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상한 갈대(1)
(본문: 마 12:17-21)
1). 서론: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은 파스칼(Pascal)의 저서 ‘팡세’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대개 한 번쯤 들어서 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남긴 저서 ‘팡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갈대’일 것입니다. 일단 이 말이 등장하는 문단 내용을 한 번 살펴봅시다.
“인간은 하나의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자연 중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무찌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무찌른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주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그의 사고(思考)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고(思考)에 의해서 스스로 높여야 한다. 우리가 모두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잘 사고(思考)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의 근본이다.”
여러분들 중에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을 오해하여 인간이란 워낙 생각이 많아 갈대처럼 갈피를 못 잡는 우유부단한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파스칼은 ‘갈대’를 통해 전하려 한 메시지는, 인간이란 사유(思惟)하는 능력 외에 아무 힘도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의 ‘갈대론’을 “나는 생각한다, 그런고로 존재한다.”라고 철학자 ‘데카르트’는 그의 선언에서 차원이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생각’이‘존재’를 확증한다는 뜻이라면, 파스칼은 여기에 ‘생각’이 인간 존재를 ‘존엄’하게 만든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주장을 데카르트식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런고로 존귀하다.”(I think therefore I am noble.)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존귀한 존재일지라도, 시공(時空)을 초월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 고로, 상한 갈대와 같이 인간의 존재(存在)도, 사고(思考)도 천지간에 불가항력적이며, 인간의 집착(執着)은 한갓 된 허무와 존재의 유한성이기에, ‘상한 갈대’와 같은 인간 존재는 다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연민(憐愍)의 범주(範疇)에 속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입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본문의 부러진 갈대와 다 달은 심지는 고해(苦海)에서 시달리는 인생과도 같습니다. ‘상한 갈대’(συμτετριμμἐνον-숨테트림메논)= ‘깨뜨리다. 산산이 부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 원형의 의미는 ‘이미 썩어 부서진 갈대는 꺾지 않고, 그대로 놔두어도 되살아날 가망이 없는 갈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맹수에게 밟혀 꺾어진 상태에 있는 갈대’라는 말입니다. 또한 ‘마귀에게 짓밟힌 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꺼져가는 심지’(τυφὁμενον=투훼메논)=‘불이 거의 다 꺼져 연기가 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실오리 같은 소망 중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갈대란 ‘연약한 것’을 상징합니다. (왕상 14:15, 왕 하 18:21, 겔 29:6) 약한 인생을 상징하는 데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민하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양심의 빛을 잃고 타락해 가는 인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C.의 성서 해석학자 제롬(Jerome)은 ‘상한 갈대’를 이스라엘, ‘꺼져가는 심지’를 이방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상한 갈대’는 순전히 하늘의 힘으로 회복되고, ‘꺼져가는 심지’는 기름을 공급함으로 회복된다고 성서해석 학자 크락크(Clarke)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런 인간들을 버리지 않으며, 이런 심각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겠습니다.
3). 본론(Context):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사42:3)인데, 구세주가 오시면 성취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그 말씀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대로 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구세주가 하실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상한 갈대, 꺾어진 갈대가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것처럼, 인간실존이 꼭 이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꺼져가는 심지’와 같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한 가닥 실오라기와 같은 희망 중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라, 확실히 보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인생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삶이 힘들지라도, 그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고통이 겹겹이 쌓여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으시는 분이 아니라, 상한 갈대를 회복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고, 내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터널(Tunnel)에 갇혀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주시고. 우리에게 희망을 안고 찾아오셔서 우리를 회복도록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겉으로 보이기에 강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연약합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 크나큰 시련 앞에, 근심과 걱정 앞에, 꺾이기 쉽습니다. 인간은 겨우 불빛을 이어가는 바람 앞의 등잔불과 같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 크나큰 시련 앞에, 근심과 걱정 앞에, 꺼져버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강한 척합니다. 교만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인간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진노를 나타내 십니다. (롬1:18)
하나님께서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인간을 꺾지도 끄지도 아니하십니다. 엄청난 진노의 심판으로 인간을 완전히 멸하실 수 있지만, 긍휼과 용서의 빛을 비추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을 살리기 위해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나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갈대가 자라는 땅은 황무지입니다. 야생짐승들이 자리 잡고 자는 곳입니다. 갈대는 가치로 따져 볼 때, 별 볼일이 없는 것입니다. 포도, 야자, 석류는 열매를 땁니다. 소나무, 백향목과 같은 나무는 단단하고 좋아서 목재로 쓰입니다. 장미, 백합은 꽃이 아름답습니다. 갈대는 가늘고 연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갈대와 같은 애급을 의지하지 말라"(왕하 18:21)고 하셨고, 주님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마 11:7)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인간은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하나의 연약한 갈대입니다. 그래서 바람에 꺾이고 짐승의 발굽 아래 짓밟혀 상한 갈대처럼, 오늘 우리는 상처받고 쓰러지는 것 같습니다. 다만 파스칼의 명상록 ‘팡세’에서 "생각하는 갈대"일 뿐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베르디의 가곡인 ‘리골레토’(Rigoletto) 가운데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라고 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중에서 제3막에 등장하는 아리아-La donna è mobile: ‘여자의 마음’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가 ‘위고’가 쓴 희곡 ‘방탕한 왕'을 바탕으로 하여, 1851년에 완성한 오페라 '리골레토' 중, 제3막에서 호색한 ‘만토바’ 공작이 군복 차림으로 자객 ‘스파라푸칠레’의 주막에서 의기양양하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변하기 쉬운 여자의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이 오페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데, 열일곱 살 순정의 여주인공 ‘같다.'라고 사랑하는 남자가 바로 이 바람둥이 만토바 공작입니다.
