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이야기를 남긴 여인
(본문: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11)
1). 서론: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풀을 서로 연결하여 매듭을 지어서 은혜를 보답한다.” 죽어서 혼령이 되어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뜻)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생긴 유래는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 ‘위자부’란 사람이 그 아들 '과'에게 유언으로, 서모를 개가시켜서, 순사(국가나 왕 또는 남편을 위하여 殉節하는 것)를 금하게끔 하라고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 아들 '과'는 서모를 개가만 시켜드리고, 순사는 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후에 아들 '과'가 전쟁터에 나갔을 때, 그 서모 아버지의 혼이 적군의 앞길에 풀을 서로 연결하여 잡아 매여서 적군이 넘어지게 하여, 아들 '과'는 승리케 되었다는 고사(古事, 故事)입니다. 본문엔 더욱 감명 깊은 이야기를 남긴 여인들처럼, 우리도 주님과 복음을 위해, 교회와 세상에 좋은 이야기를 남기는 우리들의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 ①. 본문 말씀의 부조화 문제- 차이점이 있다면, 마태와 마가는 베다니에 있는 문둥병자 시몬의집에서 야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요한은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이라고 하였고, 그리고 누가복음서는 한 바리새인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은 향유를 부은 여인이 구체적으로 마리아라고 이름을 밝히고 있으나, 마태와 마가는 한 여자로 표현하고 있으나, 장소와 사건의 정황 등을 고려해 볼 때, 마리아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마태, 마가, 요한의 기록은 약간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한 향유를 부은 동일 사건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서는 장소는 물론이거니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모습도 다르며, 향유를 부은 여인도 ‘죄 많은 여자’로 표현하므로 마태, 마가, 요한의 기록과는 다릅니다. 향유를 부은 시기 문제도 마태, 마가는 유월절 이틀 전, 요한은 유월절 6일 전이며, 누가복음서엔 유대 장례법 관습을 고려한다면 거의 비슷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특히 누가복음서의 기사 내용의 특이성은 장소가 ‘바리새인 시몬’이란 자가 주님을 식사 초대한 석상이란 것과 기사 내용의 말씀이 눅 7:36-50에 전개되어 있는데, 그 중간인 41-43절에 하나의 비유 말씀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저자인 누가는 특이한 2개의 전승 자료를 하나로 묶어서 “사랑과 믿음”을 동일시하는 새로운 의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인의 사랑이 그녀의 많은 죄를 덮었고, 그 사랑으로 아니! 그 믿음으로(50절) 용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②. “그가 내게 좋은(καλόν) 일을 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여인이 아름다운(사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헬라어에 “좋다”는 낱말이 ἀγαθός와 καλός라는 말이 있는데, 전자는 도덕적 善을 가리키는 것으로, 엄격하고 좀 멋이 없을 수도 있으나, 후자는 좋을 뿐만 아니라 상냥하고 정겨운 감을 주기에,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뜻입니다. 바로 본문의 기록된 낱말이 καλός입니다.
③. “.......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이야기를 남긴 여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9절의 말씀은 2가지 예언이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될 것과 이 여인의 아름다운 마음과 행동이 기독교인 사회에서 기리 전하여질 사실이었습니다. 과연 복음의 기자들은 이 사실을 후세에 전파하였고, 이 사건 후 2,000년이 지나온 오늘에도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전해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이 여인들의 행동이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가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전심전력을 바친 헌신적인 봉사가 이렇게도 높이 평가되었다는 사실이 기념비적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이야기를 남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본론(Context): 특히 본문인 누가복음서에는 몸을 팔아 온 ‘죄 많은 여자’(창녀)인 이 여인은 지나온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신앙과 정신은 한량없이 고결하고 갸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주님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 드리면서, 구속의 은혜를 눈물로 보답한 이 여인의 행위는 불멸의 금자탑이요 기념비적인 인물이기도 하기에, 영원한 여인상(女人像)을 두고두고 한 범례로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옥합을 깨트리는 여심(女心)들은 옥합 속에 든 나드 향유는 히말라야 원산 식물인 감송향의 뿌리에서 짜낸 고유한 향유, 그 향기를 일산(逸散) 시키지 않게 하도록, 석고 함에 밀봉한 것입니다. 그 나드 값이 3백 데나리온이라고 했으니, 보통 일꾼 1년 치의 품삯에 해당하며,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마 20:2)이라고 했으니, 지금의 액수로 계산해본다면 약 1천5백만 원이 됩니다. 그렇게 값진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옥합의 향기가 그윽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옛날 구약의 왕이나, 예언자, 및 제사장의 그 취임식의 예식행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행위는 예수에 대한 최대 경의의 표현이었고, 자기 포기, 자기 부정, 아낌없이 회개에 합당한 철저한 자기희생을 동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그의 저서 중에서도 걸작의 작품입니다.
