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문 두드리는 소리
(본문: 계 3:14-22)
1). 서론: 영국 런던의 성 바울 대성당 안에 화가 홀만 헌트가 그린 '세상의 빛'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성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헌트가 1851년 처음으로 그려서 옥스퍼드대학에 기증했고, 그가 말년에 다시 그려서 성 바울 대성당에 바친 것입니다. 그림의 내용은 여러분도 흔히 보아온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예수께서 한 손에 등불을 드시고, 굳게 닫힌 어느 집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그림입니다.
그런지가 100년이 훨씬 넘은 오래된 그림입니다만, 방금 그린 것처럼 생생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그림이 가리키는 내용은 영원히 우리들의 마음에 생생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금도 우리 집 대문에서, 혹은 교회 문 앞에서 서서, 우리 마음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여 우리들의 마음에 모시고 항상 더불어 같이 살도록 해야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라오디게아 교회-7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는 밖으로 핍박을 받지 않았고, 안으로도 이단이나 부도덕 같은 폐단이 없는 교회이었습니다. 교회는 부유했고,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바람 없는 잔잔한 교회이기에, 그들의 신앙은 미지근하여 무기력하였습니다. 이를테면 현대교회의 그림자라고 하겠습니다. 외적 조건들이 평온하고 창성할 때, 내면적 신앙은 이렇게 쇠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여간 현대교회들이(현대 성도들이) 심심히 반성할 하나의 거울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②. 미지근한 신앙 -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4:15) ‘미지근한’(χλιαρός) 상태라는 것입니다. 차다는 것은 세속에 물들어 적극적으로 신앙을 반대하는 것이고, 덥다(ζεστός)는 것은 ‘뜨겁다’로 번역되는 것으로, ‘끓는(ζέω)다는 것, 즉 신앙을 위한 끓는 열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핍박이나 이단사상이 일어날 때, 교회는 뜨거운 편과 찬 편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평온무사 안일주의에 빠져서, 자기만족에 잠겨 차지도 뜨겁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중간 영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끓을 것을 요구하거나 (신앙적인 열성), 아니면 차라리 찬 것을(무관심) 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극과 극은 일단 유사시에는 통하여 찬 것은 더운 것으로 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를 박해자 사울에게서, 일편단심 신앙의 바울로 전향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을 뜨겁거나 차게 해서 마십니다. 미지근한 물은 입에서 토함을 받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혐오하고 버리시는 대상이 신앙이 미지근한 대상자란 것입니다.
③. 문밖에 서서(ἔστηκα) 두드리노니(κρούω) - ‘문밖에 서서’라는 현재 완료형, ‘두드리노니’라는 현재형입니다. 주님께서 서서 계심은 장기간 준비하여 완료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문 두드리심의 역사는 현재이요 계속적입니다. 이 은혜로운 말씀들은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벧전 3:20) 그리스도의 인내성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성만이 아니라, 회개시키고자 ‘두드리시는’ 그 사랑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문이신(요 10:7) 주님 앞에서 우리가 서서 있어야 하겠고, 또 두드리라 명하셨으나(마 7:7, 눅 11:9), 오히려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전도되어 주님께서 우리 문 앞에 서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문 앞에 서서 계신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것을 가리키며, 동시에 이는 현재의 교훈으로 응용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식어서 무관심 상태에 빠져가는 자들에게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는 교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④.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신임과 사랑이 찬 영교를 가리킵니다. 향연은 천국을(마8:11, 눅 22:30), 혹은 재림 때 있을 혼인 잔치(마 25:1, 계 19:7-9)를 표시합니다. 하여간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깊은 영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가 즐기고, 서로가 필요로 하는 교환입니다. 본문의 그리스도 동작의 첫째는 ‘문밖에 서서’, 2번째는 ‘두드리노니’입니다.
우리 동작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열면, 쌍방의 공통적 동작인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먹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작의 時制를 살펴보면, ‘문밖에 서서’라는 현재 완료형이며, ‘두드리노니’라는 현재진행형이며, ‘내 음성을 듣고 열면’은 부정 과거 가정법이며, ‘쌍방의 공통 동작’은 미래형입니다. 위 동작의 현재 완료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준비는 우리가 인식하기 이전의 과거 어느 때에 시작하여 계속되었고, 이제는 완료된 것입니다.
현재진행형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모양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요, 계속적입니다. 부정 과거 가정법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조건, 즉 우리의 동작은 한번 결정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형은 주님과 우리와의 진정한 교환은 아직도 미래사에 속하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수많은 주석자가 라오디게아 교회는 현대교회의 실상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특히 현대 교인들에게 절실한 교훈입니다.
3장 20절을 좀 더 상세히 살피면, 동작을 표시하는 동사들이 "내가 서서", "두드리노니" 등 주님의 동작과 우리의 동작인 "듣고", "열면", 그리고 쌍방의 공동동작인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는 동작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동사들의 시제(時制)가 각양각색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서서”라는 현재 완료형, "두드리노니”라는 현재진행형, "듣고 열면"은 부정 과거형, "먹으리라”라는 미래형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동작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우리 마음 문 앞에 "서서" 계십니다. 이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현재 완료형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현재까지 계속된 동작을 말하는 동시에, 현재 그 동작이 완료된 것을 표시합니다. 그것은 우연한 사건도 아니며, 돌발적인 사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속적 동작이었으며, 현재는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천지창조 이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5절은 "창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던 영광으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천지창조 이전에 성부와 성자가 거룩한 영광 가운데 같이 계신 것을 가리킵니다. 신학자들은 이 기간에 성 삼위 간에 장차 창조 이후 인간의 타락할 것을 예견하시고 그들을 구속하기 위해 미리 '속죄의 언약'(The Covenant of Redemption)을 맺으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크게는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좁게는 우리 개인 구원을 위해, 영원하신 경륜 중에서 준비하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처럼, 새 학기 시작 전 강의 준비를 하면서, 어떤 학생이 입학해 올 것인가 기대하면서 사제 간의 관계 설정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굳게 닫힌 문 앞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준비를 완료하시고 우리 앞에 계십니다.
