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호스 메(ὡσμή) 신앙 (초연한 삶)
(본문: 고전 7:29-31)
1). 서론: ὡσ(관계부사, 같이, ........처럼),μή{부정을 나타내는 불변사, 아니(not)}는 <마치.......가 아닌 것처럼>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즈음하여 성도들이 근신할 바를 권하면서, 각 분야에서 超然한 삶을 살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家庭, 喜悲의 感情, 財産 有無는 인간 삶의 바탕(ground being)이 될 수 없기에,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超然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초연(超然)이란 국어사전에 "세속에 벗어나 있어 속사(俗事)에 구애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속사에서도 벗어나 그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하게 자기의 사고(思考)와 입장에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조선조 말기의 화가인 ‘유숙’이란 분은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초탈한 듯 이끼 낀 바위에 앉아/가는 것도 오는 것도 다 잊었네./古木이 이 사람과 비슷하여/반갑게 서로 마주하여 한가롭네!” 박경리 소설가는 인생을 거의 다 살고 임종 몇 달 전의 語錄에, “다시 젊어지고 싶지도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술회했다고 합니다. 초연한 삶의 모습을 실감 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 신앙자들의 초연한 삶의 모습을 한번 그려 봅시다.
2). 본문의 이해(Text): 본문 고전 7:29~31-①. 초연한 인생살이-⑴. 가정생활-바울은 지금까지 결혼문제를 거론해 왔기에, 아내 유무를 超脫하여 생활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적인 환란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⑵. 정서 감정의 처리-세상사란 喜怒哀樂의 각축을 다투면서 사는 것이 인생 일진데, 이런 情緖 感情에서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⑶. 경제생활-흔히 재물은 뜬구름(浮雲)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금전거래는 적당히 取捨選擇을 하면서 살 것이지, 守錢奴는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금전의 지출도 낭비하면서까지 호화로운 생을 謳歌 禮讚하지 말고 초연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⑷. “이 세상 형적(σχῆμα-流行)은 지나감이라.”라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현상에 집착하여 영생의 도리를 망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조직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종말 시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만, 특히 바울은 인간 세상의 전개되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바라보면서, 末世의 때로 규정짓고, 성도들의 인생 제반사에 초연하여 거기에 몰입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가정생활(아내), 정서 감정의 생활(喜怒哀樂), 그리고 경제생활(財産)에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초연한 삶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사에 몰입되면 때로는 기독 신자의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려면 방의 불을 꺼야 하듯이, 우리 인생길을 제대로 보려면 이따금 홀로 들길을 거닐면서 초탈한 심정으로 자신의 소유와 욕망을 내려놓고, 냉정히 자신의 모습을 직시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참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두 길 위에서 서서, 순간순간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할 그 저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 행적은 지나감이라.”라는 이유에서 <‘호스 메’ 신앙>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 ‘행적’(σχῆμα)이란 헬라어 원어의 ‘스케마’는 ‘流行'(fashion)이란 의미입니다. 세상의 외부적이요, 변하기 쉬운 ‘형식’이란 뜻입니다. 극장의 연극 장면처럼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체가 아니고 ‘껍데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껍데기인 세상일 자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호스 메(ὡσ μή)} 살라고 했던 것입니다.
σχῆμα와 상대되는 참 모양이요, 알맹이는 μορφή(형체)라는 것입니다. (빌 2:7)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여하히 우리 인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셨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순히 외형만 변하신 것이 아니라, 內面의 전 실존이 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나사렛 목수의 삶, 가족과 이웃까지 예수님을 미쳤다고 해도, 광야 40일간 허기진 실존 속에서도 그야말로 초연히 사탄의 시험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 눈먼 자, 벙어리, 문둥병자, 창녀, 배고 푼 군중, 등 하층 구조에서 허덕이는 뭇 군상들을 사랑하셨던 博愛主義자! 당당히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에 죽으러 가는데도 개선장군처럼 진군한 주님이셨습니다. 가장 고독한 순간인 하나님 아버지까지도 外面하고 얼굴을 돌린 겟세마네 동산의 그 날밤에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는 주님의 결단 속에서, 그리고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그 태연자약함! 그리고 삼 일 후에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의 일생! 그 超然함과 그 燦然한 삶이었습니다.
