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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릴리에서 만나자!”(I will see you in Galilee.)
(본문: 마 26:31~35, 28:10, 막 14:27-31)
1). 서론: 2016년 개최지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제31회 세계 올림픽의 폐회식 때, 五輪旗를 2020년 개최지엔 일본 동경 市長에게 이양하고, 전광판에는 “동경에서 만납시다."(See you in Tokyo.)라는 글씨를 썼습니다. 이것은 ‘평화와 우정 및 운동 정신’을 새롭게 다지기 위해서 來會 開催地 장소에서 만나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서로 겨누어 보자!>는 의미입니다.
흔히 영화나 Drama 場面에서, 결혼 한지가 오랜 세월이 흘러 부부간 사랑이 시들할 때, 新婚 旅行地를 다시 찾아가서, 거기서 추억을 회상하면서 새롭게 첫사랑을 확인하고, 새 출발 하는 의미로 사랑이 가득 찬 對話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는 原點으로 다시 돌아가서 진실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가 부여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간 교회의 무사 안일한 선교와 하나님의 축복과 성공에만 급급해 왔던 자화상들이었고, 지금 韓半島의 불안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시달리는 현실을 깨끗이 청산하고, 2017년 가을! 사색의 계절에 즈음하여, 마음과 몸을 다듬어서 새 출발 하자는 뜻으로, 일직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라는 본문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마태복음 26장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1. 예수님을 잡아 죽일 모의가 있었고, 2. 주님께서는 ‘베다니 Simon’의 집에 계실 때, 주님께 한 女人이 매우 귀한 향유 한 玉盒을 깨트리어,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리고, 3.‘가롯, 유다’는 스승을 背信할 機會를 엿보고, 4. 주님께서는 ‘유월절 절기’를 맞이하여 제자들과 함께 ‘최후 석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수사도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향한 사랑과 믿음이 식어서, 否認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5. 최후 만찬 후에, 감람산 가는 길목에서, 제자들에게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라고 하셨습니다.6. 그리고서는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는 처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7.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 死刑 宣告를 받으시고, 골고다 石壁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3일 후에 부활하셨을 때, 무덤 근처를 서성거리는 ‘막달라 마리아’ 등에게 “내가 이미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하지 않았더냐?”(마 27장과 28장, 막 16:7, 눅 24:6)라고 말씀을 하셨던 갓입니다. ⑧. 요 21장엔 부활한 주님과 더불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이 감격스러운 再會 相逢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베드로에게는 새로운 사명을 맡기신 장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만나자!”라고 하신 말씀은 상황과 장소에 따라서 아래와 같이 구분해 볼 수가 있습니다. ①. 마 26: 32, 막 14:27-28 - 주님 수난의 예고 전에 하신 말씀으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I will go to Galilee ahead of you.)라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흩어진 양 떼는 부활에서 다시 모일 곳이 갈릴리라는 뜻입니다. 부활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로 인도하겠다.’라는 것은 갈릴리는 주님의 공적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에, 제자들의 옛 고향 땅에서 부활 후에 현현하시어 그간 이미 보이신 교훈과 행적을 부활의 빛 하에서 재검토하겠다는 뜻입니다.
