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무화과나무 아래 나다나엘
(본문: 요 1:43-51)
1). 서론: 이스라엘의 기후는 열대성 기후와 온대성 기후로 뚜렷하게 교차 되는 계절 현상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여름은 덥고 건조한 긴 여름이 계속되며,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의 겨울은 온난 다습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2~4m밖에 안 되는 키가 작은 나무이지만, 나다나엘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무화과나무 밑을 쉼터로 생각하고 앉아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고, 주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 나다나엘’이란 말씀의 함축성은 <고독과 사색>(자기 영혼의 省察)이란 이미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 이유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奸詐)한 것이 없도다.”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類推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계절은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때입니다. 가을은 그 화려함과 풍성함이 있으면서도 쇠락과 애잔함을 품고 있어서,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또한 가을은 순수하고 간사함이 없는 영혼에 고독이 거침없이 덮쳐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기도 하지요. 동시에 고독은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도 하지만,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뜻한 아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하게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화과나무 아래 나다나엘'을 묵상함으로 우리 자신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보시고”(έμβλἐψας) - 주시한다. 열심히 보다. 자세히 보다. 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보실 때도 “보시고”란 의미는 注視했다는 뜻입니다. (요 1:42), ②.요한복음 처음 몇 장에서 주님께서 당신을 만난 모든 사람의 사상을 해부하시고, 계셨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만합니다. 1. 베드로의 생각(1:42), 2. 빌립의 생각(1:43), 3. 나다나엘의 생각(1:47), 4. 성모 마리아의 생각(2:4), 5. 니고데모의 생각(3장), 6. 사마리아 여자의 생각(4장) 등등 주님께서는 사람의 속마음을 통찰(洞察=꿰뚫어 본다는 뜻.)하신다는 뜻입니다. (요 2:25)
③.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친구 빌립의 권면을 따라서 진리를 찾아오는 그 태도 자체가 진실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야곱)이 아버지(이삭)와 형(에서)을 속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복을 받으려 하던 야곱 시대는 진실치 못하였으나, 그가 ‘약복’ 강가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하나님을 상대하여 복을 받을 때,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창 32:28)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이란 이름 자체가 진실함을 표시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외식하고 진실하지 못했을 때(마 28장 참조),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의 마음에서 진실을 보신 것입니다.
④.‘무화과나무’-성지의 길가에 흔히 있는 것으로(마 21:19, 이때 마침 무성했을 것으로 볼 때, 유대인들에게는 좋은 휴식처와 공부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탈무드) 유대 사상엔 무화과나무는 평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왕상 4:25, 미 4; 4) 나다나엘은 언제나 로마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자유와 평화를 희구하면서, 무화과나무 아래서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와 명상에 잠겨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대망 자와 메시아가 相逢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상봉 이전에 메시아께서 <먼저> 나다나엘을 보셨던 것입니다. 메시아의 앞지른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St. Augustine의 참회록에 의하면, 그가 참회한 곳도 무화과나무 아래였다고 합니다. “나는 한 무화과나무 아래 쓰러져 정신없이 눈물에 잠겨있었나이다. 그리고 내 눈에서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그 제물이 주 앞에 상달하였나이다.”(참회록 8:28) 이상의 ‘탈무드’와 ‘아우구스티누스’ 참회록의 자료로 미루어 볼 때,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홀로 고독히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보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사료 됩니다.
3). 본론(Context): 정치적으로는 주권을 상실한 Rome 식민지 치하에 고달픈 나날을 보내면서, 기후조차 무덥고 불쾌 지수가 높은 터라, 나다나엘은 서늘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언제 이 로마 속박에서 자유를 누리게 될지, 오실 메시아만 빨리 오시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진데, 아 답답 하구나!”라고 하면서, 깊은 시름과 ‘Messiah’대망 사상에 젖으면서 “어서 오소서 주님이여!” 바램의 기도를 하던 중이었다고 봅니다.
친구 빌립의 권면과 안내에 따라 예수님께로 가는 나다나엘의 그 태도 자체가 진리를 사랑하는 진실성이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목에서 주님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큰 칭찬을 하시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찾기 전에 앞지른 사랑에서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 하신 말씀은 무한한 위로와 감격의 순간이었습니다.
