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경우를 초월한 삶
(본문: 마 5:38-48, 눅 6:29-30)
1). 서론: 본문에 대한 원래 제목은 <“억지 춘향으로 행함보다,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주자!”>입니다. 그러나 제목이 너무 길어서 우선 표제로 “경우를 초월한 삶”이라고 붙여 놓았습니다. 이 긴 제목의 뜻을 간단히 풀이하면 “경우를 초월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억지 춘향으로 행함보다,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주자!”라는 우리나라 속어의 개념이 우리 가슴에 쉽게 와서 닿고, 매력적이어서 다음의 글 전개는 긴 제목 그대로 인용하여 풀이해 나가겠습니다.
‘억지 춘향’이란 말의 본뜻은 <고대 소설 ‘춘향전’에서 변 사또가 춘향에게 억지로 수청을 들게 하려고 구슬리고 어르다가 끝내는 핍박까지 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이런 의미가 전용(轉用)되어 <안 되는 일을 억지로 우겨서 겨우겨우 이루어지게끔 만든 일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억지 춘향으로’의 꼴로 쓰여, 원치 않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선을 보고 싶지 않았으나 부모님의 성화에 억지 춘향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 라는 경우입니다
억지 춘향에 대한 반대되는 개념으로,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학사전에서 풀이하기를 <미울 수록 더 정답게 대해야 미워하는 마음이 가신다는 말>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 하라.”는 말씀의 뜻은 순 우리 말로 <억지 춘향으로 보다,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주자!>라는 말이 실존적으로 우리 가슴에 더 쉽게 다가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본문의 총체적 의미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보복하지 말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복수(復讐)법’에 대한 교훈으로 무저항주의를 재창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복수 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복수하라.”(출 21:22-25, 레 24:20, 신 19:21) 는 말씀 등은 보복을 정당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세상은 보복법 하에 이었습니다. 모세율법, 함무라비 법전(주전 1750년 무렵에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 및 로마법이 모두 행한 대로 받기 마련이었습니다.
악한 자로부터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는 것(오른뺨), ‘재산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속옷), ‘인격적으로 자유’가 유린당하는 것 등이 보복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라는 것은 악한 자를 상대하지 않는 마음의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에 무관심 하라는 것이나, 악에서 도피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시정하려는 진정한 방법을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는 것은 송사하여 취하려는 자에게 더 주라는 뜻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의미입니다. (살전 5:15, 벧전 3:9)
유대인의 속옷은 통으로 짜고, 겉옷은 네모난 것으로(요19:23) 낮에는 입고, 밤에는 이불 대신으로 덮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겉옷은 전당(典當) 잡았을 경우, 밤이 되면 돌려주게 되었습니다. (출 22:26-27, 신 24:10-13)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라.”라는 말씀은, 특히 <억지로>의 헬라어 άγγαρευω(앙가류오)는 군사용어입니다. 한 마디로 강제 차출(差出), 강제의 징용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정부에서 특명을 받은 전령(傳令)이 목적지로 갈 때,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강제로 말(馬)이나 사람을 징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 병사가 구레네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한 것(마 27:32, 막 15:21, 눅 23:26)은 바로 ‘앙가류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자기 의사와는 다르게 로마 병사에 의해 징발되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구레네 시몬은 자기 십자가가 아닌, 주님을 위해서 진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졌지만, 큰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의 예수님 말씀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윤리, 도덕률로서는 반발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보복은 독이요, 싸움은 싸움을 가져오는 연쇄반응의 악순환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보복함으로써 악한 자가 참사람이 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비겁한 굴복을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죄악의 근본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굳은 예수님의 신념이었습니다. 그것이 갈보리 산 십자가에서 실행하셨고, 끝내 승리하셨습니다. 사실이지 5리를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의무요, 책임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저마다의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의식이 투철할 진데, 이다지도 우리 사회에 범죄 사건이 범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솔직히 국민의 의무도, 사회공동체의 책임도 수행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의무와 책임 의식만으로는 풍요로운 국가 사회로 발전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설사 책임완수를 잘한다고 하는 그곳엔 냉엄한 규범밖에 없습니다. 법과 규범을 잣대로 하고 사는 공동체 속에서는 ‘네 떡 네가 먹고, 내 떡 내가 먹고 살자!’고 합니다. 그곳은 언제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므로 그 인간 사회는 살만한 사랑도, 감격도, 보람도, 행복감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왼뺨도 돌려대는 자’, ‘겉옷을 돌려주는 자’, ‘10리를 동행하는 자’가 숨어서 말없이 희생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일제 강점기 시대의 애국지사들과 순국열사들이 없었다면, 광복의 해방과 자유를 그나마 누릴 수가 있었을까요!
