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산상보훈의 서론적 교훈
(본문: 마5:1-12, 눅6:20-23)
1). 서론: 성경을 봉독하는 기독신자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산상보훈에 나타난 주님의 숭고하고도 심오한 교훈 앞에 경복(敬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의 전 교훈의 요약이라고 하겠습니다. “수백의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이다.”, “세계의 모든 문고(文庫) 중 최대의 다이몬드이다.”, “모든 종교의 서곡(序曲)이다.” 등등의 찬사를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산상보훈은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大憲章, Magna Charta, 1215년 영국의 John 왕이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 것으로 영국 헌법의 기초된 것)이라고 호칭되어지고 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그의 평생에 산상보훈을 애독하였고, 그의 생활철학이었던 “단식. 무저항주의(비폭력)” 는 이 산상보훈에 영향을 받아서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하기 위해 투쟁할 때도 이 산상보훈의 정신으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기독자는 이 주님의 교훈 말씀에 역행하는 삶을 얼마나 살았는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 본론(Text): 이 상산보훈이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어느 시기에 말씀하신 것이냐.”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의 소위 5대 교훈집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보훈(5-7장), 제자파송의 교훈(10장), 천국비유(13장), 겸손과 용서의 교훈(18장),및 예루살렘에서의 최후의 교훈(23-25장) 중에서, 순서와 내용을 보아서 역시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初期)라고 하겠으며, 누가복음에 나타나있는 것은 마태복음의 산상보훈과 동일한 교훈(6:20-49, 11:33-36, 12:22-34)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한 것이라고 봅니다.
본문 제2절에 “입을 열어”라는 이 말씀의 표현은 지금 우리들의 일상적인 표현과는 같이 않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히브리인들의 표현법에는(시78:2, 행8:35, 10:34) 함부로 지껄이는 경박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계획성 있는 중대한 발언(發言)을 할 때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입을 열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기 “입을 열어”하시는 말씀의 뜻을 비유로 설명하자면, 온갖 보석류(寶石類)를 산적한 보고(寶庫)의 무거운 철문이 무겁게 열리기 시작하고, 그 속에 있는 보석의 광채(光彩)가 문이 열림으로 솟아나는 것을 연상시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 제3절에서부터 산상보훈의 본론인 8복(八福)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8복의 내용을 함축성 있게 요약해서 말한다면, 복음의 문전(門前)에 선 그 누구든지 그는 먼저 겸손한 심령을 가져야 하고, 그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애통이 필요하고, 그 결과로서 삶의 방향(方向, 方法)은 의(義), 정의(正義)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 의로운 삶을 사는 자는 남에게 긍휼을 베풀어야하고, 이런 과정에서 마음이 청결하게 되고, 사람사이에서 화평이 이루어지며, 최후로 의(義)를 위한 삶 때문에 박해, 핍박을 감수하는 최고도의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곳인 산(山) 이름을 밝히지 않음은 마태복음에 있어서는 외부적인 산 이름이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산상보훈은 어디까지나 그 내부에 실려 있는 교훈자체가 위대한 것이며, 유대적인 율법에 비해, 기독자들의 생활도덕률에 우리는 최대의 관심사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산상보훈의 마태복음 제5장은 기독신자의 생활원리, 제6장은 구체적 삶의 내용, 제7장은 그의 삶에 있어서 경계(警戒)해야 할 문제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산상보훈은 십자가를 통한 입신(入信)의 도리 같은 교리문제는 볼 수 없으나, 그것을 전제해서 신자의 실천적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생활의 종교’, ‘생활의 신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본론(Context): 이제 본문5:1절에 “무리를 보시고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상대한 말씀이었습니다만, 큰 대중을 향한 웅변(雄辯)의 말씀이 아니고, 조용히 앉아서 대화체(對話體)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꼭 이 산이 어느 산이냐를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말한다면, 일반적인 견해를 따라서 갈릴리 디베리야 북방 5리쯤에 있는 ‘헷틴산’으로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이 산은 둥글고 산정이 두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어서, 마치 이 산에서 설교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구분을 지우는 듯합니다.
지금도 이 산에는 백합화가 피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산에 올라가서 이 교훈을 주셨느냐는 우리들의 관심입니다. 확실히 예수님께서는 산을 좋아하셨고,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산과의 많은 관련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마15:29, 막 3:13, 6:46, 눅 6:12, 요6:3) 구약의 ‘시내산의 율법’은 우뢰성 속에서 축복과 저주를 엮은 것이었으나, ‘신약의 시내산’의 보훈은 평화로운 중에서 축복을 선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보훈(寶訓)이 또한 산에서 주어진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는 속계(俗界)를 거닐면서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때로는 그 속계를 떠나 산에 올라가시어서 세상 만물을 초연(超然)하게 보시면서, 제자들을 비롯해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주로 속세(俗世)에서 타락하는 인생들을 생각하시면서, 이따금씩 인간세상을 떠나 인간가치의 판단기준을 초연히 넘어서라는 교훈인줄 알고 있습니다.
‘나폴레옹(Napoleon)’이 개세(蓋世, 위력의 뜻)의 영웅이 된 것은 그가 소년시절을 ‘콜시카’의 산간인(山間人)으로써 높은 산봉(山峰)을 바라보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라는 역사가들의 말이 있습니다만, 확실히 산상(山上)에서 세상만사를 초월하는 심정으로 이 교훈을 읽고 이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불교를 위시한 모든 종교의 수도(修道)에는 산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중세 기독교의 수도원의 삶도 속진(俗塵)의 삶을 떠난 한적한 산에서 영혼의 수련을 닦았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지도급에 있는 자들도 중요한 문제를 결단하고, 새로운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고요히 홀로 산이나 외딴 곳을 찾아가는 그 예를 자주 뉴스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이는 일찍이 예수님께서 홀로 산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교훈하신 그 원류(源流)에 준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마음 지칠 때마다 반드시 산이 아니더라도, 한적한 곳에 가서 오직 하나님만 향한 기도와 명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부단히 재생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단독자로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그 순간은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독은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같이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교훈을 설교하신 그 말씀의 내용은 시중(市中)에서 경박하게 지껄이는 잡다한 말의 향연(饗宴)소리와는 구별된 것을 우리는 깊이 있게 주시해야 하겠습니다. 복음 선교라는 구실 하에,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그런 경박함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신중성과 복음전파의 방편으로 ‘귀 있는 자’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교훈도 얻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가다금씩 우리 마음이 복잡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했다고 생각되어 질 때, 산이나 한적한 곳을 찾아가서 자기 ‘인생의 근본문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문의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재정비하는 삶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겸허한 심정이 되어야 하고, 축복의 첫 출발은 회개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기독자의 의로운 삶을 살아서 불우한 이웃에게 선과 자비 및 긍휼을 베풀면, 이런 과정에서 ‘주는 자가 복'을 받게 됨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인간관계는 늘 평화스런 모습이어야 하며, 이런 의와 정의로운 삶 때문에, 주변에 더럽고 너절한 사람들이 <흰 빛을 시새움하기>마련이기에, 손가락질과 모함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모를 받을 각오 된 자에게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더 받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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