②.마 28:7-10, 막 16:7, 눅 24:6 -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인(막달라 마리아 등등)들에게 부활하신 사실을 제자들에게 傳言하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가 되신 주님은 다시 살아나 흩어진 양 떼를 재집결 시킬 곳이 제자들의 고향! 남방 출신 유다는 배신하고 남은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이기에 추억도 새로운 고향 땅 갈릴리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③. 요 21:1-25,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소명하신 이후, 이제 再會의 갈릴리에서 그간 스승을 좋아 만(Like, φιλέω )했던 제자들이 일신의 어려운 상황에서는 스승을 부인하기까지 한 나약했던 제자들에게 부활한 주님을 사랑(Love, αγαπάω)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위대한 사명을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사실 갈릴리는 예수님과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난 곳이지요. 이를테면 갈릴리 해변은 청춘남녀로 말하면, 첫 Date 장소요, 스승이 제자를 Calling한 곳이요, 서로 간에 상봉 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4: 18. 이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첫 출발이 심복 제자를 선택한 곳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부들로서 하루하루 갈릴리 호수 가에서 고기잡이로 호구지책을 해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일개 어부에서 구속 역사의 의미에서는 위대한 Messiah의 제자로 승진한 감격스러운 곳이기도 합니다. Rome 植民地 治下에서, 그것도 갈릴리는 시골 漁村, 하루하루의 糊口之策으로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유대 下層 에 속하는 백성들이 사는 그곳에서, 스승 되신 예수님께서 不學無識한 漁夫들을 제자로 소명하신,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에 너무나 감읍(感泣)해서, 지금까지 生計의 道具였던 배도, 人倫의 血緣關係에 있는 父親도 버리고, 스승인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이 첫 만남, 첫 愛情, 첫 召命 地인 갈릴리 海邊에서의 만남(相逢)은 저들 생애에서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인생살이는 외로운 한 인간이 ‘너’라는 당신을 연속적으로 만나다가 끝을 맺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남에는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내 계획의 한 부분으로 만남'입니다. (Meet=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皮相的으로(겉으로) 만남이요, 서로 간 필요해서 이용하는 關係뿐입니다. 2). ‘예측하지 않는, 내 계획 속에 있지 않은 상봉'(Encounter)입니다. 이 만남으로 내 계획의 스케줄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그러한 사건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릴리에서의 相逢은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만남(Encounter)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지난 3년 세월! 스승의 크신 능력과 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성공의 길’이 훤히 트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족의 恨인 ‘로마’식민지에서도 해방을 받아 자주 국가 건설 후, 예수님께서 지상의 왕으로 등극하면, 좌정승· 우정승 벼슬자리에 아롱진 꿈에 부푼 자들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막 10:35-45)
그들은 부와 권력 및 명예가 한 몫으로 따라오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 수련 3년 말기에 스승의 이념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 올라가면, 잡히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한 제자는 배신할 것이고, 너희는 전부 나를 부인하고 다시 고기 낚으려고 갈릴리로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곤, 그러나 부활 후에는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자.”라고 주님은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연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말씀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이 어렵다는 반응을 했고, 특히 예수 제자 공동체에서 돈주머니를 맡은 ‘가롯,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남쪽 유다 지방 출신으로 북쪽 갈릴리 출신들로부터 늘 소외감을 느껴서, 탈출할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Palestine은 3.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南方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방인데, 정치적 지역이요, 北方은 갈릴리 지방인데, 비옥한 농토와 갈릴리 바다 주변의 사람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순수한 서민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중부지방은 Samaritan 지방인데, 이방인이 사는 곳이며 혼혈 민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유대인들은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롯, 유다가 회계를 맡은 것을 보면, 제자 ‘그룹’ 중에서 성실성을 예수님과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타 제자보다 남방지역 출신이기에 정치적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민족주의자이었고, 로마 속박에서 해방을 간절히 희망했던 제자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 말기에, 선생님의 사상은 자기 이상과 현격한 차이가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나라는 여기 있지 않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라는 이런 종류의 말씀들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문제들이었고, 끝내 Ideology의 갈등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스승을 은 30량에 판 근원적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소명감이 해이 해지고, 처음 갈릴리에서 만났던 사랑과 애정이 사라지고 소명감도 그 방향과 방법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신 주님은 다시 그 첫 만남의 갈릴리호반! 추억도 새로운 그곳을 그들의 가슴에 재연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유언처럼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 21:1. 이하에는 부활 후, 위대한 사명을 다시 일깨워 준 再會의 갈릴리 그 바닷가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고기를 많이 잡았느냐. 