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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自然에서 얻은 지혜
(본문: 마6:25-34)
1). 서론: 이제 서늘한 가을이 왔습니다. 자연의 품에 안겨보면 더 한층 가을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정황으로는 가을은 아픔의 계절입니다. 소슬바람 한 줄기 가슴을 스치는 날, 쌓이는 지난날의 아쉬움으로 잠 못 들어 뒤척이고, 낙엽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이 고이곤 합니다. 모든 것을 채워도 허한 가슴 공허함으로 고혹(蠱惑)을 새겨 놓고, 가을 녘 홀로 눈시울 적실 때, 갈대 꽃 소리만 요란합니다.
가을은 붉게 멍든 우리 인생의 가슴에, 꿈인 듯 서성이던 자리에 추억은 아련하고, 두고 간 그리운 이들의 숨결은 여전한데, 가슴을 파고드는 가을의 쓸쓸함을, ‘그 무엇으로 이 가을의 아픔을 치유할 것인가.’가 가을 계절의 낭만적인 허무감이 감돌게 합니다. 이 허무감을 주님께서 치유토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가을의 기도/김 현 승/⑴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⑵.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비옥(肥沃)한/시간을 가꾸게 하소서.⑶.가을에는/홀로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감상]:이 작품은 절대자(絶對者)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사랑,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완전한 고독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망은 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일반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1, 2, 3연에서 (1).가을은 각각 낙엽이 지는 명상의 계절, (2).풍성한 열매가 맺는 결실의 계절, (3).누군가를 찾게 하는 고독의 계절로 그려집니다.
즉, 이 시는 가을의 상념(想念) 속에서 반성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가을을 맞아 식물들이 과실을 맺듯이, 인간도 절대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가을의 고독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찾는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 시의 시상(詩想)은 이렇게 3연을 향해 집중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향하기 위한절대 고독의 상태를 형상화(形象化)한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가 작품의 중심적인 시구(詩句)라 할 수 있습니다.
2). 본론(Text): 마5장에서 예수님은 기독자의 기본자격(원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6장에 와서는 구체적 생활 내용(실천)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자의 실천생활 내용 중에서, 땅의 보물을 쌓으려는 염려를 경계하시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확실한 증거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새를 먹이시고, 꽃을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인생들의 삶에 대한 염려는 할 것이 없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말씀 중에서 25절에 ‘염려하지 말라’(μή μεριμνᾶτε)는 용어의 동사는 ‘염려하다’(μεριμνάω-메림나오)이며, 명사로는 ‘염려’(μερίς-메리스)로서 그 뜻은 “분열”이란 뜻입니다. 염려가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기 때문입니다. 생명 없는 흙에 불과한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채우려 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야 하는 것뿐이며, 나누어진 마음은 반드시 짝을 찾아야 하는데 생명 없는 것만을 찾아 방황함으로 생기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정한 짝인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옷을 입으려는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란 말씀은 ‘염려하지 말라’는 철저한 대조의 교훈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자 중에서, 최대로 많이 쌓을 수 있는 자는 왕자(王者)일 것이며, 왕자 중에서도 그 대표적 인물이 ‘솔로몬’의 영화(榮華)라는 것입니다. 특히 솔로몬의 영화를 상징하는 그의 옷도 들에 피는 백합화의 아름다움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사는 사람의 삶은 염려하면서 사는 왕자의 생활보다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1). 낭만주의자 예수님: 예수님은 자연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시골마을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습니다. 그곳은 넓은 들판과 적당한 산기슭이 있는 시골이라서, 호수에서 노 젓는 광경, 재배되는 포도나무들, 일출과 석양의 붉은 노을, 밭이나 무화과나무에서 노니는 새들을 보며 성장하셨습니다. 