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3. “나는 날마다 죽노라."

solomong 2024. 11. 2. 09:37

 

3. “나는 날마다 죽노라."

(본문: 고전15:30-34)

 

1. 서론: 사람의 한 생은 한번 죽는다는 것은 三尺童子라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 라는 말씀을 하였는데, 이는 믿음 안에서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탄생한다는 신비주의적인 표현도 아닙니다. 그는 복음전도 사역에서 내외적으로 수많은 生死의 경지를 넘나드는 고난의 길이란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선 육신을 가진 몸인지라, 내면적으로 정서 감정이 ‘욱’하고 올라오는 분노와 다툼을 억제하는 自我否定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도 인간인지라 순간순간 유혹해 오는 쾌락주의와 육신의 소욕을 단절해야하는 결단이 죽음처럼 가슴에 와 닿는 아픔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직이 詩聖 ‘괴테’의 말처럼, “죽고 다시 산다는 도리를 알기까지 너는 아무래도 처량한 나그네에 불과하다.”라는 의미의 경지를 넘고 또 넘을 때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을 것입니다. 質量의 차이는 있겠으나, 우리 기독자도 바울처럼 살아야 하겠기에 ‘날마다 죽는’ 그 本意를 살펴보기로 하십시다.

 

2. 본론(Text): ①. 부활신앙과 현실생활의 관련성 문제-지금까지 바울은 부활신앙에 관한 이론적인 면에 편중하여 강력하게 주장해 온 그는 急轉直下로 현실문제에 귀착하여, 부활을 믿는 신앙이 현실생활에 미치는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을 위한 수난(본문인 15: 30-34)을 부활신앙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②. “우리가 때마다 위협을 무릅쓰리오.”-바울이 전도여행에서 겪는 수 많은 위협도(고후4:10, 고전11:23-27) 부활이 없다면 무의하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기대가 말살된다면 노동과 위험을 무릅쓰는 미친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M. T. Cicero-

 

③. “나는 날마다 죽노라.”(καθ ἡμέραν ἀποθνᾐσκω) -바울은 먼저 자신의 내면을 향하여, 죄악이 가득한 성향을 억제하는 것으로써(롬6:6-22),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참고 받음으로써(갈2:20), 自我否定의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외면적인 견지에서, 매일 生死의 경지를 넘나드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뜻입니다. 즉, 복음 전도가 너무나도 힘겨워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이어서, ‘死刑宣告’를 받았다고 생각한 것은 부활신앙에 의지하는 믿음 때문에 생존한다는 것입니다.(고후1:8-9)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上記와 같이 내외적으로 복음 전도의 어려움을 표현한 말입니다만, 그 속 깊이 들어가서 對人關係에서,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고전15:32)라는 말씀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11:26)라는 말씀을 들을 묵상할 때, <福音>에 대한 시비(復活이 없다는 것)와 인간관계인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도, <날마다 죽는 인종의 삶>의 의미도 내포되었다고 하겠습니다.

 

④.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당시 로마 사회에는 중죄인을 형벌하는 방법의 한가지로 원형극장에서 맹수(사자, 소 등)와 결투를 시켜 만일 승리하면 석방하는 풍속을 말합니다. 이는 포악한 짐승과 같이 바울을 대항해서 싸운 반대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사람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이 난다는 사상을 가진 <에피큐리안>들이(341-270 B.C.에 살았던 희랍의 에피큐러스란 철학자의 사상적 체계인 쾌락주의) 고린도 교인들을 미혹하여 몸의 부활을 부정하고, 오늘 즐기자는 미명하에 불의에 빠지게 하고, 죄를 경시하게 하는 풍조를 일어나게 하였던 것을 말합니다.

 

3. 본론(Context):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제일 먼저 자신의 죄악 성향을 억제하고, 自我否定의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 ‘날마다 죽는다.’고백을 하였으며, 복음 전파의 생활이 매일 生死의 경지를 넘나드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뜻입니다. 복음 전도가 너무나도 힘겨워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이어서, ‘死刑宣告’를 받았다고 생각한 것은 부활신앙을 의지하는 믿음 때문에 견디어 내었다는 말입니다.(고후1:8-9)

 

환언하면, 매일 매일의 생활이 ‘終末的인 삶’이란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그의 최종의 날과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날이 오늘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그의 ‘殉敎者的인 生’을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어제도 죽고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어 날마다 죽는 것이 기독자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외적으로 복음 전도의 어려움을 표현한 말입니다만, 그 속 깊이 들어가서 對人關係에서,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고전15:32)라는 말씀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11:26)라는 말씀을 들을 묵상할 때, <福音>에 대한 시비와 인간관계인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도, <날마다 죽는 인종의 삶>이지만, <부활신앙>때문에 살았다는 의미도 포함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기독자가 고집 부릴 것은 다 부리고, 自尊心 세울 것은 다 세우고, 명예나 체면을 얻고 싶은 것은 다 얻고, 싸울 것은 다 싸우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獻身의 서열은 제일 끝에 두면서, 이래가지고 어찌 십자가의 생활이라고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기독자와의 삶에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十字架를 지는 그것이 날마다 죽는 것이 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것은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사람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이 난다는 사상을 가진 <에피큐리안>들(341-270 B.C.에 살았던 희랍의 에피큐러스란 철학자의 사상적 체계인 快樂主義)이 고린도 교인들을 미혹하여 몸의 부활을 부정하고, 오늘 즐기자는 미명하에 불의에 빠지게 하고, 죄를 경시하게 하는 풍조를 일어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생활이나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분노와 돈과 명예 그리고 이성 간의 사랑 등의 탐심, 시기심과 옳고 그름에 대한 是非,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享樂主義 등등이 매일같이 엄습해 오는 유혹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 깨끗하고 정결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 역시 “나는 날마다 죽노라.”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바울은 복음을 위한 수난을 부활신앙과 관련시켜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의 삶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야기되는 죄악의 성향을 억제하면서 自我否定의 생활인 날마다 죽는 인종의 삶을 산다고 했습니다. 복음전파의 과정에서 挑戰해 오는 적대세력들을 상대하지 않고, 매일 매일의 생활이 ‘終末的인 삶’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하루하루가 그의 최종의 날과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날이 오늘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그의 ‘殉敎者的인 生’을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당시 ‘에피큐리안’ 학파의 快樂主義 사상에 물든 사회와 교회의 풍조에 초연하게 살았습니다.

 

오늘의 기독자인 우리들도 교회생활이나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삶속에서 부활신앙에 의지하는 믿음이 만난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고 정서 감정을 잘 통제하면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향락주의 유혹에 승리하는 삶으로서, “날마다 죽는 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깨끗하고 정결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 역시 “나는 날마다 죽노라.”해야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