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134. 신자의 사회적 위상과 처신

solomong 2026. 4. 22. 10:29

 

 

134. 신자의 사회적 위상과 처신

(벧전 2:11-12)

 

1). 서론: 톨스토이의 '참회록'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인생 寓話가 있습니다. 어떤 나그네가 광야를 지나다가 사자가 덤벼들기에, 이것을 피하려고 물 없는 우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물 속에는 큰 뱀이 큰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어서, 우물 밑바닥에 내려갈 수도 없고, 우물 밖으로 나올 수도 없는 나그네는 우물 안의 돌 틈에서 자라난 조그만 관목 가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나무를 쳐다보니, 검은 쥐와 흰쥐 두 마리가 나뭇가지를 쏠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 손은 놓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그네는 우물 밑에 있는 큰 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니 그 나뭇잎 끝에 흐르고 있는 몇 방울의 꿀을 발견하여, 이것을 혀로 핥아 먹는 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이 산다는 것이 꼭 이 정황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라고 했습니다만, 사실적으로 신자는 영적으로 본향인 천국을 그리면서 세상에서 잠시 살다가 가는 나그네의 인생살이인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적 位相인 것입니다. 나그네는 언제나 본향에 돌아가려는 향수 속에 사는 것이기에 이에 걸 맞는 삶의 處身을 하면서 살아야 함에도, 마치 위의 톨스토이 우화 속에서 나무 가지에 흐르고 있는 꿀을 핥아 먹는 것처럼, 육체의 정욕적인 향기와 탐욕에 급급하다가 불신 이방인들의 비난 받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나그네 인생은 勸善懲惡과 實踐躬行(권선징악과 실천궁행)의 처신을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⑴. 본문의 요지-신자들은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들이기에, 그래서 사회적 처신의 위상은 순례자 나그네이므로 이 위치의 신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영원한 본향에 돌아 갈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며, 사회적 삶의 자세는 선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⑵. 육체의 정욕(ἐπιθυμία)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는 것으로 악성적인 욕심을 의미 합니다. 정욕(ἐπιθυμία)은 근본적이며 지극한 욕망으로서 이방인의 특징인 도덕적 퇴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음행, 술수, 시기, 분노, 이단, 술 취함, 방탕 등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갈5:19-21)

 

⑶.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마5:16)라는 말씀의 반영이라고 하겠습니다. 나그네는 소극적으로 육욕을 제어할뿐더러, 적극적으로는 선행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⑷.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본문의 정황은 AD 64년경 로마 ‘네로’ 황제 치하 당시, 유대민족이 흩어져 살던 때에 박해를 받으면서 살던 시대이었습니다. 또한 근거 없이 “악행을 하는 새로운 미신 자들”이란 오해를 받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 선교 받던 때부터 지금까지 별스런 누명을 흔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오해에 대해서 변명은 별 효과를 못 낸다고 봅니다. 기독자들의 마음과 삶이 향긋한 복음의 향기를 풍기면서 윤리 도덕적으로 선한 모범을 실천하는 길 밖에 없다고 사료됩니다.

 

3). 본론(Context): 베드로 전서는 주후 64년 로마 네로황제 박해 시초에 기록된 것으로 이해할 때, 박해 하에 고난 속에 <흩어져서 나그네의 인생살이>를 하고 있는 신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서신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벧전1:1 참조)라고 하면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란 타향에 사는 자이며, 행인은 잠시 지나가는 길손으로 한곳에 정착하여 살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나그네와 행인은 베드로전서의 기본 사상의 하나로 본향을 천국에 둔 나그네이며, 이들은 이 땅위에 영원한 시민권이 없는 행인들이며, 언제나 본향을 돌아가려는 짙은 향수 속에 사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 나그네는 그 때나 지금이나 사회적 신분의 位相은 나그네입니다. 서론의 톨스토이의 인생 우화처럼, '나그네 인생'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검은 쥐 흰쥐가 나무 가지를 쏠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밤과 낮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한 70-80년 밤과 낮, 검은 쥐 흰쥐가 드나들 듯,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리면 마침내 매달렸던 가지는 부러지고 인생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 기막힌 사연이 우리 인생의 현주소입니다.