자! 이젠, 바울이 流行처럼 흘러가는 껍데기와 같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세상사에 超然하게 살면서 信仰에 몰두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생무상의 꿈에서, 보이는 세상 것들의 환상에 휩싸이게 되면 저절로 무력해지기 마련입니다. 인간 자체의 삶은 초연하면서, 믿음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우러러 사모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또한, 실존주의 신학자인 Paul Tillich의 신학 사상을 빌려서 답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사람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다 그런 것처럼, 人間 실존 자체, 喜悲의 感情 및 財産 등등은 의존적 존재이긴 하지만, 끊임없이 그런 것은 非 存在와 無意味한 것이라고 우리를 향하여 도전해 오면서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서 명예와 권력 및 쾌락을 주리라고 기대하면서 關心을 갖지만, 그 자체가 예비적 관심(Preliminary Concern)밖에 될 수 없으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성찰에 관한 질문을 던질 때, 자신은 비 실존의 유한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고, 존재론적 不安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自由를 찾고자 하는데,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성과 의존성과 제한성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됩니다. 대신에 자기 힘에 의존하는 자율적이며 절대적인 존재로 자신을 만들어가게 되며, 그 결과는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창세기 3장의 인간 타락의 원인으로 비극적인 소외상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 불신앙, 오만 그리고 정욕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무제약적이고 어떤 폭군이 강요한다고 할지라도, 심각하게 취급해야 할 관심사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인 것입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관심을 ‘예비적 관심’인 것입니다. 예컨대 성서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들 수 있는데, 예수님의 식사 준비에 분주했던 '마르다'는 유한하고 예비적이며 일시적인 관심에 집중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했던 '마리아'는 무한하고 영속적인 관심인 궁극적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궁극적 관심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에, 그래서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Paul Tillich는 하나님을 '존재의 根柢'(The Ground of Being), 혹은 '존재 자체'(Being Itself), '궁극실재'(Ultimate Reality)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사로잡히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 30)라고 하였습니다. 즉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주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는 힘을 우리는 ‘信仰’이라고 합니다.
한갓 된 예비적인 관심사(가정, 정서 감정, 재산, 쾌락, 명예, 권력 등)는 비존재요, 무의미한 것이요, 유한한 존재임을 곧 인식하게 될 것이고, 이런 것에 의존하게 되면, 끝내 인간실존 자체가 불안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에,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사엔 超然하게 살면서 ‘궁극적 관심’인 信仰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流行’처럼 흘러가는 껍데기와 같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Paul Tillich 말하는 예비적 관심에 현혹되지 말고,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세상사에 超然하게 살면서‘궁극적 관심’인 信仰에 몰두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생무상의 꿈에서, 보이는 세상 것들의 환상에 휩싸이게 되면 저절로 무력해지기 마련입니다. 인간 자체의 삶은 초연하면서, 절대적 관심사요, 믿음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우러러 사모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바울은 家庭, 喜悲의 感情, 財産 有無는 인간 삶의 바탕(ground being)이 될 수 없기에,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ὡσ μή 신앙) 超然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유는 “이 세상 행적(σχῆμα)은 지나감이라.”라는 것으로, 잠시 流行(σχῆμα)에 흘러갈 수밖에 없는 껍데기 삶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또한 P. Tillich는 인간실존 자체가 비존재(none being)이기에 끊임없는 위협과 불안으로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예비적 관심’ 밖에 둘 수 없기에, 존재의 용기 (Courage to being)와 궁극적인 관심인, 모든 ‘존재의 바탕’이요, ‘존재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향한 신앙에 사로잡힌, 알맹이 있는 삶을 살면서, 인간 세상사엔 超然한 심정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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