보통 생각하는 정도 이상의 바람둥인데, 공작이라는 신분의 권력을 이용해 온갖 못된 짓도 서슴없이 하기에, 바람둥이 최고 권력자에게는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은 애초에 관심도 없습니다. 여자란 그저 조금만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마음이 움직이는 갈대와 같다고 노래를 합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지금도 인기 있는 아리아 중 하나하고 합니다. 아리아의 가사를 소개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눈물을 흘리며 향긋하게 웃는 얼굴의 모습으로 남자를 속이는 여자의 마음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여자의 마음은 변합니다. 변합니다, 아~~~~ 변합니다. 그 마음 어디에 둘 곳을 모르며 항상 들뜬 어리석은 여자여 달콤한 사랑의 재미도 모르며 밤이나 낮이나 꿈속을 방황한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여자의 마음 변합니다.”
어찌 여자의 마음뿐이겠습니까! 성별(性別)을 초월하여, 인간은 샤론의 장미꽃도 아니요, 레바논의 백향목도 아닙니다. 늪지 숲의 갈대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인생을 갈대에 비유한 까닭은 인간이 갈대와 같이 연약하여 부러지기 쉽고 또 환경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상하기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마 11:7, 눅 7:24)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실 때, 로마 병정이 예수를 향하여 그의 옷을 벗기고 붉은 옷을 입히며, 가시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난 다음에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막15:19)라는 말씀은 갈대로 예수님을 때리는 도구로 사용이 되기도 했고, 십자가에 달려 신음하는 주님의 입에 신 포도주에 적신 해면(海綿)을 꿰어 드린 그 막대기도 갈대였습니다. (막 15:36) 본문에서 언급한 인생을 "상한 갈대"라고 표현한 것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해 봅니다.
이러한 썩은 갈대와 같은 인생이지만 주님은 꺾지도, 버리지도 아니하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무력과 한계성을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대 중에서도 쓸모없는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라도 놓치지 않으시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천한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고 항상 돌보시며 미천한 우리에게 주님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판단에서는 상한 갈대를 돌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예 꺾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가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11:11-13)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치료하여 성하게 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 돋우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상처 입은 갈대입니다. 세상의 풍파로 고통과 실패의 쓴잔을 마신 인간실존입니다.
겉으로는 다 든든하고 성해 보이지만, 그 가슴 속에는 누구나 상처를 지니고 사는 것이 인간 생활의 현실입니다. 상한 갈대, 이것이 인간의 처참한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의 성품은 인자하시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무지한 사람들은 이런 갈대를 짓밟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파상(破傷)된 인격을 고쳐서, 쓸모 있는 인간으로 만드십니다.
천국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귀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회복시키시고 성령의 불길로 타오르도록 하시는 분이 십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란 전혀 쓸모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불어서 꺼버리거나 아니면 이미 쓰레기통에 들어갔어야 했을 것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도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한번은 가르치실 때,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모세의 법률로 말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아니 하시니, 이들은 속히 대답하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간음하다가 붙잡혀온 여자, 문자 그대로 상한 갈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예 꺾어 버리기를 재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얼마 후에 조용히 머리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하시면서 머리를 숙여서 땅을 보시고 무슨 글자를 씁니다. 얼마쯤 후에 머리를 들어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곳에서 다 헤어지고 그 여자만 홀로 섰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定罪)한 자가 없느냐.”(요8:10)고 물으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선언하신 것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할 대로 상한 Augustine 같은 청년을 불러 회복시켜서 1천 년간의 기독교사상을 지배할 수 있는 위대한 신학자를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사유와 구원이었습니다. 지금에도 빈궁과 실패와 병과 슬픔과 죄에 상한 인간들을 불러서 죄를 사해 주시고 회복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 삼고 하나님의 꽃동산에 귀한 꽃으로 삼는 것이 우리 주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하게 되는 것도 오로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라는 말씀을 좀 더 언어의 글자대로 번역하면 “연기 나는 삼대를 끄지 아니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불꽃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티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적은 불티만 남았으니 연기만 납니다. 이런 작은 불티를 예수님께서는 멸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숨결로 불어서, 성령의 바람으로 불을 다시 일으키고 큰 빛을 발할 수 있는 등대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 가지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리 사람의 눈에는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인간의 그 깊은 속에는 이 작은 불티(지극히 미미한 양심)가 존재한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 꺼져가는 심지’는 ‘작은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작은 불티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너무 작아서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남을 위해서 무슨 봉사를 하지 못합니다. 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지도 못합니다. 또 불티만 있어서 연기만 납니다. 그 연기는 우리 눈만 쓰리게 하여 방해가 됩니다. 이 작은 믿음은 말하자면 그 연기가 많이 있습니다. 의심의 연기가 있고, 근심의 연기가 있고, 불평의 연기가 있고, 그리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이런 작은 믿음을 멸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작은 믿음, 의심 있는 믿음의 그 불을 돋우셔서 점점 불길을 크게 만드시고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빛을 비출 수 있는 큰 믿음의 등대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혹 우리가 이런 작은 믿음이라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 좀 의심한다고, 어떤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좀 부족한 습관이 있다고 멸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연민에 찬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입었기에, 우리가 보답하는 길은 주님과 형제를 위한 사랑의 삶이어야 합니다.
4). 결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그 갈대를 회복하시고, 그 희미한 불을 돋우어서 큰 등대를 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서,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모든 죄인을 주님 앞에 구원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그 사랑에 대한 보은(報恩)의 삶이 됩니다. 이런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