다음의 동사는 "두드리노니"라는 낱말입니다. 이 낱말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헬라어의 현재진행형은 오히려 진행 상태를 뜻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동작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는 완료된 준비를 하여서 현재의 생생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박두해 오십니다.
성서의 모든 사건이며 예언을 한갓 옛날 일로 돌린다면, 성서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 현재의 음성으로 들릴 때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아! 이것은 옛날의 사건이지'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현재 읽는 성경 말씀은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다이얼(Dial)을 정확하게 맞추면, 지금 성경을 읽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마치 CBS나 KBS의 뉴스나 라디오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정확히 다이얼을 맞추는 것처럼 말입니다. 전파는 우리 주변에 언제든지 와 있습니다. 이것처럼 주님은 벌써 오시어, 서서 노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노크' 소리를 듣고 안에서 진정으로 문을 열어야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있다"(I am knocking your door)는 것은 지금 우리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크' 소리를 듣고 우리가 문 열리기를 기다리고 서 계시는 주님입니다. (I am standing!)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는 꿈을 꾼 후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현재 살아 계셔서 나를 직면(Confrontation)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對坐) 신앙이 머리에 남는 기억에 머무는 사고에 속하는 철학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이념이 아닙니다.
다음의 우리 쪽의 동작입니다. 내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입니다. 이것은 부정 과거형 가정법으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하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오래 잠긴 문이지만, 한번 열리면 영원히 열리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부정 과거형으로 표시되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속죄는 단번으로 영원히 인류를 대속하신 속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번에 결정적으로 믿는 동작입니다.
우리의 원죄에 대한 사죄는 영원히 사죄를 받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등지고 살던 인간이 그 방향을 전향한 그 마음과 행위는 영원히 회심하는 동작을 말합니다. 우리가 단번에 예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 번'으로, 그러나 영원히 여는 일입니다. '단번에 결정적으로' 한다는 것은 곧 우리들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결단부터 시작됩니다.
엘리야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중간에서 주저하는 이스라엘의 군중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란 것은 현재 아직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문을 열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도 물론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과거나 현재 우리가 그를 문밖에 세워두고 문을 열지 못한 일을 책망하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즉 미래에 열기를 재촉하시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현재에도 자신(自信)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잘하기를 결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헌트의 그림도 그렇지만, 이 문은 밖에서는 열 수 없는 문입니다. 단지 안에서 열어야 열리는 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문 열기를 강요나 강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심에서 자발적으로, 진정으로 문 열기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문이 열린 적이 없어서 거미줄이 드리워 있습니다. 문짝이 녹 쓸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 문 말입니다. 주님께서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 할 소냐.” 하시면서 지금도 노크하고 계십니다. 모셔 드셔서 좌정케 해야 하겠습니다. 더는 주님을 문밖에 서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끝으로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상호 연쇄 동작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신비로운 상호 공급, 상호 생존의 원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먹고, 예수는 우리와 더불어 잡수시는 것입니다. 절친한 친구 사이의 교제는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부부지간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 22장 3~4절에 천국의 호화찬란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령 황금길, 진주 문, 유리 바다, 그리고 12가지 극상의 보석들 등이 언급됩니다. 독재자였던 이라크 후세인이 자신의 궁 화장실 수도꼭지를 황금으로, 복도를 유리로 만들었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만, 아무리 그 궁궐이 호화로워도 결국엔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정신적 사랑과 평안, 기쁨과 평화가 기본적으로 영원한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장 3절), "… 하나님과 그의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계 22장 3~4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가정 행복의 기본 요건은 부부간, 부자간, 형제간 우애의 친밀한 교제에 있습니다. 모든 물질은 이런 기본 요건을 돕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의 요건도 하나님과 인간, 인간 상호 간의 성스러운 교제일 것입니다. 천국의 그림자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교회 생활이 천국 같은 맛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중의 천국의 삶도 그러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의 교회 생활은 장차 천국의 생활을 위한 예행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지금은 잠정적으로 예행 연습이 원만치 못하지만)
로마의 콘스탄틴 대왕이 로마통일 전쟁 때,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십자가 형태를 보고 용기백배하여 승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새로운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대상'을 발견함에 있습니다. 바로 현재, 여기에, 우리가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의 문밖에 서 계시며,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는 우리에게로 들어와 우리와 더불어 먹을 것입니다. 지금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마음의 문을 열어서 주님을 영접해 모십시다. 주님은 억지와 강압으로 노크하시지 않고, 사랑의 호소로 하시는 것입니다.
4). 결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삶의 목적과 행동이 복잡하여 주님의 '노크'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화인(火印) 맞은 양심 때문에,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여 세상일에도, 하늘나라의 일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지, 아침저녁으로 차디찬 겨울바람이 불 때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들의 흐리고 무딘 마음의 문을 깨끗이 청결해야겠습니다. 칼바람을 맞으면서 서 계시는 우리 주님의 인종적인 사랑을 눈물겹게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지금 속삭이는 음성과 우리의 마음 문을 열라고 간절히 '노크'하는 그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우리 교회에 모시고, 주님과 더불어 거룩한 교제가 일어나고, 형제들과 더불어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주님께서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것’은 時制로 현재진행형이라고 한 것은 지금 이때에도 우리들의 마음 문을 노크하고 계시는 주님인 것을 명심하면서, 마음 문을 열고 열성과 지극정성으로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끝
'04. 신약설교마당(13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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