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135. 인간 자아발견(1)-젊은이를 위한 설교 말씀

solomong 2026. 4. 26. 09:53

135. 인간 자아발견(1).

(본문: 눅5:1-8)

-젊은이를 위한 설교 말씀-

1. 서론: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적 명제는 너무나 잘 알려진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참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인간 자아란 무엇인가, 무엇이 자신을 억압하고 갈등케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 자아의 보편적 상징은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심리학적, 철학적, 신학적 및 성서적 차원에서 실존적으로 탐색해 보려고 합니다.

 

특히 본문의 갈릴리 바다의 어부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 ‘선생’의 호칭에서 ‘주여!’로 그리고 종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로 승화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적의 고기잡이 사건으로 예수관이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초자연적 능력자이신 예수님이란 ‘거울’ 속에서 자신의 眞面目을 발견하고서, 주님 앞에 부복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관이 변화한 베드로는 또한 자아관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본문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수능시험>을 치루고 난 젊은이들이 이젠 “내가 어떤 자인가.”를 탐색해보도록 지도했으면 좋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밤이 맟도록.......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베드로는 밤을 세워가며 고기를 잡으려고 수고했지만, 허탕이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부의 경험상으로 봐서 순종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⑴. 시간적으로 고기를 잡을 수 없는 아침이란 것, ⑵. 장소적으로 고기를 잡을 수 없는 깊은 곳이란 것, ⑶. 인간 노력으로 볼 때, 이미 그물을 씻은 상태라는 것,

 

⑷. 자기는 노련한 어부였으나, 예수라는 분은 산중의 목수였다는 것,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조건들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사색가 Pascal의 “믿음이란 理性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신앙이란 인간의 논리와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란 것입니다. ②.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예수관이 변화한 베드로는 또한 자아관이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참 대상(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 진실 된 자아상을 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直視했기에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3. 본론(Context):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 생활로 호구지책하면서 그런대로 고기잡이엔 일가견을 기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을 처음으로 뵈옵던 그날엔 밤 세워 고기잡이를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를 찾아간 주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대단한 漁獲高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자신의 인생경험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장소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이 가능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선생’이란 호칭에서 ‘주여!’라는 존칭으로 변화되었고, 종내 驚異와 갑작스런 상황변화로 불안한 심정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말과 함께 예수님 앞에 부복하고 말았습니다. 절대자의 광명한 빛 앞에서 얕은 물가에서 허우적거리던 초라한 자아상을 보게 되었고, 동시에 경험과 이성을 초월한 深度 깊은 인생살이가 어떤 것인가를 번쩍이는 예수님 慧眼의 언저리를 더듬을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로써 사람을 낚는 어부로, 수제자로, 새벽 미명 3번 주님을 부인한 것에 대한 회오에 찬 쓰라림, 그리고 장엄한 순교의 길로 생을 마감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럼, 인생주변부터 내가 누구인지 살펴보십시다. 인간자아의 상징(Symbol)은 첫째로, 생명력입니다. 생명체로서의 자기(Self)는 하나의 총체적입니다. 육체로서는 “배가 고프다, 머리가 아프다.” 는 생리적인 면을 생각할 수 있고, 정신으로서는 “무엇을 의식하고 있다. 잠재된 무의식 세계가 의식을 작용하고 있다”라는 심리학적면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육체와 영혼이 합한(Soma와 Soul) 영혼이 있습니다. 육체 안에 있는 생명력이란 개체 자아가 출생하는 순간부터 하나의 개성(Individual Self)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아의 특성입니다. 자기의지대로,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결정은 존재론적 의지와 심리학적 의지로 구별되는데, ⑴.존재론적의지(The Will to Live)는 삶에의 지속되는 한 자아는 2가지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또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종해야 합니다. 하나는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격어야 하는 고난, 실망, 손해 등에 대한, <무자비한 운명의 투석과 화살>(하나님의 섭리이지만)을 감내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무엇을 위해서 산다는 意識을 의미합니다. 목적의식이 없는 자아는 실존적으로 무의미한(Meaningless)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⑵.심리학적 의미(Psychological Meaning)의 자기결정은 자신 속에 일어나는 긴장감(Self-Conflict, 자기가 자기와의 싸움을 말함.)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자아의 응답을 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어 난지 몇 시간 내로 일어납니다. 즉, 젖을 먹는 다든지, 거부한다든지, 몇 달 후엔 장난감 등에 대한 어떤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아기에게 무관심하면, 아기를 달래고, 얼러도 울음으로 거부의 태도를 보입니다. 어린 아기가 말을 배우게 될 때, 빨리 배우는 단어 중에 하나는 “아니냐!(no!, 거부)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입니다. 자아라는 존재의식을 말합니다. 2, 3세 어린이가 생활 속에서, 아기(Baby), "福童이, 개똥이, 등”(Nobody, 무소속 된 자)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가진 누구누구라고 하는 자(Somebody, 소속된 개체)라고 호칭할 때, 비로소 자기(“나”-Self)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넷째의 자아특징은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든가, 나는 내가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이리 지지리도 못났나.” 등등의 자기 객관화를 의미합니다. 자기초월을 더 확대해서 생각한다면, 자연 안에 살고, 보호해 주는 자연의 유한(有限)의 세계에 삽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정신의 영역 안에 삽니다. 물질세계를 초월합니다. 정신의 영역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자기(Real Self)라고 합니다. 자기초월엔 하나의 분열을 가능케 합니다.