그는 어떤 학자의 책을 읽거나 연구해서 교훈의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목수의 일손을 놓고 때로는 호젓한 자연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따듯한 것은 자라온 환경의 영향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성품은 나사렛에서 지내실 때 자연을 접촉하고 감상하면서 얻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에서 천국을 보셨으며, 바람을 보면서 성령을 생각하셨고, 우리를 특별히 매료시키는 것은 예수님께서 들에 핀 백합화에 관해 비유를 드실 때,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는 말씀은 아름다움에 대한 묵상 혹은 예술가들에게는 풍부한 영감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 하였느니라”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들풀도, 공중 나는 새도, 돌보시는데, 하물며 주의 백성들이야 비할 바가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자연을 대하시는 그의 놀라운 통찰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에는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과 생명에 대한 깊은 묵상이 실려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직접 아름다움을 창조하시길 좋아하셨고, 그 자신 스스로 아름다움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시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 분이 하시는 일마다 아름답게 변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보통 예술가는 자기가 받은 감동을 전해주지만, 예수님은 직접 감동을 만드시는 분이었다. 자기 존재를 뽐내기 위해 그러신 것이 아니고, 연약하고 고독한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창조적 에너지를 언제나 영화롭고 아름답게 쓰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거니시고 또 파도치는 소리를 들으시면서 낭만을 즐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목가적인 시인처럼 자연에서 영감을 받는 주요한 동기로 생각하셨습니다. 그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하나의 콩트(conte)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심호흡을 하고서 머리를 들어 창밖을 감격에 찬 심경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눈물을 흘리셨고, 민족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과 로마 학정 하에서 고달픈 삶을 사는 동포와 장차 임할 도성의 폐허를 예견하면서 우시었습니다. 때로는 시대의 분별도 못하는 어리석은 군중들은 자기를 임금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홀로 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답답하고 철부지한 제자들의 언행을 생각하면서, 외로움Loneliness)을 극복하기 위하여, 홀로움(Solitude)속에서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이 얼마나 낭만주의자의 모습인가! 자연을 사랑하고, 가련한 슬픈 인생을 보시고 말 할 수 없는 연민의 정을 가지셨고, 군중과 제자들을 떠나 멀리서 혼자 고독을 즐기셨습니다. 그 고독은 그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 *낭만주의는 무엇인가? 서구의 18C.-19C.초의 낭만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은 시간상 생략하지만, 한국적 해석으로는 ‘멋’이라고 생각합니다.
'멋'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국문학자인 이희승 선생은 '흥청거림'과 '필요 이상(비실용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차림새, 행동, 생김새 등이 세련되고 아름다움", 또는 "온갖 사물의 진미"라고 풀이했으며, 연세대 교수이었던 김하태 박사는 “인생의 높이와 깊이"라고 하면서, "인격적인 생활로부터 예술적 생활로 옮겨가는 것, 또는 습관적인 생활에서 문화적인 생활로 들어가는 것, 타산적인 생활에서 비타산적이면서 창조적인 생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5리를 가고자 하거든 10 리를 동행하라고 했습니다. 5리를 가는 것은 의무의 생활이고, 나머지 5 리를 더 가는 것은 사랑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 멋있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다는 것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면서 골고다 석벽 위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속량하신 것, 어찌 멋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름 없는 시골 여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줄 곳 시골뜨기로 자라나셨고, 나이 30세까지 목수 일을 했고, 그리곤 3년 동안 정처 없이 떠도는 전도자이었으며, 그는 한권의 저술도 없었고, 사무실은커녕 사글세방 한 칸도 없었으려니와 피곤한 다리를 쉴만한 따스한 가정도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멋쟁이의 삶이 아니었던가! 단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 속에 묻히어서 하늘나라의 진리를 비유로서 교훈하셨으며, 때로는 고독히 홀로 사색과 기도의 삶을 산 낭만주의자이었던 것입니다.
