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원리 (The principle of encounter)
(본문: 마7:12-14)
1. 서론: ⑴. 복에는 인복(人福)과 천복(天福)이 있습니다. 사람 잘 만나는 것도 복이란 말입니다. 사실이지 세상에 사람을 잘 만나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을 못 만나서 실패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⑵. 사회생활이란 만남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만나야 하고, 스승은 제자를 만나야, 성공이냐, 보람이냐가 판 갈음하는 수가 많습니다. 친구도 잘 만나야 합니다. 친구를 보고 그 사람의 대략은 안다고 합니다.
⑶. 주위 환경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인생에서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하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만남입니다. 인생의 반려자가 되어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⑷. 만남에는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Meet입니다.(내 계획의 일환으로 만나는 것)-그러나 이것은 그냥 스쳐 가는 것뿐입니다. 피상적 만남이요, 이것은 서로를 이용의 관계입니다. 둘째로는, Encounter 입니다.(예측하지 않는 내 계획 속에 있지 않은 해후이며, 이 만남으로 내 계획의 스캐줄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그러한 사건을 말합니다.[고대 희랍의 Platon은 귀족의 아들로서 정치에 뜻을 주고 있던 중, 철학자 Socrates를 만남으로서 뜻을 바꾸어 철학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복에는 한계가 있기에, 우리는 또한 천복이 요구됩니다.
2. 본론: A. 인간과의 만남(人福)
⑴. 구약 창세기에 ‘요셉’과 ‘바로’의 만남은 서로가 유익 된 만남이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 해몽을 해줄 뿐만 아니라, 그 흉년을 어떻게 방비할 것도 일러 주었습니다. 이때 바로가 요셉과 같은 재상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와 그의 민족은 7년 흉년에 점멸되었거나 처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요셉도 인복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미 계획된 섭리의 역사(役事)이겠습니만, 바로가 요셉의 꿈 해몽으로 인연하여 바로를 만나서 총리대신이 되고 자기 민족들 구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⑵. 서로를 아껴주고 받아주고 생각해 주는 상호관계는 서로가 노력해야 되지만, 어찌하였던, 인복이 없는 것에 대해 새해에는 좀 서로가 깊이 반성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씨가 인복의 원리인 줄 압니다. 본문 말씀은 이는 율법의 황금률(黃金律)이라고 합니다.
세리 ‘마태’는 진정한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12제자 반열에 섰고, 이와 같은 교훈을 남기는 마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예수님이 나시기 약 20년 전에, 어떤 이방인이 ‘솸마이’, ‘힐렐’이란 두 유명한 랍비에게, 자기가 외나무다리에 서 있는 동안 율법 전체를 가르쳐 주면, 유대인이 되겠다고 조롱 투로 말을 하니, ‘솸마이’라는 랍비는 “노하여 물러가라!”
(그 많은 율법의 진리를 외나무다리에 서 있는 그 짧은 시간에 말할 수 없다고 하여), 후자인 ‘힐렐’이란 랍비는 “남이 네게 하기를 원치 않은 일을 너도 남에게 하지를 마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요, 기타 그 많은 것은 다 주석에 불과하다고 일러주니, 그 이방인은 감격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수많은 성인과 철학자는 다 부정적 교훈을 많이 했습니다. 예컨데: 칸트 같은 철학자는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지, 수단으로 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⑶ “.......을 하지 말라.”는 것은 소극적, 부정적 윤리관이었습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가르친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남들이 네게 해 주기를 원하는 대로 너도 남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황금률은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무엇이든지 사람이 네게 마땅히 옳은 일을 하는 대로, 너도 그에게 옳은 일을 하라.” 이것은 대단한 양심의 요청입니다. 이것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빛이 요구되며, 순결한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면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② “네가 만일 그 자리에 있으면 그가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그리하라. ”네가 백화점 사무원이면, 네가 회사원이면, 네가 교인이면, 그러므로 황금률은 먼저 자신에게 순결한 양심을 요구하고, 이제 종국에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네가 그 자리에 있음”으로 완전한 이해(사랑의 별명)와 동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③ “네가 필요할 때, 그가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그리하라.” 사람에게 아무 요구도 없다면, 이런 법의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게 마련된 것이 아니고 더불어 살게끔 되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이웃의 힘을 요구하고, 슬플 때, -이웃의 위로가 요구됩니다. 범죄를 하였을 때, 사유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인생 존재입니다. 이 인간의 힘, 위로, 사유의 한계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윤리적 법>은 윤리를 초월하는 우리를 사유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사유의 은총이 요청되는 것입니다.(딤전 1:5) 유대인들은 황금률을 옷자락에 새겨서 다녔으나, 우리는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B. 하나님과의 만남(天福)
⑴. 13-14.절에는 십자로(十字路)에 선 인생이 어느 길을 갈는지, 알 수 없는 십자로 중앙에 서게 됩니다. 그 결단은 방황(彷徨)하기 쉽고, 양단간에 선택(選擇)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상 위인들은 다 선택이란 관문(關門)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신 30:15-20), 여호수아가 그랬고(24:15), ‘예레미아’가 그랬습니다.(21:8)
⑵.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선택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과 소수의 사람들이 가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입니다. 이 2가지 길이 어떻게 다른지 보십시다.
① 어려운 길과 쉬운 길입니다.-위대함으로 인도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위대’란 노고(勞苦)의 산물이 되는 것입니다. “악이란 쉽고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은 평탄하고 가까이 있습니다. 헬라의 시인 ‘헤시옫’은 “<위대함>이란 앞에 신들이 땀을 놓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종류의 위대한 것이든지 노력과 고통 없이 성취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선택 여하에 따라 축복이 가름하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 말입니다. 보십니다.
② 길고 짧은 길입니다. 갑자기 혹 위대해지는 수가 있으나, 대개는 길고 오랜 결과입니다. 위대해지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Plato는 그의 저서 <공화국> 첫 구절을 무려 13번 고쳐 다시 썼다고 합니다. “영구한 것은 갑자기 되는 법이 없고, 좋은 것은 먼 길 끝에 있다.”고 했습니다. 지름길을 가느냐? 정로를 가느냐? 하나님이 보십니다. 그 여하에 따라 천복(天福)이 따를 것입니다.
③ 훈련이 있느냐? 없는 길이냐? 훈련 없는 성취란 없습니다. 계속적인 훈련이냐? 신앙의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건(신앙)의 훈련을 하라.”(딤전4:8)고 했습니다.
④ 생각이 있고, 없는 길이란 것입니다. 생각이 있는 자면, 성공을 위해, 천복을 위해 쉽고 짧고, 훈련 없는 길을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만사는 다 2가지면, 곧 목전에 보이는 것과 앞날에 보이는 길입니다. 쉬운 길은 좋아 보이나, 그 대가(代價)는 미미하고 허망한 것이고, 어려운 길은 곤란해 보이나, 영원하고 천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가 가치 판단을 바로 하려면, 눈앞에 만 보지 말고, 저 끝을 영원을 보아야 합니다. 언제나 <사건은 끝>에서 이루어진다고 희망의 신학자 J. Moltmann은 말했습니다.
3. 결론: 소극적인 윤리관에서 적극적인 예수님의 사랑의 윤리관을 생각보아야할 송구영신의 반성과 새로운 선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로 중앙에 선 인생길을 또다시 결단하면서 결어야 할 선택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입니까. 저것입니까 선택여하에 따라서 성공 같은 실패냐, 실패 같은 성공이냐가 결정됩니다. 잠시의 황홀함이냐, 영원한 찬란함이냐 그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끝.
2007. 12. 11.
山下연구원장: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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