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18. <남 몰래 흘리는 눈물>

solomong 2024. 12. 10. 12:04

18. <남 몰래 흘리는 눈물>

( 본문: 요18:15-18, 25-27)

1). 서론: 지난 2007년 9월 6일에 71세로 유명을 달리한 세계적 테너 가수, 하늘이 준 음성으로 세계인의 심금을 울려 주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가 일찍이 불렀던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에 나오는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이란 독창곡이 있습니다. '사랑의 묘약'은 19세기 이탈리아의 한적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대농장주의 딸 ‘아디나’, 그녀를 사랑하는 소박한 시골 청년 ‘네모리노’ 그리고 ‘밸코레’ 하사관 등, 세 사람을 둘러싼 사랑을 소재로 한 이야기입니다.

‘아디나’는 ‘네모리노’에게 실망하여 ‘벨코레’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네모리노’는 ‘아디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떠돌이 약장수 ‘돌카마라’에게서 사랑의 묘약으로 알고, 포도주를 사 마십니다. ‘네모리노’가 사랑의 묘약을 사는 일, 그 약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벨코레’에게 입대하겠다는 계약을 한 사실을 알게 된 ‘아디나’는 자신에 대한 ‘네모리노’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하며 눈물을 짓습니다. 약삭빠른 ‘둘카마라’는 그녀에게도 약을 팔려고 하지만, ‘아디나’는 자기 힘으로 그의 사랑을 차지해보겠다고 거절합니다.

숨어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네모리노’는 ‘아디나’도 자기를 사랑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그 기쁨과 감동을 노래합니다. 바로 남주인공 ‘네모리노’가 부르는 그 유명한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입니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서 흘렀소. 유쾌한 젊은이들이 질투하는 듯해요."로 시작되는 가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공관복음서처럼 베드로가 닭이 울 때에, “밖에 나가서 통곡”했다는 말씀 대신에, 그냥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18:27)는 표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무렵엔 베드로의 부인과 통곡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에 전후를 생략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홀로 회오에 찬 베드로의 눈물을 심도 있게 묵상해 봅시다.

2). 본론(Text): ①. 18:15-18- 베드로의 첫 번째 否認-12제자 중, 가롯 유다는 배신했고, 9제자들은 겁먹고 도망쳤으며, 베드로와 다른 제자(본서 저자인 사도 요한) 멀리서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마26:58, 막 14:54, 눅 22:54) 요한의 어마니 ‘살로메’는 성모 마리아와 자매간이었고, 그들은 제사장 계통인 엘리사벹의 친족이었으니(눅1:5,36) 요한은 대제사장과는 아는 사람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심문 장소인 대제사장 가야바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대제사장과 면식이 있는 요한이 문지키는 여자(유대인 저택에는 문지기로 여자를 두는 관례가 많았다고 함.)에게 말하고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고 봅니다. 이때 문 지키는 여자가 요한을 예수의 제자로 알았을 터이고, 요한이 데리고 온 베드로도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 본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문지기 여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의 제자냐’고 물음에 베드로는 부인했던 것입니다.

②. 18:25-베드로의 두 번째 否認- 공관복음서에는 베드로의 3번 부인을 한꺼번에 기록했으나, 당시 목격자인 요한은 회고담으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의 제1차否認 이후에 주님의 심문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요한복음서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요한이 그 당시의 정경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8:18절에 베드로가 서서 하속들과 같이 불을 쬐었다고 기술한 것을 18:25에도 반복적으로 베드로가 불을 서서 쬐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에는 이 때 베드로가 불 곁에 앉아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눅22:56) 허나, 요한복음서는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는 주님에 대한 안부여하에 대한 초조한 마음과 자신들의 안전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인해서, ‘앉았다가 섰다가’ 안절부절 했던 심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베드로에게 첫 번째 질문은 문지기 여자가 물었으나, 두 번째는 불 주변에 둘러섰던 사람들이 같이 질문함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맹세>까지 積極的으로 부인했던 것입니다.(마26:72) 이 때 베드로의 속마음은 그렇게도 장담하던 그였는지라,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과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마음이 엉켜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당황한 상태는 일찍이 “사탄이 밀 까부르듯”(눅22:22) 그대로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③. 18: 26-베드로의 세 번째 否認: 베드로에게 3번째로, 질문한 대제사장의 종의 질문에도 베드로의 부인은 <자기 말이 거짓이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마26:74)는 뜻으로 부인했습니다. 마지막 이 否認은 2번째 보다 더 惡性으로 進展되었습니다. 그 종은 배신자 가롯 유다의 인도로 동산에 주님을 잡으려고 왔던 사람이었고, 또한 그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게 된 말고의 일가친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함에도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말고의 일가가 질문하는 심리에는 주님께서 베드로가 벤 말고의 귀를 다시 고치신 사실도 기억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은 말고의 마음은 그 순간부터 주님께 고마움의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그 일가의 질문엔 악의로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실로 베드로의 신변을 보호한 것은 자신의 괴로운 자아변명의 덕분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의 태도였던 것입니다.

