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I must also see Rome.)
(본문: 행19:21-22, 롬1:10-15)
1. 서론: 공자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십오지우학 十五志于學), 30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立年), 40세에는 미혹됨이 없었고(不惑),50세에는 하늘의 명을 알았으며(知天命),60세에는 귀가 순하여 남의 말을 듣기만 하여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耳順). 논어 '위정편'에 공자가 70이 되니, '뜻 하는 대로 행해도 도리(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踰=넘을 유,矩(법 구)입니다.
공자가 현대 한국에 살았다면, 65세를 일컫는 말을 하나 추가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지공’(地空)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즉 ’지하철 공짜(무임승차)’라는 뜻입니다. 하여간, 이 세상에서는 건(健). 처(妻). 재(財). 사(事). 우(友).=신오복(新五福)이라고 합니다. 몸이 건강하고, 석양 길에 두 부부 같이 사는 것, 은퇴 이후에도 돈 걱정 없는 것, 노년기에도 자기 할 일이 있는 것, 진정한 말 친구가 있는 것들이 현대 5복이라고 합니다. 건(健), 처(妻), 재(財)가 없는 사도 바울의 웅대한 뜻을 살펴봄으로써 인생 말년을 어떻게 有終의 美로 살 것인지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2. 본론-Text: ①.“로마도 보아야 하리라.”-⑴. 미래의 여정-2년 3개월간의 에베소의 전도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바울은 새로운 전도지를 전망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역경에 굴하거나, 순경에 태만하지도 않았으며, 성취된 공적을 회고하면서 여유작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최후까지 전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⑵. 로마행은 바울의 오랜 숙원이었습니다.(롬1:10-15) 이 계획은 성공적인 에베소 전도를 마감하면서 발표되었으나, 이 소원은 오래 전부터 그이 마음속에 움터 있었습니다. 다시 세계의 대수도인 Rome는 누구나 가보기를 원했었습니다. 정치가는 권력을 위해서, 군인은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서, 상인은 蓄財하기 위해서, 노예들은 피신하기 위해서 로마행을 선호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로마를 보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예루살렘-유대-사마리아-땅 끝까지(1:8) 복음의 波長처럼 번져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의 웅대한 시야-로마행에 만족치 않고, 서반아(스페인)까지 가려는 雄志를 품었던 것입니다.(롬15:23)
3. 본론-Context: 바울은 소아시아 특히 에베소전도가(2년3개월간) 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시점이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바울의 은퇴기(隱退期)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말씀 세 곳에 전도를 위한 로마방문계획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비록 죄수의 몸이 될지라도,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그의 소망의 일단을 펴 보인 것이고, 두 번째 말씀은 주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함으로, 안위를 받고 또 이런 선교에 대한 꿈은 바울의 부채감에서 나온 열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은 로마뿐만이 아니고, 서바나(스페인)까지도 복음전도에 대한 열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웅지(雄志)가 큰 포부이었습니까.
우리는 바울의 일생을 돌이켜 보건데, 그는 역경에 굴할 줄도 몰랐고, 순경에 태만치 않았고, 성취된 공적을 되돌아보는 법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최후순간까지 전진 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부터 사슬에 메인 몸이 되었고, 죄수의 몸으로 기어코 로마행을 강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와 유대인의 배은망덕한 것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허지만, 이와 같이 로마행은 바울의 숙원이었습니다.(롬 1:10-15, 15: 22-29) 당시 세계의 대 수도로마행은, 누구나 꿈꾸는 곳이었습니다.
정치가는 권력을 잡기 위해, 군인은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서, 상인(商人)은 축재하기 위해서, 하물며 노예들은 피신하기 위해서 로마행을 희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유대-사마리아-땅 끝까지가 복음 전도의 종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롬 15:23에 서반아(스페인)까지 목적지를 두고, 로마는 단지 경유하는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노사도(老使徒) 바울의 웅대한 시야와 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솔체니친 『암병동(癌病棟)』이란 책에 나오는 브랙 유우머를 보면, 인간이 신에게 받은 수명은 25年이고, 그 다음 말(馬)에게서 25年을 얻었고, 그 다음 개(犬)에게 25年, 그 다음 원숭이에게서 25年을 얻어,100살까지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개 인간은 85세가 수명의 벽이 되며, 선진국(先進國)에서도 천 명 중(千 名 中) 5명만이 85세까지 살 수 있으며, 5명 중 여자가 4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솔제니친의 말과 같이, 인생 70대는 개의 나이를 살고 있으므로 사랑하는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고 그간 고생했으니, 개 팔자처럼 쉬면서 잠이나 자고, 그것도 지겨우면 여행이나 하면서 맛 좋은 음식이나 사서 막으면서 사는 것이, 요사이 퇴직한 사람들의 희망사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심사는 끝없는 꿈의 화신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우리 은퇴 목사님들도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는 저마다의 웅대한 시야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일본의 여류소설가 소노 아야꼬(曾野綾子.76)의 계노록(戒老錄)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하지 말라. 젊음을 시기하지 말고 젊은 사람을 대접하라. 젊은 세대는 나보다 바쁘다는 것을 명심하라. 손자들에게 무시당해도 너무 섭섭해 하지 말라. 새로운 기계 사용법을 적극 익혀라. 체력, 기력이 있다고 다른 노인들에게 뽐내지 마라. 목욕을 자주하고, 깨끗하고 산뜻한 옷을 입어라.” 등등의 경계의 어록이 있습니다.