 

오늘의 기독자들도 이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말고 有限的 삶속에서 無限한 彼岸의 본향을 생각하면서, 너무 此岸의 삶에 집착하여 욕심을 부리며 육체적 정욕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이 육체적 정욕이란 뜻은 <이방인의 특징인 도덕적 퇴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문득 문득 이 사회적인 位相(位置)이 나그네란 신분임을 생각하면서 옷깃을 여미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망각하고, 아주 맛있는 달콤한 꿀맛에 심취하지는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 꿀은 '젊은 날의 향기와 인생의 성공'으로 인한 과욕을 부리는 '부와 권력' 혹은 ‘행복한 가정에 침잠'일 수도 있고, 넓은 평수의 아파트, 번쩍이는 새 차에 연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검은 쥐 흰쥐 그리고 고개를 쳐든 독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연장선에서 살고 있으며, 과거는 돌아갈 수 없고, 미래는 석양에 해 지는 것처럼, 대문 밖의 죽음의 사자가 “다음은 네 차례야!”하면서 노크하는 소리가 곧 들려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는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지나친 욕심을 부려서 삶을 풍요롭게 살려는 것은 나뭇잎의 꿀을 핥고 있는 나그네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나그네가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이고, 검은 쥐와 흰쥐 때문에 우물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면할 수 없는 미래의 전개될 상황입니다.

 

그래서 비록 천국을 향하는 순례자 나그네의 인생길은 짧고 험악할지라도, 사회적 위상의 신분을 가지고 어떻게 삶을 살아온 <행적의 보고서>만은 준비하여 주님을 뵈올 때 보여 드려야 합니다. 마치 농부가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김 메고 거름 주어 땀 흘리며 일한 보람으로 가을철에 풍성한 열매를 추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구체적 <결실열매의 보고서>는 ⑴. 신앙생활, ⑵. 복음 증거의 삶, ⑶. 이웃 형제 사랑, ⑷. 후배들이 고생을 덜게 하는 社會正義 실현을 위한 고투 여하,⑸. 사회정신 문화(참과 진실)를 진작케 한 실상 등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니 우리들의 사회적 위상을 늘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가는 순례자의 처지인지라, 인생의 거친 들에서 환란의 비바람이 모질게도 불어도 천성의 순례자들은 목적지인 본향을 향해야 합니다.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지만, 그 괴로움으로 인해서 천성을 향하는 목적의식은 더욱 선명하기에 이지러짐이 없이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신분과 위상에 걸 맞는 사회적 처신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와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라고 신자의 사회적 삶의 처신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AD 64년경 로마 네로 황제 치하 당시, 유대민족이 흩어져 살던 때에 박해를 받으면서 살던 시대이었습니다. 또한 근거 없이 “악행을 하는 새로운 미신 자들”이란 오해를 받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신자들을 食人種이라고 비방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것은 내 몸이라, 이것은 나의 피”(마26:26-28, 요6:53-58 참조)라고 하신 성만찬 때 말씀을 곡해한 것이었습니다. 이외도 신자들의 애찬(Love Feast)을 음탕한 회합이라고 했으며, 믿는 아내와 믿지 않는 남편 사이에 말썽이 생긴 것을 신자들은 가정의 파탄을 일으키는 자들이라는 혐의와 로마 황제의 화상에 절과 분향하지 않는 것은 신자들의 불충한 것이라고 위협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 선교 받던 때부터 지금까지 별스런 누명을 흔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독자들의 마음과 삶이 향긋한 복음의 향기를 풍기면서 사회윤리 도덕적으로 선한 모범을 실천하는 길 밖에 없다고 사료됩니다. 이방인들로부터 오해와 비난 받게 되는 것도 신경 쓰이지만, 사실적으로 비난 받을만한 사회적 처신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고, 복음 선교의 거침돌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천성을 향하는 나그네인 기독자들은 소극적으로 육욕을 제어할뿐더러, 적극적으로는 선행에 힘써야 합니다. 구차한 변명 따위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곧 그 비방이 사실이 아님을 여실히 보일 수 있는 아름답고 참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철학자 플라톤(Platon)이 어떤 사람이 자기를 비방한다는 말을 듣고, “그러면 아무도 그의 비난을 참으로 생각지 않도록 내가 잘 살아야 하겠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렀습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는 말씀이 정답입니다. 우리가 사회적 삶의 처신을 이렇게 살도록 합시다.

 

4). 결론: 우리 기독자들의 실존적인 인생의 삶은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 나그네이면서, 동시에 현실 세상에서는 사회적인 位相의 신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말고 有限的 삶속에서 無限한 彼岸의 본향을 생각하여, 너무 此岸의 삶에 집착하여 욕심을 부리며 육체적 정욕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가는 순례자의 처지인지라, 인생의 거친 들에서 환란의 비바람이 모질게도 불어도 천성의 순례자들은 목적지인 본향을 다소곳이 향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지만, 그 괴로움으로 인해서 천성을 향하는 목적의식은 더욱 선명하기에 이지러짐이 없이 전진토록 합시다. 따라서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 인생은 영원한 내세의 준비를 위해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실천하도록 처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불신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아서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릴망정, 비난과 조소꺼리는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소극적으로 육욕을 제어할뿐더러, 적극적으로는 선행에 힘써야 합니다. 구차한 변명 따위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곧 그 비방이 사실이 아님을 여실히 보일 수 있는 아름답고 참된 삶을 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