④. 18:27-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 때는 안나스와 주님과의 대화의 결과로 예심을 끝내시고, 안나스 집을 떠나 가야바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18:24), 저택의 뜰을 지나시면서 베드로의 마지막 否認을 듣게 되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엔 베드로가 닭이 울 때에, “밖에 나가서 통곡했다고 했습니다만,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무렵엔 베드로의 부인과 통곡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의 통곡 이후의 여생을 통해서, 새벽마다 닭이 울 때면, 지난날에 주님을 부인한 사실을 생각하고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미 익숙히 알려져 있는 사실을 사도 요한은 생략했으며, 최후로 기록한 요한복음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통곡의 회개’를 생략하고, 그냥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18:27)는 표현으로 기록했다고 봅니다.

⑤. 베드로의 처참한 否認의 因果律: (1). 자신 만만한 과신- ⒜. 바다 물위로 걸기를 원함.(마14:28-29) ⒝. 담대한 신앙고백.(마16:16) ⒞. 주와 함께 옥에도....... 일사각오의 호언장담 함.(눅22:33), ⒟. ‘말고’의 귀를 베는 것(요18:10) 등등은 그의 과격한 열정, 자기 확신, 자기 의지, 및 단련 받지 못한 믿음 등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2). 분명치 않은 태도- 베드로는 “멀찍이”(마26:58) 주님의 뒤를 따름이었습니다. 위급할 때는 도주(逃走)를 생각한 그의 불분명한 태도와 주님과의 동 떨어진 삶의 자세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3). 적당한 타협- 가야바 뜰 가운데서 하속들과 같이 불을 쬔 것은 그들과 同類한 妥協이었던 것입니다, 이 3가지가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된 因果律이라고 생각합니다.

⑥. 18:61-62-베드로의 통곡: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22:61) - 필자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눈길이 필자의 심장을 짜릿하게 관통하면서 온 몸에 전율의 파장이 일어나며 눈시울을 뜨겁게 합니다. 온갖 조롱과 수난을 당하시며 끌려 가시면서도 고개를 돌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걱정의 눈길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은 사랑하는 마음과 걱정스러움이 교차하는 그런 예수님의 눈빛이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베드로의 통곡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예고대로 예수님이 잡혀가시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예수님을 3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베드로의 통곡이 터져 나왔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가 아니라, 온갖 수욕을 당하시고 잡혀가시면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에, 그 순간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스승을 부인했다는 회한과 회개의 통곡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차원은 다르지만, '남 몰래 흘리는 눈물' 중에는 고난의 언덕을 홀로 헤치고 오르기가 지쳐서 홀로 우는 눈물이 있는가 하면, 자기 비애 때문에 남모르게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요셉이 사랑하는 친 동생 베냐민을 보고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남모르게 흘린 눈물도 있습니다.(창 43:30)

그러나 베드로의 눈물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닭 울음소리에(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엔 ‘밖으로 나가서’) '남 몰래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남 몰래 운 경위를 살펴본다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소명했을 때,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날 때, 주님은 고독에 젖었습니다. 당신 자신의 동족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시기하여 올무를 놓아 예수님을 죽일 첫 시도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유대 군중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현혹되어 주님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상의 基督觀'을 물어보신 후에, 위대한 신앙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흐뭇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강경한 표현까지 써서 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주님, 저는 감옥에라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눅22:33) 그러나 충성의 약속을 굳게 다짐한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쉽게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남들은 다 넘어가고 다 굴복 당하고 다 변절하고 다 배신한다 해도, 오직 베드로만은 끝가지 버티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세인들이 기대를 걸고 그를 쳐다보고 있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베드로야말로 살아있는 양심이다.", "굽힐 줄 모르는 정의의 투사다", "무릎을 꿇고 죽기보다는 차라리 서서 죽으리라."고 말했던 반석같이 믿음직하고 굳센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쉽게 변절했을까요? 이 점은 베드로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그의 진솔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서의 문맥에서 생각해보면, 자신 만만한 過信의 베드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바다 물위로 걸기를 원했고(마14:28-29), 담대한 신앙고백(마16:16)을 했으며, 말고의 귀를 친(요18:10) 그의 과격한 열정, 자기 확신, 자기 의지, 및 단련 받지 못한 믿음 등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또한 분명치 않은 태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간격을 두고 잡혀가는 주님 뒤를 따름은 일단 유사시 도망갈 여유를 둔 불분명한 태도와 주님과의 동 떨어진 삶으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또한 가야바 뜰 가운데서 하속들과 같이 불을 쬔 것은 그들과 同類한 妥協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들이 그로 하여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된 원인과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을,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22:61), 예수님의 눈길이 베드로의 심장을 짜릿하게 관통하면서 온 몸에 전율의 파장이 일어나며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온갖 조롱과 수난을 당하시며 끌려 가시면서도 고개를 돌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걱정하는 눈길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은 사랑하는 마음과 걱정스러움이 교차하는 그런 예수님의 눈빛이셨습니다. 그리고 닭울음소리에 베드로의 통곡소리가 오열(嗚咽)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본 모습은 변절한 것보다,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요한복음서엔 닭울음소리에) 심히 통곡(痛哭)하니라." 베드로의 진실은 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미 쏟아진 물 같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깨닫고 통곡한 눈물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어 그 땅을 적시고, 그가 약하여 배신한 그 역사의 하늘에서 눈물의 소나기를 쏟았습니다.