자아 평가자이자, 피 평가자요, 자기 심판자이자, 피심판자입니다. 주체로서의 “나”(“I")이고, 객체로서의 자기 대상인“Me"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될 때, 나는 분열이 일어납니다.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의심하는 것> 사이에 자기 갈등(葛藤,Conflict)야기 되나, 이 자기 갈등상태를 자기가 수용(受容, Acceptance)하게 될 때, 갈등은 없어지고, 문제해결이 됩니다. 이것을 자기 치유능력(治癒能力)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위기와 비극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신앙적 차원에서 <기독교복음>이라고 하겠지요.

어찌하였든지, 자아의식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직접 인식하는 길을 여는(Open)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신학자요, 신약신학자인 불트만(R. Bultmann)도, "만약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려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If we are to speak of God, we must evidently speak of ourselves.)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인간이 인간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자아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흙으로 만든 유한한 존재인데, <창조자로부터 유리(遊離, 分離)>가 인간의 비극이요, 우리 기독교 성서나 신학적으로 그것을 죄(罪)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죄는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떠날 수도 있다는 말은 분리를 의미하며, 그것을 원죄(原罪)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존철학적으로는 이것을 고독한 존재(Dasein)이라고 부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대면(Confrontation)해 있는 대상(對象)이 된다.”라고, 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인 기독교 실존심리학자인 쉐릴(J. Sherrill)이 “영혼의 투쟁”(The Struggle of the Soul)이란 그의 저서에서 말한바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고찰해야 할 핵심적인 부분에 당도했습니다. 그것은 <자아발견>이란 개념입니다. 자아발견엔 우선 심리학적으로 개체인 내가 최초의 이웃인 어머니와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의 존재로 태어났느냐, 아니면 보살핌(Care for)이 없이 생육했느냐의 자기 생육사(生育史)를 철저히 고찰해야 한다는 것만 말하고, 여기서는 지나가겠습니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자아발견의 제일 중요한 요소는 자기가 생육되어 오는 동안 부모, 형제, 친구, 사회집단과의 어떤 관계 속에서 자라났느냐가 자아발견의 가장 주요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나 지도자는 이 부분을 잘 설명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목사나 지도자도 역시 이 문제를 탐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존적 자아는 바로 이런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적 자아(Existential-Self)의 개념은 특별한 시간 속에서, 특정한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자아를 의미합니다.