밤이 새도록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 너희들의 소원이 고기 많이 잡는 것이 희망 사항이었지! 그래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져라.”라는 대화 후에, 제자들은 순종하고 던졌더니 153마리나 낚아서, 그물을 들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잡았다고 했습니다. 일단 육체의 포식을 원한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옛날처럼 능력자인 것을 확인시켜 줄 필요도 있었고, 그렇게 소원인 ‘고기를 싫어하도록 먹어 보아라.’라는 뜻도 내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αγαπάω=Love)고 물으실 때, 베드로 답변은 “주님이 잘 아십니다.”라고 했으며, 주님은 “내 양을 치라.”(먹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두 번째도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아가파오=αγαπάω) 마지막 세 번째의 질문에 베드로의 답변은 'φιλέω'=Like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네가 가야바 뜰에서 3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느냐를, 회상시켜 주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정말 열정적으로 네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 意中의 말씀에 대해서, 베드로는 실패의 쓴잔을 마신 부끄러움에 'φιλέω'=Like라는 답변밖에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새로운 옛날 그 처음 만났던 갈릴리에서 위대한 사명을 다시 부여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희생적인 아가파오(αγαπάω)의 사랑의 삶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미국 N. Y. 빈민촌 주정꾼과 창녀들을 상대했던 전도자, Sammuel Hadly목사는 독실한 Christian 가정의 신앙교육을 받았으나, 어머니 별세 후에 어찌하다가 잘못된 길을 걸어서 타락했습니다. 1882.4, 18. 44세 때, 回心 했던 곳은 어느 경찰서 감방에서 4일간 금식기도를 하는 중에 회개(과거청산)를 철저히 하고, 그는 빈민굴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20년간 복음을 전하면서, 매년 4. 18.이면 옛날 경찰서 감방살이했던 그곳으로 들어가서 한밤을 지새우며 자신을 성찰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처음 은혜받던 그때, 그곳! 처음 사랑으로! 처음 신앙이 사라질 질 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가, 거기서 더 성숙 된 새 출발을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重生하던 그때, 은혜받던 그 순간, 옛날 감격스럽던 교회 생활을 회상하면서 그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사명을 재확인했으면 합니다. 그때 순수한 복음 선교에 대한 열망! 형제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옛정으로 돌아가라는 교훈을! 지금 저마다 한국의 “갈릴리에서 만나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새롭게 다시 출발 해 보잔 말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교회의 권력화(양적인 팽창), 質的으로는 교회 성장의 정지 내지 감소 경향, 교회 세습, 신앙공동체의 무질서, 신학의 빈곤 등 어느 것 하나 자유롭지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이 민족 앞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현재 가는 길을 잠깐 멈추고, <가는 길이 복음에 바람직한 길인가, 보편적 상식이 통하는 결단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가 급성장해서 양적으로 전 국민의 1/5에 육박할 정도인데도, 우리 사회의 따가운 눈초리를 가지고 보는 이유가 어느 곳에 있단 말인가를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불신 사회가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질적으로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가 아닌가! "육의 포식은 언제나 영혼의 고갈을 가져오는 법"이니 하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차근차근 찾아보잔 말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해서, 누가, 왜, 그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서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잔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교회, 학교, 병원을 세워서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여명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신학문을 가르치고, 가난하여 병으로 고통 하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덜게 해 주는 것으로, 기미 3.1. 독립운동의 33인 중에 16. 명의 교계지도자들이 참여하여 민족애에 불타는 모습을 보여 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 선교사들이 본국의 선교보고서에, 한국에서 애국하는 자는 ‘Christian’이라고 했다는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도 있었던 것입니다. 조국의 현 실정은 지극히 불안하고 위태로운 정황이기에, 이를테면 한국의 “갈릴리에서 만나자.”라는 것입니다. 실패를 뼈저리게 회개하고 새로운 거룩한 사명을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자기 영광, 성공, 축복의 기독교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고난과 우리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는 의미로 사랑이 가득 찬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분 문 말씀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갈릴리 原點으로 다시 돌아가서 진실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도 다 같이 동고동락하는 교회, 기독 신자, 십자가의 기독교를 이 민족 앞에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조국의 위태로운 상황에서 저마다 자신의 죄 성 깊은 모습을 규명해서 뉘우쳐야 하겠습니다. 다시 이 나라 백성들이 우리 교회를 우러러보고, 기독 신자의 절제와 겸손과 이웃 사랑을 보고, 주님을 우러러 사모할 수 있도록, 그 “갈릴리에서 만나자”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 원점에서 새 출발을 해야 하겠습니다.
계 2:1-5.에서,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교회의 존재의의)를 그 자라에서 옮기리라.”라는 경고의 말씀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실패 없이 승승장구하는 것보다, 실패의 쓴잔을 마신 아픔에서 재귀할 수 있다는 것이 더 귀한 것이며, 주님의 사랑을 더욱 받을 대상이 된다고 사료 됩니다. 베드로에게 재귀의 기회를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찬연하고 새로운 교회 역사의 맥을 계승했으면 합니다. 끝.
2024년 10월 30일
山下연구원: 원장 양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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