또한 “며칠 못 살고 죽는 하루살이가 있는가 하면, 모하비 사막의 떡갈나무 덤불처럼 1만 년 이상 사는 생물도 있다. 그나마 사람은 포유류 중에서 가장 오래 사는 종이니, 나이 들면, 선선히 ‘마음을 비우며 ’대비’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하면서, 이런 구절도 나오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인생을 보냈으므로 언제든 죽어도 괜찮다고 늘 심리적인 결재(決裁)를 해두어라.” 이는 언제, 어디서든지 죽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주의 종들은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삶에 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황혼기를 어떻게 살까?(How to live in old age) 이 시기에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첫째로, 고독(孤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이며, 둘째로, 병고나 죽음에 대한 불안(不安)이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타 어려움도 있겠지만 이 두 가지가 가장 힘든 노년기의 적(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은 고독한 실존입니다. 나 홀로 고뇌해야 하고, 아파해야 하고, 고독히 죽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며,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입니다.
현대 실존주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폴 틸릭(Paul Tillich)은 고독을 2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외로움(Loneliness)과 홀로움(Solitude)이 그것입니다. 외로움은 나의 아내도, 자식도, 친척이나 친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나만의 것입니다. 외로움이란 용어는 ‘외롭다’에서 ‘움“자를 붙이므로 명사화 되었듯이, ‘홀로 있다.”란 동사에서 ‘움’을 넣어서 역시 명사화한 것이 홀로움(Solitude)입니다. 폴 틸릭은 그 ‘외로움’을 긍정하고, 외로움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 외로움을 사랑하는 것이 ‘홀로움’(Solitude)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 때, 사탄의 시험을 받으셔서 광야의 외로운 투쟁을 긍정하고 사랑하시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신 것이나, 많은 군중이 뒤 따르며, 임금이 되시라고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홀로 산에 가셔서 기도하신 것을 대표적으로 <외로움>을 <홀로움>으로 바꾸어 외로움을 극복한 예(例)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도 혼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어떤 일에 빠져 들어 감으로써 그 고독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의 깊이를 통찰(洞察)한다든지, 음악 감상에, 한 폭의 그림이나, 한편의 시(詩) 감상에, 자기를 투신시키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해 보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의 찬연한 빛을 남긴 사람들은 예외 없이 고독히 혼자 과학연구실이나, 고독히 명상하면서 <홀로움>을 사랑한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우리들도 저마다의 일에 매진함으로써 외로움을 극복하기를 바랍니다. 둘째의 병고나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비엔나의 정신과 의사요, 비엔나 대학의 교수였던 빅톨 프랭클(Victor Frankl)은 히틀러 유대인 학살 때, 아우츠빗츠 유대인 집단수용소에서 3년 동안 고생한 이야기를 그의 저서, (또는 From Death Camp To Existentialism)에서 술회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처자가 가스실로(죽으러 들어가는 때) 들어갈 때, 오히려 마음이 <평온>하더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최악을 받아들일 각오로 모든 것을 “포기”(Give up)하고, 자기 자세(Attitude)를 변경할 때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최악을 생각하면 더 잃을 것은 없어도, 얻을 것은 있다는 의미입니다. 최악을 수용(Acceptance)하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소노 아야꼬(曾野綾子)가 충고한 <마음의 결재>의 뜻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늙는 것이 서럽다, 병고에 시달릴까 걱정이다.”가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보고도 아름답게 못 느끼고, 인간이나 사물에 대한 그리움이란 정서가 살아진 것에 더 서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산(西山) 황혼일수록 더 짙게, 더 붉게 물드는 것처럼, 인생을 더 진하게 더 붉게 살겠다는 의지와 꿈이 사라진 것을 오히려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4. 결론: 이제 우리도 바울처럼 저마다의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란 시야(視野)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꺼질 줄 모르는 활 타오르는 소망, 이상, 꿈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과거는 단지 회상(Remembrance)으로만 존재케 하고, 미래는 소망(Hope)으로써, 현재에 벌써 소유한 것처럼 사는 마음입니다. 신앙의 삶은, 진정한 교회생활은 천국의 그림자로써의 삶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오직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고, 면류관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로마행을 그렇게 갈망했기에 만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저마다의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란 꿈이 있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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