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아들의 통곡
(본문: 히5:5-10)
1). 서론: 우리나라 속어에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으면, 그 아버지는 그의 가슴에 아들을 묻고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륜으로서 아들의 기쁨, 슬픔, 아픔, 고뇌, 및 울음 등의 사랑하는 아들의 정서는 부모의 정서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저서 중의 제목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라는 책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Cross) 또는 고난의 신학(The Suffering of Theology)이란 용어 개념들도 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란 저서에서 배태된 것입니다.
몰트만의 "십자가의 달리신 하나님"이란 그 깊은 뜻을 풀이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일 처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한 것은, <피 흘리는 그 고통의 십자가를 인성적 차원에서 피하려는 요구>를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통해서 문의 하신 것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시고, 등을 돌려 앉으시면서 가슴으로 대성통곡하신 것으로, 그 아픔은 육체적 십자가를 지는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이기에, 그래서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이라고 표현했다고 생각해 봅니다.
몰트만은 현대 기독자의 신앙의 위기는 이중의 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 첫째는 ‘관계성의 위기’(The Crisis of Relevance)이고, 둘째는 정체성의 위기(The Crisis of Identity)라고 하면서, 이 두 가지는 서로 보완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본회퍼가 일찍이 말한바, 기독자와 교회는 타자를 위한 삶이어야한다고(Church for Others) 했듯이, 몰트만도 기독자의 타자와의 관계성의 위기를 말하면서, 교회와 기독자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하면서 ‘십자가 신학’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에 준해서, 하나님 아들인 그리스도의 통곡을, 아니 하나님 자신의 통곡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2). 본론(Text): 본문 낱말해석-(1). 5:6-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시편110편 4절의 인용구절을 첨가시킨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아론’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말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아론과 멜기세덱의 비교는 7장에서 상론하고 있습니다만, 아론의 대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면서 대조적이지만, 멜기세덱은 완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양자의 몇 가지 공통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ⅰ). 멜기세덱이 성서에 단 한번 나타나는 것처럼(창14:18), 그리스도의 제사장직도 단 한번으로 영원히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ⅱ). 그는 無始無終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오,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ⅲ). 그가 제사장인 동시에 왕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역시 대제사장이시오, 영원한 왕이시란 것입니다.
ⅳ). 그가 율법 이전의 인물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율법 이전에 계셨고,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마5:17) ⅴ).아론이 소와 양을 바쳤지만,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바쳤는데(창14:18), 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전성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2). 5:7-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 이 구절은 겟세마네의 고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마26:36-46) 인간의 처절한 운명에 참여하시고, 그 고뇌의 심연을 체휼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죽음에서 구원하심”이란 뜻은 ⅰ). 죽음에서 구원하여 죽음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요12:27), ⅱ).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되나, ⅲ) 위 2가지 뜻을 다 포함한다는 의미의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절대의 신뢰를 가지고 기도하신 것입니다.(막14:36) 또한 절실한 고통 중에서 구원을 절규하는 시편의 여러 구절들을 반영한 것으로 보겠습니다.(시39:12, 6:5-9, 9:13, 22:1-2, 28:1, 33:19, 56:13, 69:3, 116:8, 118:18 등) “심한 통곡”(κραυγη̑ς ἰσχυρα̑ς) 이란 크게 절규하는 것으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정황을 반영하는 뜻입니다.(눅23:46) 신약 성서에서 주님께서 3번 우신 것 중에 하나라고 사료 됩니다.
그 첫 번째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요11:35), 두 번째는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을 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눅19: 41),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우신 것입니다.(마26:39) 나사로의 죽음으로 우신 울음(δακρύω)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흐리시며, 인간의 처참한 한계상황에 대한 울음이요, 예루살렘 도성을 향하여 우신 울음(κλαίω)은 소리가 나는 애국의 눈물이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신 울음(κράζω)은 통곡으로서 신앙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3가지의 눈물은 신앙인격에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의 말씀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자격은 사람이어야 하고, 동시에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두 가지를 모두 충족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면서 인성(人性)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께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의 기도와 그 이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4복음서에 기록된 말씀과 동일한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심한 통곡>(loud cries)이란 말씀은 누가복음 23:46의 “...큰 소리"(loud voice)로서 십자가상의 절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3번 우신 것 중에 하나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의 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통곡하신 것은 보통 우리 사람들이 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사실이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처럼 우실 이유가 없습니다. 나사로가 죽기 전에 일직이 오지 못한, 때 늦은 안타까움도, 부활시킬 능력이 없어서 우신 것도 아닙니다.