어찌! 나다나엘만이겠습니까! 지금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살피시고, 깊이 洞察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정황은 어떠합니까. <이북 김정은의 핵무기로 輕擧 妄動 하는 것과 미국의 무력적 대응 자세> 사이에서 전쟁의 불바다가 한반도에서 터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공포의식에서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우리들의 모습 속에는 나다나엘의 심정과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국의 평화와 안녕은 오직 주님의 장중에 있다는 신앙적 확신과 하나님께 향한 진실성이 우리 각자의 심중에 자리 잡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새로운 나를 찾는 곳>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의 나다나엘에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자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깨끗한 성품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갖춰진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省察하며 기도로 깨어있느냐는 자문자답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소나무 밑이든, 단풍나무 아래에 있던, 골방이든, 고독히 홀로 앉아 憂國衷情의 마음과 가슴에 믿음, 소망, 사랑의 진실을 담고서 애타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의 삶이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후덥지근하다면, 지금 우리는 이에 못지않게 소나무와 단풍나무 밑의 공기는 상쾌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지만, 바람은 한결 싸늘해졌습니다. 하지만 가을의 본질은 외로움의 계절이기에 홀로 고독히 사색함과 기도하기엔 안성맞춤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또한 가을의 계절은 을씨년스럽고 떨어지는 낙엽에 실려 오는 가을바람이 이내 으스스 움츠리게 하고, 우리의 마음들을 꿰뚫고 상처를 내려는지 가슴 속으로부터 저미고 아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색과 마음의 交叉는 우리들의 마음을 想念의 세계로 몰고 갑니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 인생의 限界狀況을 晩秋의 낙엽을 보면서, 순간순간마다 삶의 값진 時空에 있는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고, 새로운 저마다의 ‘自我’를 찾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일본의 어느 문인은 가을에 귀뚜라미가 우는 것은 "인생아! 생각을 좀 하고 살아라.”라고 해서 운다고 했습니다. 깊이 고독히 사색해 보는 이 우수의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성 괴테는 “인간이 영감을 받는 것은 고독에서만 가능하다.”라고 했습니다. 고독의 상징인 나목은 고독이 아니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려는 준비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희망찬 새봄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터 오기를 위하여 노력해 봅시다.
우리는 그 일 例로 새롭게 되는 베드로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본 모습은 변절한 것보다, 마 6:75에 나오는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痛哭하니라.”라는 베드로의 진실은 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미 쏟아진 물같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깨닫고 통곡한 눈물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어 그 땅을 적시고, 그가 약하여 배신한 그 역사의 하늘에서 눈물의 소나기를 쏟은 진실입니다.
자신의 수치를 골수에서부터 아파하는 그 회한에 찬 눈물, 후환이 두려워 강경히 부정했던 자신이 비굴한 현실주의가 되고 말았음을 솔직히 긍정한 참회의 눈물이 그립습니다. 그 눈물은 분명히 눈물 이상의 짙은 液體였습니다. 뛰는 심장에 고동으로 생긴 안구의 出血이 밖으로 쏟아진 피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남에게 보여 주기 싫어서 밖으로 나가 어두움 속에서 터뜨린 통곡, 목매는 울음을 울고 또 운 오열.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일당이다. 나도 잡아가라.”라고 대들지 못한 비겁에 대한 오열이었습니다.
닭은 새벽을 알리려 울었지만, 베드로 그 자신은 자신 속에 이미 만들어진 어두움을 슬퍼해, 동물보다 못한 자신을 통탄해 또 한 번 크게 울었습니다. 자기와 같은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말미암아 역사의 어두움이 짙어져 멸망으로 줄달음친 죄악의 깊이를 바라본 격분, 이것이 베드로의 통곡입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에 버금가는 悔改이었기에 이 울음은 위대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내 십자가 밑에서 '주여, 주여' 가증한 목소리로 기도드리는 무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眞面目이 빛난 것은 자기를 똑바로 본 성찰이었습니다. 분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뉘우침. 이것처럼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통곡이 너무나 진실했기에 그의 변절의 잘못을 덮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주님은 요 21:이하에서 그에게 새로운 사명인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했고, 그는 주님을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나섰습니다. 비록 멍든 심장을 가졌으나, 그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증거 하는 것을 자기 삶의 意味로 생각하고, 초대교회 군중 앞에 서서 예수의 증인 노릇을 했을 때, 하루에 3천 명이나 회개를 시켰던 것입니다.
