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7. 마음의 동기와 행위의 결과

solomong 2024. 11. 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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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마음의 동기와 행위의 결과

     (본문: 마5:17-32)

1). 서론: 선악의 판단 기준은 동기여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행위를 할 때 항상 동기가 앞서고, 이에 맞는 결과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기는 행위의 시작이요, 원동력입니다.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 할 때, 그 행위를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했는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결과를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제외시킬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은 의미로 일을 하여도 그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의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은 동기와 결과, 둘 다 중요한 요인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교훈하시는 말씀의 핵심은 행위의 결과보다, 마음의 동기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본문의 중심문제는 십계명 중에서 제6계명과 제7계명에 대한 예리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써 표현한다면,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을 설명한 것이라고도 봅니다. 율법은 협의(狹義)로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지칭하고, 광의(廣義)로는 모세오경 및 구약전체(마5:17)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불완전성과 모순성에 대한, 복음을 통한 완성을 성취시킨 것이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제6계명에서 ‘살인’이라는 행위의 결과는 ‘미움’이란 마음의 동기에서 기인되었다는 것이요, “간음하지 말지니라.”는 ‘간음’이란 행위의 결과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視姦) 마음의 동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살인에 대한 마음의 동기는 마음속의 미음과 분노에서, 입으로 나타나는 욕설, 더 나아가서 타인에 대한 인격적 단죄와 그리고 폭력, 종내는 살인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마5:21-26)

 

간음에 대한 마음의 동기 역시 마음에서 시작하여 눈으로 전이(轉移)되고, 행위의 결과인 손으로, 팔로, 온몸 전체로 옮겨져서 결국엔 행동화 되는 과정을 교훈하고 있습니다.(마5:27-32)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동기인 마음의 정결이란 근본 방어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음욕을 품고”라는 헬라어의 어근은 ‘에피두메오’(ἐπιθυμέω)인데, ‘에피’는 <가까이에, 곁에>라는 전치사이고, ‘두메오’는 <거친 숨을 내쉬다, 욕정>을 품는 현상을 말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보며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 자체를 아예 부정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해보면, “여인을 탐내는 욕정의 목적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는 자는 이미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엄정하게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이성(異性)을 대할 때, 호감과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정 자체를 죄라고 단정하기보다, 여자와 간음하겠다는 마음가짐과 여자를 탐내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음흉한 눈빛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3). 본론(Context): 행위의 결과보다 마음의 동기를 먼저 보시는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정결한 마음과 선한 행실로 드러내길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필자가 여기서 마음의 동기가 행위의 결과를 낳는 요인 된다는 것을 그 전제(前提)하고서 이 글을 전개코자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시각은 근원적이요, 절대적인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삶속에는 ‘마음의 동기가 불순하고 불법적이어도 행위의 결과가 좋을 수 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동기가 좋아도 행위의 결과가 나쁘게 나올 수도 있다.’는 관점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대적인 관점들은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된다.”(마음의 동기불순)라든지, 독일 속담에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행위의 결과선호) 라고 하는 것은 결과에 의해서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본문의 말씀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시각에서 교훈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마음의 동기인 미움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단 앞에서 수직적인 신앙의 관계를 맺기 전에, 먼저 이웃과의 수평적인 사랑의 관계로 화해(和解)를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St. Augustine은 “형제에게 가라는 것은 다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가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도록 마음을 정결히 하라고 하십니다. 오른 눈이 실족케 하면 빼어내 버리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 보다 낫고, 오른팔이 실족케 하면 찍어내 버리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교훈의 말씀은 철저한 마음의 동기가 아름답고 선해야 한다는 마음의 혁명을 천명하신 교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의 실존 양상은 어떠합니까. 마음에도 없는 위선적이고, 분위기에 영합해서, 입에 발린 거짓된 표정과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스스로 깊이 반성해봐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생애를 괴롭히는 불행들은 자신이 뿌린 마음의 동기의 씨앗이 맺은 열매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Kant는 그의 윤리관에서 오직 선의지(善意志)와 의무의식(義務意識)만이 선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적인 동기로부터 행해진 것이 아니라면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상인이 모든 손님들에게 친절하고 정직하게 대하고 있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동기는 친절. 정직하다는 명성을 얻어 보다 많은 손님이 오도록 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은밀한 의도가 숨어 있다면, 그의 행위의 동기는 선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Kant의 윤리관은 ‘인간의 내적인 동기에 따른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Kant의 윤리관을 윤리적 동기주의(Motivismus) 또는 내적인 심정, 즉 마음의 동기여하가 도덕성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심정윤리학(Gesinnungsethik)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매일 매시 우리들의 삶의 정황에서 ‘동기주의’(어떤 일이나 행위를 하게 된 동기를 중심으로 그 일이나 행위를 평가하는 주의)에 예민한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결과주의’(어떤 행위에 있어서 그 결과의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선악이나 시비를 판단하는 입장)에 偏重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습성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미움과 분노, 즉 ‘묻지 마! 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어 폭행 및 살인행위가 일상적으로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먹고 살만하니 우리사회에서 성범죄가 날로 증가하는 추세가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기독자들이 된 우리부터 행위의 결과보담도 마음의 동기를 선악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가치판단을 ‘생활철학’으로, ‘생활의 신앙’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4). 결론: 행위의 결과에 연연하는 우리 기독자의 삶에서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교훈하신 마음의 동기를, 우리 기독자들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의 선악분별에 있어서 보편타당한 기준이 될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기독신자와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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