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14. 스데반의 순교

solomong 2024. 11. 25. 15:58

14. 스데반의 순교

(본문: 행 6:5, 8-15, 7:1-60)

 

1). 서론: 순교자의 피가 흐른 곳에는 복음의 꽃이 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장엄한 순교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세계교회로 뻗어나가게 되었으며, 사울을 바울로 회심시킨 간접적 촉진제가 되었다고도 하겠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바로 이 순교자의 피 가운데서 자라난 그간의 역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모두 일시에 순교자가 되는 것보다, 어쩌면 우리의 일생을 순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순교는 고사하고, 주님을 위한 고난의 삶도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당하는 고난은 참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풍지대에 살기에, 주님을 위한 신앙의 지조를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만, 엄격하게 순간순간을 살펴보면, 신앙의 지조를 버리고 너무나 쉽게 살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스데반 순교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옷깃을 여미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6:5- “스데반”- ‘면류관’이란 뜻이며,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7 집사의 首長이었으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②. 6:8-15-스데반의 활동과 투옥-초대교회 내분의 원인은 교회가 발전되고 교인 수가 많아짐으로 공산 체제의 구제를 위한 헌금과 물질에 대한 원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조직적으로 사방으로 확장하고, 유무상통의 생활이 하나님 말씀을 전도하는 것보다도 우선시함으로, 결국 공산 체제를 폐지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함과 지혜로운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의 대상이 되어서 집사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집사로서의 구제와 봉사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빌립과 더불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의 역할도 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잡히어 투옥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⑴.성전(회당-바벨론 포로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이 나그네 된 땅에서 세운 분산된 성전을 말함. ) 유대인들은 성전에서만 제사를 올리고, 예배드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⑵.율법-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에 대한 스데반 생각은 세계적인 교회를 전망하면서, 성전은 없어져야 하고, 율법은 복음으로 가는 한 段階에 불과하다고 主張하면서, 기독교는 세계를 향해서 진출해야 한다고 主唱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인의 소유가 아니라, 온 세상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임을 그가 처음으로 간파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로 스데반은 2가지 문제, 곧 유대 민족주의(모세를 모독했다는 것)와 전통주의(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함.)에 逢着하게 되어 투옥되었습니다.

 

③. 7:1-53-스데반의 변증론적인 설교-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진술한 스데반의 변증이요, 설교입니다. 변증의 요지는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상론하면서, 거기서 그리스도를 입증하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의 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⑴.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해설(이삭, 야곱, 요셉 등 족장들의 역사, 7:1-15), ⑵. 모세 율법의 해설과 그의 역사를 피력(7:17-43), ⑶. 결론으로, 다윗, 솔로몬의 역사와 성전을 거론하면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형식주의에 빠져 메시아를 죽인 유대인의 죄를 공격한 것입니다. (7:44-53)

 

④. 7:54-60-스데반의 순교-스데반의 순수하고 정연한 논리적인 변증의 설교는 오히려 유대인의 마음을 激動시켰습니다. 유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처음부터 미움에 불타서 스데반의 변증의 내용을 진지하게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를 성 밖으로 내쳐서 죽였습니다. 모독죄는 돌로 쳐 죽이는 모세 율법에 따른 것이고(신 13:6), 법정이 재판이 아니라, 私刑이었던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나 집행의 권리가 없었기에, 격분한 폭도들의 만행은 결국 돌로 쳐 죽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순교의 장면은 ⑴. 하늘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을 환영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⑵. 스데반은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눅 23:34), 그도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의 사유를 빌었습니다. ⑶. 스데반은 평화 속에 잠들었습니다. 옳은 일이 비록 죽음으로 몰리게 되었으나, 옳은 일을 감행한 이에게 임하는 평화로운 임종이 스데반에게 임했습니다.

 

⑤. 스데반 순교의 파장(행8:8:1-40, 22:20) -⑴. 사마리아의 전도-스데반 순교로 예루살렘교회의 전도는 일단락이 되고, 복음은 제2. 지대인 사마리아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예루살렘교회가 그대로 번영하고 유대인이 거족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와 유대의 그리스도교가 되었던들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계적 구원은 성취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⑵. 사울(바울) 회심의 촉진제(행 7:58, 8:1, 22:20)-사울은 스데반의 순교 때에, 선두에 서지는 않았으나, 스데반 순교를 옳게 생각했고, 따라서 그 죄에 동참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또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스데반을 낭떠러지에 세우고, 증인이 먼저 그의 심장을 향해 돌을 던지고, 둘째 증인이 돌을 던지고 난 다음에, 군중들이 모두 돌을 던져 돌무더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둔 것은 그들의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증인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행 22:20), 이는 한편으로 바울이 사울일 적에 자신의 전 죄를 슬피 고백하는 것이고, 다른 편으로는 자기를 핍박하는 유대인에 대한 주님의 관용을 비는 태도입니다. 성경해석 학자 Bengel은 “회개한 사람은 언제나 그의 죄를 겸허히 기억하고 이를 고백하는 법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의 회개 전에, 스데반 순교 이후에 늘 가슴에 눌리는 아픔으로 남았고, 결국 바울이 되는 회심의 간접적 촉진제가 되었다고 묵상해 봅니다.