필자는 그 후 옥중에도 즐겨 갇혔던 베드로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비록 ‘쿠오바디스'(나는 네가 싫어하는 십자가를 두 번 다시 지기 위해 '로마'로 간다마는 너는 어디로 가느냐)의 失手를 또 한 번 저지를 수 있었다고 해도, 그의 眞面目은 그의 '통곡'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초대교회 역사를 그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나갔고,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주님처럼 바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황송한 것이라고 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의 장엄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 변절한 베드로여. 통곡한 베드로여. 실패의 쓴잔이었기에 회한을 통한 환희의 축배를 들었고, 위대한 소명감에 재귀한 당신! 죽기까지 스승의 증인으로 살다 간 당신이여!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보낸 당신의 일생 찬연하여라. 새벽 닭, 울 때마다 당신 생각에 눈물 적시는 여기 동방의 아침 해 돋는 나라! 당신의 참회와 그 눈물, 秋風落葉이 비처럼 떨어지는 이 계절에 우리들의 가슴에도 뿌려 주소서! 하여, 주님 안목의 洞察로 “참으로 진실한 사람! 간사함이 없도다!”라는 진실을 보여 드립시다.
기독 신자들의 자기 영혼을 성찰함에는 <知性, 感性, 意志> 분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이 3가지의 總和가 부족함이 없이 完熟되었을 때,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다나엘의 경우를 분석해 본다면, <메시아께서 오시면 모든 굴레에서 해방을 받아 안녕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는 것은 나다나엘의 知性的인 면이라면, 이를 고대하면서 <무화과나무 아래서 메시아를 대망하면서 사색과 기도의 삶을 보냈다>는 意志的인 측면이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메시아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 라는 주님 칭찬의 말씀과 이에 감사와 감격한 나다나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感性的인 면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한편, <새로운 자기 영혼 성찰의 모습을 베드로에게서 範例>로 들어서 설명한 베드로의 성찰 모습은 나다나엘과는 그 순서는 다를지라도 <知情意>가 겸비하여 완숙된 면에서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고 배와 그물과 혈육까지 버린 것이라든지, 고난과 죽임을 당할 것을 주님께서 예고하자, 베드로는 주님께 항변하면서 그리 마옵소서! 라고 한 것이나, 주님께서 잡히실 때, ‘말고’의 귀를 칼로 친 것이라든지, 3번 주님을 부인한 것에 대한 오열한 것이라든지, 이 모두는 베드로의 感性的인 면이 강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한 주님과 베드로가 만나서, 주님은 네가 나를 더 <사랑>(ἀγαπάω)하느냐는 말씀에 대한 그의 답변은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니라, <좋아하다>(φιλέω)의 뜻으로, 친구 사이에서 열성적으로 사랑하는 그런 사랑 외에는 못 했다고 대답한 것은 그의 知性的인 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주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삶>인 옥중의 베드로의 모습이나 주님을 위해서 선교와 끝내 순교하는 베드로의 마지막의 삶은 意志的인 면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나다나엘이나, 베드로나 종국엔 <知情意>가 겸비한 자기 영혼의 철저한 성찰이었다고 하겠습니다.
4). 결론: 우리도 대지에 휘날리는 추풍낙엽을 밟으면서, ‘인생아 생각을 하면서 살아라.’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서, <知情意>가 겸비한 새로운 자기성찰을 하여서, 주님으로부터 나다나엘처럼 참 진실한 사람으로, 간사스러운 것이 없는 참된 주님의 종들이 다 되었으면 합니다. 소나무 밑이든, 단풍나무 아래에 있던, 골방이든, 고독히 홀로 앉아 憂國衷情의 마음과 가슴에 믿음, 소망, 사랑의 진실을 담고서 애타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로 돌이켜 봅시다.
또한 가을의 계절은 을씨년스럽고 떨어지는 낙엽에 실려 오는 가을바람이 이내 으스스 움츠리게 하고, 우리의 마음들을 꿰뚫고 상처를 내려는지 가슴 속으로부터 저미고 아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색과 마음의 交叉는 우리들의 마음을 想念의 세계로 몰고 가야 하겠습니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 인생의 限界狀況을 晩秋의 낙엽을 보면서, 순간순간마다 삶의 값진 時空에 있는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고, 새로운 저마다의 ‘自我’를 省察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고독은 쓴 것이지만, 나 홀로 존재 하는 아니라, 주님께서 같이 있는 고독은 단것임을 잊지 맙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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