유대교권자들의 죽이려는 음모로 겁이 나서도 아니며, 나사로 무덤 주변의 사람들을 위한 절망의 눈물도 아니 이었습니다. 요한복음12:33에 “심령의 통분”이란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성령의 울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통곡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인간들이 죽음의 공포 속에 떨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限界狀況에 대한 울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담 범죄 이후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실존에 대한 울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영원한 인간 죽음의 세력을 없이해야 할 하나의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주님은 책임감이 중차대한 것에 대한 울음이었고, 죽음 앞에 어쩔 수 없는 인간실존에 대한 울음이었습니다. 동시에 이울음은 그리스도만의 울음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천지의 주재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울음이었던 것입니다. 범죄자는 꼭 죽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사이에 일어난 애통한 울음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눅19:41에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신정정치의 수도로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경륜을 상징하는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큰 환희와 기대를 걸고 하나님의 아들을 맞이하여할 예루살렘이 일부 소수 민중뿐이었고, 당시 교권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것인가를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 결과로 예루살렘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예언을 하시면서 憂國衷情으로 우셨던 것입니다. 과연 주후 70년에 주님의 예고대로 로마군에 의해서 멸망을 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우신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상의 고통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간의 화목의 가교(架橋)역할을 하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이룩하여 인간의 죄악에서 영원한 구원을 해결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통곡하고 우신 것 입니다. 지금도 생명의 원천이시며, 빛의 근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들의 생기가 없이 시들한 당신의 자녀들 때문에 우신 다고 생각합니다. 21C. 대한민국이란 이 땅에서 당신의 종들이 세상의 빛의 투영은 고사하고 어두움의 자식모양, 세상 비난을 받기에 우신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MBC 뉴스 후’란 시사 프로그램의 일부 성직자들의 호화생활 때문에 상반된 반응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이 사실 자체 때문에 우셨으며, 또한 여러해 전에 ‘매스컴’에서 ‘명성교회 부자간의 대물림(교회 담임목사 세습) 사건’의 恥部露出로 하나님께서도 우셨다고 생각합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바 대로 ‘몰드만’의 기독자 신앙의 관계성의 위기와 기독자의 정체성의 위기에 대해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몰트만은 그의 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N. Y. Harper & Row, 1974), 12p.}에서, 교회와 기독자는 사회와 담장을 쌓고(ghetto화)있는 이 현실은 ‘뼈다귀와 화석화’가 되었다고 하면서, “만약 어떤 이들이 기독신자가 되고자하거든, 그를 교회로 보내지 말고, 빈민가(the slums)로 보내라. 그러면 거기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이다.”라고 질타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이 이런 호화판의 삶을 살 수 있느냐 말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옥탑 방에서 겨울철에 추위에 떨면서 목회하는데, 형용키도 부끄러운 호화판의 삶이 가능 한가 입니다. 이것은 ‘몰드만’까지 이야기 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 때문에 그런 통곡을 하신 것이며, 지금도 우신다는 것을 어찌 모르느냐 말입니다. 세상을 위한 관계성도 기독교의 정체성도 모르고 그런 호화판의 인생을 구가예찬하면서, 그것도 평신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이 그럴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통곡하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들까지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까지 담당케 하셨는데 말입니다.
앞으로 한국의 기독교와 기독자들이 이 민족의 또다시 여명의 아침을 열어주고 역사의 무대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몰트만’이 말한바, ‘세상을 위한 교회’(Church for World)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통곡을 그치시고, 기쁨의 영광을 받으신다고 봅니다. 아무리 자본주의 시장 경제 논리가 판을 쳐도 교회만은 배금사상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환언하면, 기독교의 정체성의 위기에서 <고난의 십자가 신앙과 신학>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주님께서 말씀하신 주릴 때, 목마를 때, 아플 때, 옥에 갇혀 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재천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사1:2-17, 마25: 31-46 참조)
노숙자가 즐비한 피선교자들이 고통하고 있는데, 일부 호화판의 성직자들이 환락의 생을 구가 예찬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공동체를 私有化하여 代를 이어 세습화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다시 통곡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정체성의 위기에 몰입되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하여금 통곡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성서에서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웃으셨다는 말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그 만큼 옛 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들이 그 분을 아프게 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4). 결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 아들에 대한 감사와 영광을 드릴지언정, 우리 때문에 통곡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피선교 대상자인 세상을 위하는 길이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물량주의적인 가치관의 일변도라고 해도, 우리 신앙의 정체성만은 <십자가의 신앙>라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윤리를 재확립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옛 선배 부흥 목사님들이 잘 부르곤 했던 <영문 밖의 길>이란 가사를 적어 봅니다. 은혜가 되길 바랍니다.
1.서쪽하늘 붉은 노울 영문 밖에 비취 누나/언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영문 밖의 길이라네/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신 자국마다/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간악한 바리새인 포악한 로마병정/걸음마다 자국마다 갖은 고난 지셨구나./2.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해/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십자가의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가오리/주님제자 베드로는 거꾸러져도 갔사오니/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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