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도마’의 결사대 정신
(본문: 요11:7-16)
1). 서론: 황산벌 전투는 백제의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와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군이 충청남도 논산의 황산벌에서 660년 7월 9일부터 7월 10까지 2일간에 걸쳐 벌인 전투를 말합니다. 황산벌 전투는 비록 백제의 계백 장군이 패배한 전투였지만, 다른 어떤 전투보다도 한국전쟁 역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니며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황산벌 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황산벌 전투는 백제가 <나· 당> 연합군에 대항하여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사비도성(泗沘都城)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 전선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패배함으로써 결국 백제는 멸망의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또한 황산벌 전투는 진정한 충의정신과 관용정신을 보여준 ‘결사대 정신’이었습니다. 계백 장군이 높이 평가되는 것은 단지 전투에서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에만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계백은 국운을 건 전투였지만 도의(道義)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비록 적국의 장수였지만 사로잡은 신라의 ‘관창’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돌려보낸 것이 그것입니다.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투였지만, 계백은 진정한 忠義의 가치를 인식하고 관용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백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면서도, 타인에게는 관용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절대가치를 중시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계백의 정신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태가 극도로 위기적인 상황에 처했거나, 독재자의 칼날이 번득이는 박해의 때나, 개인의 삶이 거의 절망적인 나락(那落)으로 떨어질 뜻한 위험이 왔을 때, 기독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죽을 각오로 최선의 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예수님 제자의 결사대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그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위기에 처했음을 안 ‘도마’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에 임할 결심으로 나서자고 동료 제자들에게 ‘결사대 정신’을 외쳤던 것입니다. ‘도마의 결사대 정신’을 현재 우리들의 정황에 비추어서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베다니로 가자 아니하시고,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베다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정한 친구가 산다는 표현이었고, ‘유대’라는 표현은 ‘적’(유대율법주의자들)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노리는 곳이란 표현이었습니다. 친구가 사는 베다니는 유대율법주의자들의 포위권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2마일(1마일=1.6Km이니 3.2Km)지점에 있었고,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께서는 동편 베다니에 계셨고,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사는 곳은 서편 베다니였습니다. 그러나 동편, 서편 베다니는 전부 유대지방이었으며, 동. 서 베다니의 거리는 약 25마일(40Km=100리)이므로 하루 길이었습니다.
②.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디두모’는 헬라어 이름, ‘도마’는 히브리어 이름으로서, 다 같이 “쌍둥이”이란 뜻입니다.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라고 불리는 그는 이런 돌발적인 용기를 가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요14:5, 20:24-25 참조) 그는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셔서 죽으실 결심이 확고한 것을 보고 같이 죽으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우울한 단념과 용기가 혼합된 말이기도 했습니다. 용기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떨릴지라도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날의 도마의 결심이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한 회의주의자였으나, 이때만은 주님을 무척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12제자들인 동료들에게 ‘예수의 결사대’로서 死生決斷을 하자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당시 정황의 전후를 살펴 보건데, 믿음의 동기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위시한 다른 12제자 역시 주님의 부활 후,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겁에 질려서 도망간 그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스승 되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극치를 우리는 여기서 엿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실패의 쓴잔을 마신 이후, 참 신앙적인 길로 가기 위한 전단계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도마는 ‘예수의 결사대’의 한 사람으로 종내 ‘인도’에 가서 선교하다가 AD. 70년경에 순교했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오늘 본문의 말씀인 요한복음 11:16.에 디두모 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11:7.에 "....유대로 다시 가자...."고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유대로 가자함인데, 제자들은 10:22. 이하에서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는 죽음의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5절에 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다니에 있지 않는 것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생각이 "베다니에 예수께서 계시면서 나사로가 죽었다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시면서 죽어가는 나사로도 살릴 능력도 없었구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자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하시면서 죽은 나사로를 제자들 앞에서 다시 살리는 놀라운 이적을 보여 줌으로서, 제자들의 확고한 믿음을 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한편 16절의 도마가 “....가자" 한 것은 7절에 "유대로 가자" 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도마의 생각은 비록 유대에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 군중과 유대 바리새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위기의 장소로 알았습니다. 환언하면 유대로 다시 가는 길은 예수님의 죽음의 길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도마가 이해했다고 풀이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 도마는 예수님께 말씀드리지도 않고,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자는 예수님의 결사대로서의 결의를 다지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제자들의 결의가 예수님의 죽을 운명을 받아들이자는 진실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독한 죽음을 두고 사실은 도망을 했습니다만,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림하신 후,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예수 부활>이란 Kerygma를 가지고 정말 <예수의 결사대>로써,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했으며, 사도 요한을 제하고 10제자는 모두 순교했던 것입니다.
