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바울 삶의 마지막 정리
(본문: 빌레몬서 8-10)
1). 서론: 1948년 초등학교 3년 때에, 고향 경북 豊基에서 대구로 이사를 올 때, 처음으로 기차여행을 한 기억이 아련히 터 오릅니다. 당시 여행교통 수단은 기차뿐이었습니다. 기차시간도 정확치 않아서, 정거장의 대합실에 가서야 알게 되고 차표를 사서, 기차를 기다리는 곳이 대합실이었습니다. 豊基에서 中央線경유지요, 중요한 역인 安東(물, 석탄 공급, 기관차 교체, 출발지)에 내려서, 하루 밤을 대합실에서 지새우다가, 이른 새벽에 永川까지 타고 가서, 大邱線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서 永川 정거장 대합실에서 또 기차오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공항과 고속Bus 대합실이 다소 사람들이 부적거릴 때가 있지만, 그 때는 기차 정거장 대합실이 분잡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탈 기차가 오면,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곤 하였습니다. 오늘 설교 준비를 위해 명상하는 중, 이 기차 정거장 대합실의 어릴 때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거개(擧皆) 인생 자체가 地球라는 待合室에서, 우리는 韓國의 大邱라는 待合室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국행 저마다의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에 있습니다. 노벨문학작품 프랑스의 사무엘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런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떠나기 전 삶의 정리를 깨끗이 정리를 하자는 것이 오늘의 메시지 요지입니다.
2). 본론(Text): ①. 빌레몬서의 要旨-빌레몬서는 바울이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도주한 노예 오네시모를 그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의 용서를 구하는 일개 私信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서신은 웅대한 바울의 신학을 뒷받침하는 그의 완전한 인격 또한 윤리를 보여줌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보여 집니다. 실로 이 짧은 서신에는 바울이 일개 브루기아( Phrygia,지금의 터키 지역)의 노예를 구하기 위한 정성을 다하고, 예의 절차를 다하는 깊은 사랑이 풍겨있습니다.
이처럼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중간에서 그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바울의 모습에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이 서신의 목적은 지극한 그리스도인이 사랑과 지혜로 수행되었으며, 놀라운 심리적 技工으로 이룩되었으며, 그러면서도 사려 깊은 겸손, 번득이는 재치 및 교묘하고 불가항력적인 방법으로 사도의 권위를 희생됨이 없이 이루고자한 목적 성취를 했기에, 1장 밖에 안 되는 서신은 그 고전적 순수성과 우아성과 더불어 고대서신 중에 걸 작품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②. 로마시대의 노예제도-빌레몬서의 주제가 ‘오네시모’라는 노예문제에 관한 것이므로, 본문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사회의 노예제도를 熟知할 필요성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⑴. 로마는 전무한 방대한 판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함으로 그 노예제도도 거창했습니다. 당시 로마도시에만 노예수가 65만 명이나 되었으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⑵. 노예가 되는 원인은 빈부차가 심한 당시인지라, 부채를 갚지 못한 채무자가 팔려가는 경우와 보다 큰 원인은 로마의 무력이 대단하였으므로, 전쟁으로 패전한 국가, 사회의 자유민이 무조건 노예로 포로가 되는 경우이었습니다. ⑶. 그래서 사로잡혀간 노예들은 일체의 노무에 종사하였는데, 야만인은 광산, 농장으로, 헬라인은 노예가 되어 로마시민 가정 일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⑷. 노예생활은 인권과 인격이 완전히 박탈당하여, 가축이나 상품으로 전락하였던 것입니다.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달려있었습니다. ⑸. 노예제도가 사회윤리도덕에 영향된 것은 자유 로마인들은 유흥과 사치에 흥청거리었고, 주인에 대한 노예들의 원한과 복수심을 유발케 했으며, 가정에서는 주인과 여종, 여주인과 남종간의 성적인 紊亂(문란)으로 자녀교육 문제에까지 파문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⑹. 이런 노예제도의 죄악상을 초대교회가 미온적이었던 것은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상으로 단지 내면으로 도덕적인 감화에만 급급했습니다. ⑺. 점차 복음 선교가 로마사회를 지배하게 되자, Constantine 大帝가 그리스도교를 공인 후엔 노예제도 폐지로 진전했던 것입니다. 이런 노예제도의 개선과 철폐는 본문 말씀의 교훈이 지대한 영향을 주어서, 인권과 인격의 진정한 평등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③. 본문 해석-⑴. “많은 담력을 가지고”-<담력,παρρησία>이란 신약성서에서는 언제나 언론에 연관시켜서 “언론의 자유”를 표시하며(고후3:12, 빌1:20, 살전2:2, 참조), 여기서는 자신감을 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옳은 일 또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기탄없이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담력은 신앙관계에서 자라난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바울의 연령에 무게를 둔 소청, 바울과 빌레몬과의 師弟之間의 관계, 바울의 사도의 권위, 그리고 빌레몬의 회개는 바울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얻게 된 것 등을 고려 할 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도록 명령할 바울의 근거가 있었지만,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간청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⑵.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마땅한 일, τὸ ἀνῇκον>은 원래 “올려놔야할 일” 또는 “도달하여야 할 일”의 뜻입니다.(엡4:4, 골3:18 참조) 여기서는 반드시 성취하여야 할 어떤 수준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도망간 노예를 형제로 受容한다는 것은 당시의 윤리수준으로는 마땅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높은 윤리관에서 볼 때, 그것은 지나친 요구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의무였던 것입니다. 이런 차원 높은 윤리수준에 선 바울에게는 제자인 빌레몬에게 마땅히 명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⑶.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도리어, μα̑λλον>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권위에 의한 명령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교 윤리의 기본 강령인 것입니다. 사랑의 호소는 권위적인 명령보다 언제나 강력한 법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공하는 길입니다. 교회가 그 권위 또는 권리주장에 기울어질 때, 혼란과 부패가 따르기 마련이기에, 사랑의 진정성이 교류될 때만이 평화와 부흥이 약속되는 것입니다.