유물론자(唯物論者)들은 배를 채울 수 있는 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낭만(浪漫)의 변두리를 왕래하는 사람들은 영혼(靈魂)의 생명이 그리워서 배회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따금씩, 도시빌딩의 jungle 속을 떠나 대자연의 품에 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선한 공기를 호흡키 위해서도 그렇지만,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한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觀照)하면서, 자연은 저마다의 반면교사(反面敎師)이기도 합니다. 도시 빌딩의 정글 속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그 능력이 창조해 낸 문명의 이기밖에 보이지 않아서, 거기에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허나 대 자연에의 품속에 안겨보면, 거기에는 인간의 능력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공중 나는 새, 들에 핀 야화, 쪽빛 푸른 하늘, 떨어지는 낙엽 속에 새봄을 준비하는 새로운 움의 기지개, 강풍 폭우 낙뢰 속에서는 ‘인간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향하여 눈을 돌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고 하십니다. 참새 2마리가 한 앗사리온(노동자 하루 일 삯이 한 데나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활문제, 의식주(衣食住)문제 때문에 지치고 지친 가난한 무리들을 향하여 빵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주시지 않고,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만 하십니다. 인류문화 역사에서 최절정의 영광을 누려 본 Solomon의 그 영광도 이 들의 핀 한 송이 꽃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곧 아름다운 자연은 빈곤에 지치다 못하여 마음까지 가난하게 된 우리 인생들에게 영원한 스승으로서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청빈법관(淸貧法官)이었던 조무제 대법관은 “법관은 고독함이 따르지만 그 고독함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달갑지 않은 어둠 같지만 고독에 익숙해지면 미처 볼 수 없던 은밀한 사물의 존재까지 알아보는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법관이 하는 판단에는 사색이 필요합니다. 사색은 외로움에서 나옵니다.”라고 그의 대법관 퇴임식 때 말했다고 합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법전(法典)과 인간상황(人間狀況) 그리고 성경(聖經)과 인간실존(人間實存)에 대한 정확한 판단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주의 종들이 걸어야 할, 아니! 목사가 걸어야 할 본궤도를 걸어가고 있는가를 한 청렴한 법관의 삶을 통해 반추(反芻)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自然은 침묵을 배워 줍니다. 자연은 봄바람 가을비에도 그 여름날 폭풍우와 벼락 속에도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다만, 소리 없는 말이 온 땅에 통하고, 그 침묵의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저 우뚝 솟은 남산과 한라산, 여기 팔공山은 봄바람 가을비 찬 서리에 말없이 줄곧 서 있기만 합니다. 봄엔 연초록으로, 여름엔 녹음으로, 가을엔 천산홍엽(千山紅葉)으로, 겨울엔 소복단장을 하고서 아무런 말이 없이 그냥 있습니다. 희랍인들은 인간이 동물보다 귀하다는 뜻으로‘이성’을 가진 동물’(Homo Sapiens)이라고 하였습니다.
‘大地’의 저자 펄벅은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있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외세에 의해서 中國 땅이 英國의 발굽아래, 日本의 발굽아래 짓밟히어도 영원히 그 땅을 정복 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골육상잔의 비극 속에서 大地는 한때 통곡하고, 눈물도 흘리지만, 고요히 인종(忍從)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이성을 가진 동물! 말하는 동물! 말! 말! 그것 때문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가운 ‘理性’을 앞세울 때 뜨거운 신앙의 정열(情熱)은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고요히 기도하던 눈을 부릅뜨고, “내가 소경이 아니고 스스로 섰다”고 자부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옷자락은 성전 지성소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우리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을 때는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너 좋을 대로 해보아라.”고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두려운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시는 순간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26절엔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라고 말씀하는 중에 ‘내어 버려두사’(포기했다,Give up!)는 말을 많이 하고 자기의 능력에 교만할 때, 하나님은 침묵(沈黙)하신다는 것입니다. “너 해 볼대로 해봐!” 우리가 묵묵히 주님의 은혜를 갈구 할 때, “하나님은 이젠 내가 해 볼 태니, 기다려 봐라!” 