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16. 풍랑 속의 평온(平穩)

solomong 2024. 11. 29. 12:02

16. 풍랑 속의 평온(平穩)

(본문: 마 8:23-27, 막 4:35-41, 눅 8:22-25)

 

1). 서론: 영국의 요한 웨슬리(J. Wesley)가 미국 선교를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고 있을 때, 큰 풍랑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선교사였다고 합니다. 풍랑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선실에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아련히 갑판 쪽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무나 의아해서 나가보니 모라비안 교도 몇 사람이 풍랑의 그 와중에 갑판에 꿇어앉아 찬송(503장)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풍랑이 두렵지 않소?” 물어보았을 때, 그들은 대답하기를 "두렵기는요, 오히려 더 빨리 갈 수 있으니 감사하지요."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날의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고백하기를, "나는 그때 풍랑보다, 그들의 고백이 더 큰 충격이었다. ”라고 했답니다. 본문의 제자들도 광풍의 공포보다, 풍파 중에 가지신 예수님의 침착(沈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는 <풍랑과 평온>이란 극과 극이 공존 끝에, 끝내는 주님께서 “잠잠 하라! 고요하라!”라는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풍랑 속의 평온>의 교훈을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마 8:18,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막 4:35,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하심은 위대한 산상보훈의 말씀을 하신 후, 병자들을 고치신 권능을 보이신 후에, 건너편 삶의 현장과 같은 흉용 한 바다로 가자고 하심은 산상보훈과 주님의 권능을 인간 실존 속에서 얼마나 체득한 믿음인지, 신앙의 실행 여부를 알아보시려는 심사였다고 봅니다.

 

②.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라는 말씀은 “바다에 큰 지진이 일어나”라는 의미입니다. ‘바다 밑바닥부터 움직인다.’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풍랑”(놀)은 σεισμὀς(세이스모스)란 원어의 뜻은 ‘지진’이란 말입니다. ③. 갈릴리 바다는 해면보다 200m 낮고, 주위엔 헬몬산(2814m)을 비롯하여 높은 산들이 에워싸였기에 이런 광풍이 갑자기 일어나고, 또 갑자기 진정된다고 합니다. ④.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막4:38,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말씀하신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주님을 마음에 모신 자는 흉용 한 풍랑과 거센 세파에 안면(安眠)할 수 있는 은혜가 있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⑤.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하는 말씀은 “큰 놀이 일어나”의 말씀에 대한 대조되는 구절입니다. 큰 풍랑 끝에 큰 평온이 온 것입니다. ⑥. 막4:38,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그리스도의 태연한 안면(安眠)과 대조가 되는 말씀입니다. 막4: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두려움’엔 크게 2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풍랑에 두려워하는 것(자연에 대한 것)과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능력(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전자는 육체적인 두려움이요, 후자는 영적 두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전자는 멸망의 표적이나, 후자는 구원의 징조입니다. 진실한 영혼의 두려움은 곧 믿음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행 16:25-34 간수)

 

3). 본론(Context): 갈릴리 바다는 햇빛이 빛나고, 또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은 인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엔 기독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들은 모든 일이 순조롭고 평안하리라.’라는 생각입니다. 한국교회 강단엔 성공과 축복의 단면만을 강조하는 신앙의 메시지가 난무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의 길이 결코 순탄할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길은 많은 사람이 가지 않는 길입니다. 원치 않는 길입니다.