확실히 위기는 두렵고 무서운 것이어서 우리는 다 싫어하나, 그 위기가 가져오는 기회는 "예수의 결사대" 일원이란 각오로서, 최선의 생활로 선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온 땅에 죄악이 관영하였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마침내는 홍수로 이 땅을 심판하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아 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시게 하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은혜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렇게도 세상은 악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아는 하나님의 결사대 정신으로 악을 극복했습니다. 우리는 가장 혼란스럽고 위기의 때를 기회로 선용해야 합니다. 교계 타락, 환란, 중상모략, 개인적 파산이 될 때, 눈물겨운 고독을 격어야 하는 최악의 위기 때, 그 때가 바로 새 역사의 지평을 열게 하는 기회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대에도 세례요한이 목 베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스테반은 순교를, 야고보 역시 목 베임으로 예수의 결사대 노릇을 당당히 했습니다. 최악의 억울한 눈물과 역경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믿음의 길이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정신은 신앙의 절개, 예수님 제자들의 결사대 정신입니다.
우리민족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과 간신배들로 나라의 기운이 쇠약하여 나당연합군(신라5만, 당나라13만)이 강대한 고구려를 치기 위한 그 전초전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부여)을 공격해 올 때, 비장한 각오를 한 계백장군은 출정에 앞서 집으로 돌아와 자기 칼로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자기 가족들이 적들에게 더러운 치욕이나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손으로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일사각오의 투철한 그 정신은 지금도 생각만하면, 사뭇 눈물겨운 감동을 자아내게 합니다. 또한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 사비성이 함락될 때, 끝까지 깨끗한 몸과 마음을 지키려고, 낙화암(落花岩 )에서 꽃잎들처럼 떨어져 간 삼천 궁녀(三千 宮女)들의 애절한 정신이 생각나서 숙연히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일제 말엽 주일을 못 지키게 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박해 속에서, 주의 종들은 나라를 위하고 신앙을 위하여 순국. 순교함으로써, 조국애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제자들의 결사대 정신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주의 종들과 기독자들이 새로이 다듬어야 할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커다란 중증의 병이 들었습니다. 딤후 5:1-5의 말씀은 현대 한국교회의 실상을 그대로 노정(露呈)하는 것 같습니다. 딤후 3:1-5에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1) 자기를 사랑하며 (2) 돈을 사랑하며 (3) 자랑하며 (4) 교만하며 (5) 비방하며 (6) 부모를 거역하며 (7) 감사하지 아니하며 (8) 거룩하지 아니하며 (9) 무정하며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11) 모함하며 (12) 절제하지 못하며 (13) 사나우며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15) 배신하며 (16) 조급하며 (17) 자만하며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와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지금 한국교회가 침체한 원인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열거한 위와 같은 죄악 때문인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자아집착의 발로에서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진리수호 명목하의 위선과 가증하게도 거룩한 신앙의 모양은 있으나, 그 신앙의 아름다운 삶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있다면, 세상의 법칙인 물량적이며, 시장경제 원리인 자본주의정신은 쉽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신앙인에게 오는 핍박과 수모가 심하여 견딜 수 없었었던 무리들이 예수의 결사대 정신으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대서양을 건널 때 거센 파도로 인명이 죽어가고 죽어갔지만,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야 했던 개척자들이 오늘날 미국이 있게 한 청교도 정신이요, 예수의 결사대 정신이었습니다.
오늘날 노회나 총회가 본을 보여 주기는커녕 노회나 총회 때문에 지교회가, 세상의 비방과 조롱을 받게 되는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어려운 때에 예수의 결사대정신으로서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최선의 삶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신앙과 복되고 영광스런 삶의 기틀을 우리가 마련하여 전수 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 제자들의 결사대 정신으로 임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오늘날 이같이 악한 세대에 돈을 사랑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한국교회여! 윤리가 문어 지고 하나님 공경하는 것 보다, 자아집착으로 조폭적이고, 구조적 악을 행하는 교계여!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죄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고 신앙에 굳게 서서 참으로 예수님의 진정한 삶의 결사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의 교계는 이해타산에 순교 운운하지만, 죽는 것 보다, 결사대 정신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좀 의롭게 살고자 하는 주의 종들은 다 같이 결집해서 이 세대를 걱정하고, 교계가 이처럼 타락한 실상을 보고, 우리도 이 시대의 <예수님 제자의 결사대 정신>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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