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몸으로 행하는 믿음
(본문: 약 2:14-26)
1. 서론: 우리가 2,000년 전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어떻게 현재 우리들의 삶에서 실감할 수 있겠습니까? 성서를 읽음으로, 문학작품이나, 아니면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의 審美的인 媒介體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들의 삶을 거기에 참여 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현재화란 관념으로도, 교리로도 될 수가 없다고 사료됩니다. “아니! 그것은 오직 우리들의 몸으로!” 우리들 몸에 어떤 형태로나 그리스도의 ‘흔적’을 받음으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과의 共同體가 되는 일입니다. 참 사랑하는 우리들의 그리스도라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떼어내는 아픔>, 그 것 때문에 계속 상처를 받고, 수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안에서 생생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수난은 구체적으로 형제를 위해서, 正義를 위해서, 후퇴나 타협이 없을 때, 즉 十字架가 우리들의 현실이 될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배신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때, 실감날 수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의 <몸으로 행하는 믿음>을 堅持할 때, 體感할 수 있다고 느껴서 이 문제를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드디어 본문은 야고보서의 주제인 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울의 ‘以信得義’에 대한 야고보서의 행함과 어떻게 조화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대립은 피상적으로 그치고 깊은 정신적인 면에서는 신약성서의 대강령이 兩者에게서 흐르고 있습니다. 본문은 (1). 행함이 없는 믿음(2:14-20)과 (2). 행함이 있는 믿음(2:21-26)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 행함이 없는 믿음(2:14-20): ①.낱말해석-⑴. “그 믿음”(ἡ πίστις) - “그 믿음도 믿음이냐?”라고 강한 반발을 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야고보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들은 유일 신관을 고백하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2:19) 이런 교리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엄격한 의미에서 ‘믿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불신앙의 삶을 뉘우치면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여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행함은 자연히 따라 오는 법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그 믿음’은 엄격하게 말해서 믿음이 아니라, <소위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⑵. 2:15-16- “만일.......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평안히 가라.” -우리 속어에 “헛된 인사는 냉수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섹스피어는 “열매 없는 친구가 있느니 보다, 차라리 원수가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의 실례를 들고 있는 내용입니다.
⑶. 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믿음이란 단지 지적으로 신조를 이해하고, 교회의 의식을 준수하는 것으로 다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 믿음의 얼이 통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살아있는 믿음이란 것입니다. “그 자체”라는 낱말은 옛날 번역엔 <홀로 있어, being alone>라고 되었으나, ‘그 자체’라는 지금의 번역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란 것입니다.
⑷.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한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은 행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함에,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은 별도로 따로 있지 않다.”고 답변한 것입니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믿음은 보이는 행함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약2:18.은 믿음이 전제조건이며,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결코 믿음을 도외시한 윤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 행함이 있는 믿음(2:21-26): 지금까지(2:14-20)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치 없는 것이란 것을 논하고, 이제는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행함이 있는 믿음의 전례를 들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증으로 아브라함과 ‘라합’을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조상이요, 하나는 이방의 여인, 하나는 위대한 신앙의 영웅이요, 하나는 비천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그들은 양 극단의 인물이지만, 공통점은 믿음이 행함에서 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⑴. 2:22. -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믿음은 행함을 도왔고, 행함은 믿음을 완성시켰다는 뜻입니다. 하여간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선명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에서 난 것이지, 단지 율법적이거나, 수양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것입니다.
⑵. 2:26.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본문의 결론인 것입니다. 믿음이 행함의 근원이므로 <믿음을 영혼, 행함을 몸>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점은 어느 것이 영혼이냐는 것이 아니고, 영혼과 몸의 連結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과 행함이 겸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영혼”(πνευ̃μα)은 “바람”이란 뜻이므로, 본문의 의미는 “호흡이 떠난 몸이 죽은 것”이란 말입니다. 인간성의 3분설에 의하면, 사람은 영(πνευ̃μα), 혼(ϕυχὴ), 몸(σω̃μα)로 나누어 집니다.(살전 5:23.) 이 경우 靈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성의 최고의 부분을, 魂은 육적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영혼>은 위의3분설에서 지적하는 영과 혼을 연결시킨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 필자가 위에서 낱말해석 중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는 말씀은 본문의 결론인 것을 언급했습니다. 또한 믿음이 행함의 근원이므로 믿음을 영혼, 행함을 몸의 영역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어느 것이 영혼이냐는 것이 아니고, 영혼(믿음)과 몸(행함)의 영역이 서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처럼, 믿음과 행함이 겸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바울신학에서 말하는 以信得義의 믿음(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리스도께 신뢰, 충성, 감사 및 사랑의 반응을 말함.)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 성서말씀 묵상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영혼(믿음)과 몸(행함)의 연결처럼, 믿음과 행함이 겸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에 착안해서, <몸으로 행하는 믿음>이란 제목으로 본문설교 디자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선 ‘몸’에 대한 설명부터 좀 해봅시다. 몸은 사람의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곧 몸>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살도 피도 아니며, 영혼도, 정신도 아닙니다. 몸은 靈과 肉의 結合體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이미 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몸은 어떤 요소들이 합성되어 구성된 것도 아니며, 따라서 몸을 分解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관계된 기능의 개념들인 知性, 感情, 意志, 精神, 物質, 生理, 良心, 魂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관념적인 分類이지 독립될 수 있는 實在도 아니며, 몸의 部分도 아닙니다.