자신의 수치를 골수에서부터 아파하는 그 회한의 눈물, 후환이 두려워 강경히 부정했던 자신이 비굴한 현실주의가 되고 말았음을 솔직히 긍정한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분위기에 영합한 회개가 아닙니다. 홀로 주님만 상대한 남몰래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분명히 눈물 이상의 짙은 액체(液體)였습니다. 뛰는 심장에 空洞으로 생긴 안구의 출혈이 밖으로 쏟아진 피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남에게 보여주기가 싫고, 주님의 전지(全知)와 사랑에 쫓겨서(눅 22:61), 혼자 마음껏 울 수 있는 회개의 장소를 택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 어두움 속에서 터뜨린 통곡, 목이 메여 울고 또 운 오열, 사나이 대장부의 비장한 각오와 외로운 울음이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일당이다. 나도 잡아가라."고 대들지 못한 '비겁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닭은 새벽을 알리려 울었지만, 베드로 그 자신은 자신 속에 이미 만들어진 어두움을 슬퍼해 동물보다 못한 자신을 통탄해 또 한 번 크게 울었습니다. 아니! 그의 여생의 삶은 새벽 닭울음소리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자기와 같은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말미암아 역사의 어두움이 짙어져 멸망으로 줄달음 친 죄악의 깊이를 바라 본 격분, 이것이 베드로의 남모른 통곡입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에 버금가는 회개(悔改)이었기에 이 울음은 위대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베드로의 고독한 통곡이 너무나 진실했기에 그의 변절의 과오를 덮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인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고 당부했고, 그는 주님을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나섰습니다. 비록 멍든 심장을 가졌으나, 그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증거 하는 것을 자기 삶의 의미로 생각하고, 초대 교회 군중 앞에 서서 예수의 증인 노릇을 했을 때, 하루에 3,000명이나 회개를 시켰던 것입니다.

은밀한 회개가 없는 한국교회! 오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내, 십자가 밑에서 '주여, 주여' 가증한 목소리로 기도드리는 무리들과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진면목이 빛난 것은 자기를 똑바로 본 깨달음입니다. 분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뉘우침이었습니다.

이것처럼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소위 지도자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던 것과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뉘우침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새벽닭은 우는데, 고독한 통곡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부끄러워야 혼자 남 몰래 골방기도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기독교의 진리와 선행은 은밀하게 숨어서 남모르게 오직 하나님만 대상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본질 대신에 비본질적인 것'으로 대치했기에 야기된 문제입니다. 질적인 영혼의 문제, 즉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에서 자본주의의 논리인 세속적 물량주의가 한국교회의 정체성(Identity)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의 한국교회는 새벽제단마다 양떼들 때문에 아파하는 목자의 눈물 자국이 있었고, 성도들은 사랑하는 목자를 위해서 눈물 뿌린 골방의 기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교계를 위해, 나라를 위해,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 은밀한 기도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런 본질적 요소가 살아져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본래적인 교회 모습으로 되돌아 가야하겠습니다.

4). 결론: 자, 끝맺음을 합시다. 이제 필자는 그 후 감옥에도 즐겨 갇혔던 베드로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비록 '쿼바디스'의 실수를 또 한 번 저지를 수 있었다고 해도, 그의 배신은 그의 고독한 '통곡'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초대 교회 역사를 그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나갔고,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주님처럼 바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황송한 것이라고 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의 장엄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롬 6:20)는 말씀은 이런 외로운 통곡을 전제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아, 변절한 베드로여! 분위기에 휩싸인 회개가 아니라, 홀로 마음껏 통곡한 베드로여! 실패의 쓴잔이었기에 회한을 통한 환희의 축배를 들었고, 위대한 소명감에 재귀한 당신, 죽기까지 스승의 증인으로 살다 간 당신이여.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보낸 당신의 일생 찬연하여라. 새벽닭 울 때마다 당신 생각에 눈물 적시는, 여기 동방의 아침 햇살이 빛나는 나라. 당신의 참회와 그 눈물, 봄비에 묻혀 무딜 대로 무딘 우리 가슴에, 길이 촉촉이 뿌려주소서! 왜냐하면 베드로의 부인의 죄는 곧 우리들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