여인의 헌신적인 진실이 남자 부자의 물량적 우위를 이긴다는 교훈도 있습니다.(막12:41~) 또한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닌 헬라 여인(수로보니게)인데 병든 딸을 구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해 왔습니다.(막7:24-30)

 

그러나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거절의 뜻으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고 시험해 보려는 의도로, 인격 모욕적인 잔인한 거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답변은 절실한 모성애와 더불어 그녀의 슬기로움으로 응해 왔습니다. 이 여인을 시험으로 말씀해 보신 것이며, 동시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기 위한 예수님의 동기였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지어서 주목되는 것은 유대의 종교적 모범 자들과 대립되는 세리와 더불어 창기들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교훈(마21:31)의 말씀도 있습니다. 이상에서예수님의 여성관은 단순히 남성의 뒷바라지나 하고 남성을 섬기는 가부장적인 종속관계를 부정하는 교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수난사와 부활의 사건에 관한 본문의 교훈들은 12제자들보다도 월등했습니다.

 

여성제자들의 예언자적인 통찰력과 생명의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의 이 엄청난 사건에 證人 노릇을 당당히 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눈물 뿌리며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과 믿음은 여명(黎明)의 아침을 고하는 새벽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에, 교만(驕慢)과 獨善에서가 아니라, 빛나는 예지와 희생정신으로 저마다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성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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