⑷.“나이 많은 나 바울은”-<나이 많은, πρεσβύτης>는 <사신, πρεσβεύτης>와 글자 한자의 차이므로 이를 엡6:20에 비추어 使臣(ambassador)의 뜻으로 보는 학자가 있으나, 우수한 사본들은 압도적으로 前者로 되어 있으므로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더욱이 지금 바울은 권리적인 명령이 아니라, 사랑의 호소를 하는 마당이니 前者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면 이 때 바울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는 “젊은이”(νεανίας)라 불리었습니다.(행7:58)
그때(31년경)의 그의 나이를 24 세로 치면 이 때(62년경)의 나이는 55세가 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그의 나이를 60세 이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을 죽일 때, 그가 행사한 투표권(행26:10)이 만일 산헤드린 공회의 것이었다면 그 때 바울의 나이는 더 많았을 것이므로, 아마 60세를 넘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사용된 낱말(πρεσβύτης)은 49-56세를 가리키고, 그 이상의 노인에게는 γέρων(늙은이)을 썼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하여간, 바울이 자기 나이를 자랑한 것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주님 밖에 자랑하지 않기로 하고(고전1:31), 그 외의 모든 육적 조건을 배설물처럼 내어버린 그에게 있어서(빌3:8), 나이 자랑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본문에서 나이를 거론한 것은 ‘오네시모’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의 나이를 들먹이면서까지 권위를 세운 것은 오네시모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얼마나 숭고한 그의 삶의 마지막 사랑의 發露가 아니겠습니까!
⑸.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나이 많은> 무게(위엄, 권위)에다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무게를 첨가하여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여 형제처럼 받아 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제자 빌레몬에게 한 노예(당시 노예 신분을 고려할 때)를 위하여 엄청스런 부탁을 하는 노 사도의 겸손과 간곡한 愛情은 오직 ἀγάπη(희생적인 사랑)로만 이해 할 수 있는 태도와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자! 이제 성경 본문 말씀은 여러분들이 다 익숙히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생략 하겠습니다. 다만 Paul은 Roma 獄中이란 대기실에서 천국행 자기 기차를 기다리면서 마지막 자신의 생을 정리합니다. 거기서 마지막 意味있는 삶을 顯微鏡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의 사건, 제1, 2, 3차 전도여행 및 로마서를 비롯한 他 書信들은Paul의 삶을 확대하지 않아도 너무나 괄목할 擴大鏡과 望遠鏡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본문의 내용은 지극히 私的이요, 微微한 사건의 삶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의 삶을 구원키 위한 애절한 <Paul의 마지막 생의 정리>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보다 다르게 이 편지 내용을 이렇게도 쓸 수도 있었습니다. <“스승인 나 바울은 弟子인 빌레몬 그대에게 주 안에서 담대한 심정으로, 當然之事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命令할 수 있는 位置에 있는 나요! 더욱이 나 바울은 使徒요. 그것도 로마 獄中에서 一片丹心 주님 향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순교의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 많은’ 老 使徒의 權威로 부탁할 수도 있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빌레몬!”,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선한 목자의 心情으로 당부하는 것이요.” 이런 심정으로, 말하는 바울의 內面은 한 심령을 살리려는 애달픈 사랑이었지만, 사랑엔 언제나 고통이 동반하는 것도 알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 <마지막 생의 정리>는 有限한 인생이, 限界狀況에 직면해서 어차피 격어야 할 과제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지, 지금 우리들의 <대합실 속>에서는 중병에 신음하는 자도 더러 있고, 지금은 건강하지만, 혹여 중병에, 특히 치매나 Cancer(암)에 걸리지나 않을까, 전전긍긍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 South Cook Country 정신병원 가정의학과 여의사 Elisabeth Kubler-Ross 박사가 '암' 연구소를 통해서, <암 환자의 죽음에 이르는 심리적 5단계>를 1970년대 재미있게 소개한 저서(On Death and Dying)가 있습니다.