 

분명히 오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볼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만난 것은 큰 광풍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풍랑이 이는 고해(苦海) 바다로 몰아넣은 것이라고도 생각이 듭니다. 신앙의 길은 구원의 길이요, 축복의 길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신앙의 기초단계에 안주(安住)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의 바다로 몰아넣었고, 그것도 주님께서 동승(同乘)한 배에 풍랑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그것도 조그마한 한 공간 안에 있었는데 풍랑을 만났다면, “이 풍랑 어찌 된 일이냐”고 할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었다.'라는 단순한 행동 자체보다는 '어떻게 모셨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신앙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방안에 누워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고, 같은 버스 같은 좌석에 앉아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서울에 있고, 한 사람은 미국에 가 있어도 그리워 견딜 수가 없고, 불면의 밤을 보내고, 그래서 상사병이 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쓰고 지우고 씁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국제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참된 만남의 관계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모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남에는 피상적인 만남이 있고(meet), 인격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encounter) 피상적인 만남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사 정도의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은 10년을 만나도 가슴에 부딪쳐 오는 정감(情感)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만남은 서로가 주고도 더 못 주어서 안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 안에 모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이런 자세는 풍랑을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자리는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신 사람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마 7:21 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한번 믿음의 진위(眞僞)를 시험도 해 보시고, 신앙의 단련(鍛鍊)도 시켜야 하겠다는 속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따를 때, ‘평안’할 것이라는 말씀만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결단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순종했는데 왜 풍랑을 만나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결국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큰 물결이 배를 덮쳤습니다.

 

제자들은 죽을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라는 외침은 제자들이 이러다 죽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불안해할 필요 없었습니다. 바로 그 고난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 여로(旅路)에서 믿음으로 걸어가다가 고난을 만나고, 역경을 만난다고, 결단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바로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본문의 말씀을 음미해 봅시다. 제자들을 위시한 군중들은 주님의 산상보훈 말씀을 듣고 난 소회(所懷)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마 7:28-29)라고 한 것은 고요하면서도 진중한 예수님의 교훈에 무리 들은 큰 파문과 박동하는 심장이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정중동(靜中動)이었습니다. 반면에, 갈릴리 바다의 격동하는 풍랑 중에서 제자들의 가슴은 공포 속에서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로 하시고 깊은 안면(安眠)을 하셨습니다. 이는 동중정(動中靜)이었습니다.

 

풍랑 속의 평온이었습니다. 주님은 풍랑 속에도 천하태평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평안함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주님 당신 자신이 평안의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였기 때문입니다. 이 평안을 믿는 자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으며, 친히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 너희는 근심도 말고 두려워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래전에 신문 보도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국전(國展)인지 어느 그림그리기 대회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하여간에 우수작품으로 입상한 그림의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깊은 산중에 폭포수가 내려치는 그 중턱에 새집이 그려져 있고, 그곳의 새 보금자리에는 새끼 새들이 어미 새가 물어다가 주는 모이를 먹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의 제목은 <평안>이었습니다. 아무리 험난하고 위험한 상황이라도, 새끼들은 어미 새가 먹여주는 모이를 먹는 한에는 평안이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인생 여정을 걸어가는 길에는 쉼 없이 풍파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몇 푼어치 안 되는 인간의 지혜와 과학 문명의 기술에 풍랑을 진압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더는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우리는 도약(跳躍)해야 하겠습니다. 차고 쓸쓸한 슬픔의 바람이 불어올 때, 뜨거운 울화의 바람이 몰아칠 때, 고요히 엄습해 오는 성령의 감동함을 받아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어 감격에 찬 ‘정중동’(靜中動)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폭풍이 거세다 할지라도, 동시에 평안의 복음이 역동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세찬 풍랑을 제어하고, 우리 마음속에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이 안정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동중정(動中靜)의 안온(安穩)함을 느끼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독 신자의 삶 속에 언제나 이 <‘정중동’! 과 ‘동중정’>이 교차하면서 인생길을 승리로 이끌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인생의 모든 풍파 속에서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고요하고 안온한 평안함이 깃든다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인생의 난제들이 우리를 회의, 긴장, 불안의 폭풍 속으로 몰아넣어도 주님 함께 하시면 염려가 없습니다. 인생의 십자로(十字路)에 서서,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예수님께 아뢰어 보면 우리의 앞길이 분명 해집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함이 평안의 길입니다. 항상 <‘靜中動’과 ‘動中靜’>이 교차하면서,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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