 

3). 본론(Context):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서, 처음으로 예루살렘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예루살렘교회는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순수한 히브리적인 그리스도교와 구별되는 헬라의 기독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개혁 표준 성경 번역엔 ‘헬라주의자’(Hellenist)로 번역하고, 흠정 성경 번역엔 ‘그레시안’(Grecian)이라고 한 사람들은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이고, 種族과 成長 배경이 헬라 사람인(Hellenes)과는 대조가 됩니다. 이는 언어나 관습에서 헬라화 된 히브리 사람을 의미하게 됩니다.

 

여기서 ‘헬라파 사람들’은 ‘히브리파 사람들’과는 대조가 되며, ‘히브리파’라는 것이 종족을 말하는 것이지,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이, ‘헬라파 사람들’이란 것도 헬라의 관습에 젖은 유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순수 ‘히브리’ 유대인과 유대인이 외국에 살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헬라의 주의자’들 사이에 종교적인 견해 차이로 알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스데반도 헬라파 유대인(헬라의 주의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만 제사를 올리고, 예배드릴 수 있다고 했으며, 율법은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에 대한 스데반의 생각은 세계적인 교회를 전망하면서, 성전은 없어져야 하고, 율법은 복음으로 가는 한 段階에 불과하다고 主張하면서, 기독교는 세계를 향해서 진출해야 한다고 主唱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인의 소유가 아니라, 온 세상에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임을 그가 처음으로 간파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로 스데반은 2가지 문제, 곧 유대 민족주의(모세를 모독했다는 것)와 전통주의(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함.)에 逢着하게 되어 투옥되던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상론하면서, 거기서 그리스도를 입증하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의 죄를 지적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스데반의 순수하고 논리 정연한 변증의 설교는 오히려 유대인의 마음을 激動시켰습니다.

 

유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처음부터 미움에 불타서 스데반의 변증의 내용을 진지하게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를 성 밖으로 내쳐서 죽였습니다. 모독죄는 돌로 쳐 죽이는 모세 율법에 따른 것이고(신 13:6), 법정이 재판이 아니라, 私刑이었던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나 집행의 권리가 없었기에, 격분한 폭도들의 만행은 결국 돌로 쳐 죽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최후의 순교 장면은 하늘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을 환영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눅 23:34), 그도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의 죄를 용서하는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리고는 스데반은 평화 속에 잠들었습니다. 옳은 일이 비록 죽음으로 몰리게 되었으나, 옳은 일을 감행한 이에게 임하는 평화로운 임종이 스데반에게 임했습니다.

 

스데반 순교로 인한 여파의 파장은 2가지로, 첫째는 예루살렘교회의 전도는 일단락이 되고, 복음은 제2. 지대인 사마리아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예루살렘교회가 그대로 번영하고 유대인이 거족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와 유대의 그리스도교가 되었던들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계적 구원은 성취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둘째로는 사울(바울)을 회심케 하는 촉진제(행 7:58, 8:1, 22:20)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순교 때에, 선두에 서지는 않았으나, 스데반 순교를 옳게 생각했고, 따라서 그 죄에 동참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또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스데반을 낭떠러지에 세우고, 증인이 먼저 그의 심장을 향해 돌을 던지고, 둘째 증인이 돌을 던지고 난 다음에, 군중들이 모두 돌을 던져 돌무더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둔 것은 그들의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스데반 순교에 대한 증인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행 22:20), 이는 한편으로 바울이 사울일 적에 자신의 전 죄를 슬피 고백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핍박하는 유대인에 대한 주님의 관용을 비는 태도입니다. 성경해석 학자 Bengel은 “회개한 사람은 언제나 그의 죄를 겸허히 기억하고 이를 고백하는 법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의 회개 전에, 스데반 순교 이후에 늘 가슴에 눌리는 아픔으로 남았고, 결국 바울이 되는 회심의 간접적 촉진제가 되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우리를 박해하여 당장에 순교의 피를 흘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 정신은 우리 앞에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향한 일편단심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의 氣槪로 평생을 한결같이 살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우리의 지고지순한 신앙이 퇴색되고 저버리게 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의 내부적 요인! 즉 유혹과 욕심 때문에, 잠시 당하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여 신앙을 퇴색시키면서,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직이 필자의 스승이신 이상근 목사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은 “기독 신자가 주님을 위해서 일시에 죽는 것보다, 일생의 삶 속에서 고난을 헤치면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는 더욱 어렵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또한 日帝 下 신사참배 문제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최후 설교인 <5종목의 나의 기원>이란 말씀이 기억납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한 遺産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라는 가슴 찡한 그 여운이 우리 가슴 속에 지금도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스데반 순교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생 전체를 순교 정신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스데반의 순교 정신을 가슴에 아로새겨서, 순간순간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간교한 유혹을 물리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숨에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평생을 고난과 유혹이 닥칠 때마다 과감히 물리치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그 고난의 유산인 아픔을 지그시 참고 기도하면서, 신앙의 지조를 견지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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