제1단계: 부인과 고립(First Stage: Denial and Isolation)=환자는 <암>이라는 진단을 부인(否認)하면서 오진(誤診)이라고 화를 낸다고 합니다. 제2단계: 격노(Second Stage: Anger)= "나는 윤리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해 왔는데, 하필이면, "왜 내냐(Why Me!)"라고 하면서 격노한다고 합니다.
제3단계: 협상(Third Stage: Bargaining=백화점 바겐세일)=오페라 가수이면, 의사에게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고 싶다고, 생명연장을 애원한다고 합니다. 또는 하나님께 "자녀들의 결혼식 때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도 협상을 한다고 합니다. 제4단계: 우울증(Fourth Stage: Depression)=1).비관적으로,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앉아 있게 된다고 합니다.
제5단계: 수용(Fifth Stage: Acceptance)=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가족과 의사에게 잘못했던 것을 사과하면서, 즐거웠던 일들을 회상하곤 한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죽은 후에, 가족들의 염려, 행복을 빌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나의 긴 旅行을 위해 나는 준비가 되었다!"("I am ready for my long journey.")고 차분히 수용한다고 합니다. <생의 마지막 정리>는 이런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히티는 "오늘이 나의 최초의 날인 것처럼, 또한 최후의 날인 것처럼 살라."고 했습니다. 최초의 날은 삶의 <감격>이 있습니다. 최후의 날은 삶의 <엄숙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여러분! 각자 우리의 사정에 따라, 종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은 나의 형편을 묻지 않고, 이미 내 속에! 내 삶 속에! 내재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이 세상에 올 때 보다, 내가 살고 간 이 세상이 나로 말미암아 더 좋게 만들고 가려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밀림의 정글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으로서의 미덕과 가치들은 쉽게 외면당하고, 약자의 죽음은 은폐되고, 강자의 독식은 합리화되며, 비겁하게 타협한 자의 출세는 지혜롭다 칭송을 받고, 의롭게 저항한 자의 몰락은 무모하다고 폄하당하는 현실!, 탐욕이 선이라 말함에 이제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의 가치관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런 文化的 분위기 속에서, 淸淨이 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의 확대 지향적 삶에서(목회=교회성장), 지금은 대합실의 삶인 축소 지향적 삶>을 살지라도, 멍하게 살 것이 아니라, 顯微鏡으로 자신의 삶을 擴大해서 보면서, 근원적 善意에 살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이 벌써 우리 실존적 삶 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여류 詩人이었던 에밀리 딕킨슨의 詩 중에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If I Can Stop on e Heart From Breaking)라는 詩가 생각납니다.
내가 만일 한 상처 입은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내 삶은 결단코 공허하지 않으리./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진정시켜 주거나/또는 한 괴로움을 시원케 주거나/또는 할딱거리는 로빈새 한 마리를 도와주어서/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내 삶은 정녕코 허무하지 않으리.
디킨슨의 시처럼, 죽어가는 새 한 마리를 살릴 수 있다면, 아니! 어떤 한 사람의 상처 입은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 현재 인생살이가 근원적인 선의(善意)로 돌아가, 어떤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意向에 맞는 일이니,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안심해도 좋을 것입니다. 언제 내 인생의 종말이 와도 두렵지 않게, 유감없이, <受容-Acceptance>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4). 결론: 오네시모는 Paul에게 있어서는 근원적 마지막 선의였습니다. 언제 汽車가, 베케트 표현대로 ‘고도’(God)의 부름이 올지 모르기에 마지막 생의 정리요! 의미였습니다. 지루하다고 생각지 말고, 내 삶의 마지막 정리를 하는 生은 나를 <엄숙함>과 <진지함>으로 안내합니다. 오늘이 나의 최초의 날인 것처럼, 또한 최후의 날인 것처럼 살아 봅시다.그래서 감격과 엄숙성 속에서, 축소 지향적 삶(타인이 자신을 볼 때는 미미하다고 하지만, 顯微鏡을 통한 자신의 삶을 보는 視覺)인 저마다의 마지막 생의 아름다움(有終의 美)이 있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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