이 순간도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람이 인류, 국가, 사회와 자기 조국을 위해서 밤잠을 설치면서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과학자들! 밀림과 열사(熱砂)의 나라 아프리카에서 복음 선교를 위한 인종과 고투 속에서 자신을 순(殉) 하는 선교사들! 대한민국의 국군장병들, 경찰관들, 소방관들 및 각계각층에서 국가 사회의 정의와 안위를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그들 중에는 왼뺨을 돌려대며, 겉옷까지 주면서, 10리를 동행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교훈의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다 겪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 침을 뱉음을 당하시면서도 그 모든 모욕을 다 잠잠히 참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석벽을 올라가시면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하듯이, 우리를 위해 그 어려움을 다 감수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며 속죄의 대업을 성취, 승리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세상의 원리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우리의 삶을 주님을 위해서, 또한 이웃을 위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주님이 남기신 고난의 유산을 우리 몸소 짊어져야 하겠습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한 <억지 춘향으로 행함보다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주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기독 신자의 삶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그간의 터득한 지식, 재물, 명예, 건강, 나의 영향력 등은 바로 이웃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것입니다. 청지기의 사명을 다하여 아낌없이 도움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어느 날 한가하게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문둥병 환자 같은 그런 분이 적선(積善)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는데 공교롭게도 한 푼의 돈도 없는 그런 처지이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과 표정을 지으면서, “정말 미안합니다. 형제여! 내가 지금 가진 것이 있으면 꼭 도와주고 싶은데, 사실 제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진심의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거지는 만족한 얼굴을 가지고, “아닙니다. 당신이 나에게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악수를 했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저는 큰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서는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톨스토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물질만 주는 그것이 선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큰 감격과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는 억압받는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게 되고. 경건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년에 불후의 명작인 “부활”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10리를 동행한 결과입니다.
자! 이제 그 반대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섹스피어의 명작인 ‘베니스의 상인’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니스의 유명한 상인인 샤일록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샤일록은 안토니오란 사람에게 돈을 꾸어 주면서 돈을 갚지 않으면 살 1파운드를 제공해야 한다는 증서를 썼습니다. 후에 안토니오가 돈을 갚지 못하자, 샤일록은 재판을 신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판결로 샤일록은 재판에서 패소하고 맙니다.
지혜로운 재판장은 만약 살을 베다가 1파운드보다 더 베면 당신의 몸도, 심장도, 그렇게 벤다고 할 때, 그것을 두려워한 샤일록은 감히 살을 베지 못하고 물러가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 살을 한번 만에 1파운드만 벨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이 소설은 유대인의 율법적인 원칙주의와 복수심이 얼마나 잘못된 것임을 풍자한 소설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한 율법의 말씀에 대하여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법인 ‘사랑’으로 행하라는 말씀의 교훈입니다.
이제 우리는 날카로운 의무와 책임 의식에서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서, 주고도 더 못 주어서 안달하는 그런 사랑의 마음과 행동으로 교회 생활을 하면서, 불신 이웃에게 이런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억지로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사는 기독 신자의 삶이 아니라, 그야말로 <억지 춘향으로 행함보다,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주자!>고 하면서, 생활 신앙인의 모습을 그 본보기로 보여주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경우를 초월한 삶’입니다.
4). 결론: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과의 관계가 두려움과 공포의식에서 섬기는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웃과도 관계도 M. Buber가 말했듯이 나와 그것(I-It=비인격적 관계)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망극했기에, 그 사랑의 보답으로 하나님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도 D.Bonhoeffer가 말했듯이 형제인 ‘그와 나’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로 놓여 있기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의무나 책임감이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억지 춘향으로 행함보다,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주자!”고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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