몸, 그것의 기능은 전체로서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分離시키면 이미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몸은 곧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곧 삶인 것입니다. 몸은 삶 자체이기에 구체적이나, 그것은 해소될 수 있는 구체성도, 어떤 것에 依存될 구체성도 아닙니다. 귀는 듣고 눈은 보고 코는 냄새를 맡지만, 외적인 것에 대한 조건반사 작용을 할 뿐입니다. 몸은 主體로서 스스로 客觀化할 수 있고, 객관화 된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버릴 수도 얻을 수도 있는 取捨選擇의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은 獨尊的입니다. 몸은 구체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時空의 영역의 한 복판에 존재하면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몸은 삶이고 그 삶은 人格의 영역입니다. 인격은 思辨的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몸으로서만 가능하며, 너와 나의 삶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며 같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모든 것이 인격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思辨으로 알 수 없으며, 사변으로 分化될 수도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양상을 역사적인 견지에서 살펴봅시다. 기독교는 서구의 헬레니즘의 영향에 의해서 二元的인 思考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삶>을 遊離시켰으며, 따라서 신앙행위를 자연적인 삶과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改新敎에 와서 더욱 극단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복종한다는 것과 직결시키므로, 복종은 그저 귀로 듣고 ‘아멘’하면 된다는 잘못을 일으키게 했으며, ‘믿음’으로라는 것은 소위 靈的 또는 內的인 신뢰라고만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현실의 삶과 믿음을 유리시켜 二元的인 平行을 긋게 했으며, 신앙생활을 무능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Schleiermacher에 이르러, “신앙은 絶對依存의 感情”이라고 하면서, 理性과 感性으로 구분하고 신앙행위는 감성에 속한 행위로 보았습니다. 이런 사상이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전수되어 믿음과 삶을 유리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日帝治下에서 삶의 많은 영역을 약탈당한 우리 민족은 삶을 두 갈레로 갈라 놓게 되어, 신앙은 그 중의 靈的인 삶만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地上의 삶은 소망이 없으니, 彼岸的인 것만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此岸 的인 현실에서의 逃避이었으며, 기독자의 이런 이중적인 삶의 태도는 내적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1950. 6. 25. 사변으로 또 한 차례 믿음과 삶이 유리되는 신앙의 양상을 겪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간 靈은 彼岸과의 관계에서, 몸은 此岸과의 관계에서 二元的으로 달려왔으나, 이젠! 기독교는 <생활의 종교>로서,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기독교 신앙’으로 정착해야 하겠습니다. <몸으로 행하는 믿음>에로 환원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앙은 기도의 힘, 말씀의 힘, 성령의 힘을 강조해 왔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몸이 參與하는 신앙생활을 첨가하여 기독교 신앙을 一元化해야 하겠습니다.
몸은 원래 하나님과 사람과의 만남의 장소이었습니다. 靈도 肉도 아니라 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느 부분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전체로서의 인간, 곧 <몸>을 상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전체 <몸>으로써 하나님을 위한 삶에로 결단할 때, 본래의 <나>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래서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우리들을 사셨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가장 바람직한 믿음과 행함이 조화된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영혼(믿음)과 몸(행함)의 연결처럼, 믿음과 행함이 겸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 야고보서 본문의 결론입니다. 오래 동안 바울신학에서 말하는 以信得義의 믿음인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리스도께 신뢰, 충성, 감사 및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습니다. 또한 몸으로 행하는 믿음에 대해서는 등한시 해 왔습니다. 그래서 靈은 彼岸과의 관계에서, 몸은 此岸과의 관계에서 二元的으로 달려왔습니다.
이젠! 기독교는 <생활의 종교>로서,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기독교 신앙’으로 정착해야 하겠습니다. <몸으로 행하는 믿음>에로 환원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앙은 기도의 힘, 말씀의 힘, 성령의 힘을 강조해 왔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몸이 參與하여 행동화하는 신앙생활을 첨가하여 기독교 신앙을 一元化해야 하겠습니다. 영적으로 주님과 교통하면서, 몸으로는 믿음의 도리를 삶속에서 실천하는 기독자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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