순간적으로 찍은 스냅사진과 같다고 할까요. “<내가 너 될 수 없고, 네가 나> 될 수 없는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나 실존적 자아는 교정을 필요로 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실존적 자아 속에는 사랑과 미움, 친절과 잔학, 배려와 냉대, 용감함과 비겁함, 만족과 불만, 의식적 동기와 무의식적 동기, 위대함과 비열함, 희망과 절망, 등등이 뒤엉켜 있는 존재(Being)입니다. 이 실존적 자아는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심한 불안(不安, Anxiety)을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폴 틸릭(P. Tillich)의 제자인 미국 하아버드대학교 교수인 메이(Rollo May)의 학위 논문인 “불안의 의미”(The Meaning of Anxiety)를 유니온 신학교 교수인 쉐릴(J. Sherrill)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실존적 자아는 첫째로는 <정상적 불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피조성과 유한성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 대표적 예입니다. 둘째로는, <비정상적 불안>이란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적 불안이라고도 합니다.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불안입니다.

위에서 재차 강조한바와 같이, 개체 성장 발달 과정에서 <너와 나>의 어떤 관계(The Relation) 속에서 성장했느냐가 바로 그것입니다. 필자는 해방 전의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 바로 옆에 주재소(지금, 경찰서)가 있어서, 공부하다가도 “구슈게이요!”(적기가 왔다는 사이렌 소리와 방공호 속에 도피하라는 신호)하면 방공호로 모두 달려가던 생각과 일본순사(경찰)가 검은 유니폼을 입고 칼을 차고 있는 주재소를, 날마다 지나서 학교에 갔기에, 또한 2학년 때에 해방과 더불어 시대의 혼란 속을 거쳐 왔기에, 지금도 한국 경찰을 보면, 무의식은 겁이 나고, 동시에 의식적으로는 저항감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나의 잠재된 실존적 자아입니다.

셋째로는, <상황적 불안>이란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 상황적 불안입니다. 시골 길을 가다가, 길가에 ‘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습니다. 불안합니다. 이런 것을 상황적 불안이라고 합니다. 위 3가지 불안을 완전히 없애고 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런 불안을 없애고 살고자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성 자체를 상실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불안 그 자체가 인간 그 자체인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자기 주변 상황이 급변함에 대한 불안한 심정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승화된 고백이 나왔다고 하겠습니다. 이적의 고기잡이 사건으로 예수관이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초자연적 능력자이신 예수님이란 ‘거울’ 속에서 자신의 眞面目을 발견하고서, 주님의 무릎 아래 부복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관이 변화한 베드로는 또한 자아관이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내 참 진실 된 자아발견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4. 결론: 자아를 발견하는 방법으로는 타자(他者)와 진지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참 자아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미우나 고우나 참 자아를 일단은 수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생육하는 과정 속에서 누구와의 관계에서 그런 인격형성이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그 옛날 자아를(생육환경)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불평하거나, 왜 그랬느냐. 고 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불유쾌한 감정을 “아! 그래서 그렇구나!”의 원인을 분석했으면 이해하고, 가능한 그것을 타자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 한도에서 <발산>해야 합니다. 보상(報償)행위라 던지, 승화(昇華)시킨다는 것이 바로 발산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칼빈과 불트만이 말한 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구약의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것에서 자기 자신의 발견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도 예수님의 실존을 알고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외도 이런 경우를 수많이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실존도 하나님 말씀 속에서, 영적으로 기도하는 중에서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참 만남(The Encounter)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자아는 불안한 존재이기에, 실존철학자요 신학자인 킬케가드는 이것을 <하나님께 도약>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기독교 신학은 이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자아탐색이 없이 순전히 신앙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이중인격자와 바리새교인과 같이 위선자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참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한바와 같이 자기 자신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모르고서도 자신을 알 수 없다는 말이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