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에서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고요한 음성을 듣는 기도생활은 말보다 능가한 예지를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린 이따금씩 정신없이 대지를 밟고 뒹굴던 그 자리에서 고요히 침묵의 날개를 펴고 하늘을 훨훨 날아 보아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저는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이 未知의 大地를 지나 갈 수 있는 ‘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너희는 왜들 그리 말이 많으냐?”, “왜들 잔소리와 불평이 그렇게 많으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哲學은 ‘경이’(驚異)와 함께 인생의 오소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지만, 信仰은 인간 세상에 대해서 귀를 막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고요히 속삭이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홀로, 봄 동산의 공원을 산책하며, 생명이 움트는 나무 밑에, 낙엽 지는 나무 밑에 않아서 자신을 성찰(省察)하는 그런 시간과 공간을 가져 보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에 “무화과 나무아래 있었던 나다나엘을 보았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의 인간의 진실성(眞實性)을 격찬하여 “자네야말로 참 이스라엘이다.”함은 무화과나무 아래 친구들과 떠들썩한 세상 잡된 이야기보다, 나다나엘은 자기 영혼을 성찰하는 제단을 쌓았다는 말입니다. ‘명상의 기도’의 장소로 그런 나다나엘을 주님이 보셨단 말입니다! 문제는 무엇보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인생의 문제와 가치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오늘의 문제는 저마다의 무화과나무 아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성공의 길을 위해서 어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궁리하는 혈안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자들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찬 이슬에 몸을 적시며 고민하는 잠 못 이루는 진실의 밤을 보내지 못함이, 참으로 오늘의 우리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 밑에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에 고민하는 그 순간 주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찰라 라고 생각합니다.
3).자연의 침묵 속에서, 다르게 들려오는 소리는, ‘복종’하는 미덕의 세미한 소리입니다. 다소곳이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따라서 말없이 복종(服從)합니다. 새싹이 파릇하게 돋아나는 봄 동산에, 그 길고 긴 장마와 폭풍우 속에도 산사태가 나고 길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죽어지는 그 때도, 이젠 찬이슬이 내리는 허전한 이 만추에도 그리고 눈보라 치는 엄동설한에도 자연은 말없이 복종만 합니다.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백합화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거나 말거나, 자연은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향기와 미를 발합니다. 불평 없이 말입니다. 들국화 향기 그렇게 야단스럽게 발하더니 찬 서리 엄습하니 이젠 사명이 끝난 듯이 명년을 기약하며 고요히 고개를 숙입니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절후는 빈틈없이 질서 정연히 돌고 돕니다.
진실로 그대는 창조주 하나님의 충성스런 충복인 것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다지도 天倫과 人倫사이에서 그처럼 많이 방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실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순종이 이 가을엔 순순히 나올 수 있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침묵 속에서 차분한 복종이 나오고, 그러니 절로 삶의 기쁨을 자연에서 배우게 됩니다.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는 우리에게 무언의 기쁨을 가르쳐 줍니다.
저들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 되면 그 아름다운 백합화는 아궁이에 던져 질지도 모르며, 푸르른 창공에 기뻐 노래하던 새들은 어느 사냥꾼의 총알에, 힘센 날 짐승의 습격을 받아 생명의 종말을 고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두운 내일의 운명(運命)의 그림자 때문에, 결코 오늘에 주어진 삶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내일 일은 내일 보자고 합니다. 저들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다만 삶이 주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을 다름입니다. 그러기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어 땅에 떨어지는 것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4). 결론: 어떤 의미에서는 1). 우리들은 낭만주의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예수님의 제자들이니까’, 말입니다. 2).우리들은 공연히 내일 일을 미리 당겨서 염려하며, 슬퍼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연에서 지혜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가금씩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치묵(沈黙)속에 자신을 성찰하는 중에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3). 그 음성에 자연처럼 복종(服從)해 봅시다.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제가 저를 아는 것보다 주님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 인도하십시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주어진 오늘에 기뻐하고 내일은 당신이 주관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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