1863년에 나온 작품으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대학생으로 생계도 막연하고 하숙비도 4개월이나 밀린 가난한 청년입니다. 학교는 휴학 상태이고 책이란 책은 다 팔아먹고, 나중에는 아버지의 유물인 은시계 등 저당을 잡아 근근이 살아갑니다. 저당 집 노파는 수전노였습니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세상에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믿고서 도끼로 살해를 했습니다.
돈과 금 더미를 빼앗아 큰 바위 밑에 숨겨 두고, 그의 행위가 가져온 양심의 가책은 그의 논리에 의하면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큰 것이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죄책감에 대한 공포와 불안 의식은 식음을 전폐할 지경이었습니다. 그의 연인 소냐의 눈물겨운 기도와 신앙과 노력 끝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수를 합니다.
결국 그는 시베리아 유형 8년 형을 받았습니다. 정상이 참작된 것은 평소 고학생을 도왔고, 노파를 살해한 것은 돈이 탐이 나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닌, '선택된 강자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사회의 도덕률을 초월할 수 있다.'라는 초인사상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소냐는 지순하고 순정적이고 희생적인 이미지로, 하나님 사랑의 상징으로, 어느 작품에서도 만나볼 수 없는 신성하고도 숭고한 여인상으로 그려집니다.
소냐는 시베리아 유형지까지 따라가서 성서를 넣어주고 여자의 몸으로 갖은 노동을 다 해가면서 돈을 마련하여, 라스콜리니코프가 옥중에서 뉘우쳐서 신앙에 대해 서광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갖은 애를 다하였습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오는 카추샤가 감화를 입어 갱생하는 여인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소냐는 감화를 베푸는 여인으로 (그들은 비록 창녀라고 할지라도) 성스러운 빛을 발한 것입니다.
마태, 마가, 및 요한복음서의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이며, 누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여인만은 일본의 <성서 이야기>의 저자 ‘이누카이 미치고’의 주장은 ‘죄 많은 여자’(창녀)로 보았습니다. 하여간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장례를 위해서 값진 향유 옥합을 깨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눈물을 흘리면서 여인들의 가장 귀한 부분인 머리털로 예수님의 가장 더러운 부분인 발을 닦으며,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소냐의 행위가 연인의 관계와 신앙에서 발로된 휴머니즘(Humanism)이라면, 본훼퍼의 말처럼 이 여인들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인간의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기 죄에 대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끝내는 '회개'하는 모습이 가장 숭고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은 외면의 세계를 묘사했다면, 일본 도꾸가와 시대의 엔도 슈사큐의 <여자의 일생>은 박해 시대의 남편이 옥중에서 갖은 고통과 고뇌를 하고 끝내 남편이 옥사한 것도 모르고 뒷바라지하다가 폐병으로 병사한 내용의 순정과 희생적인 사랑 이야기도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은 영혼은 거룩한 聖女로, 희생적 사랑이 하나님 아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껍질인 옥합이 아니라, 그녀의 인격 전부를 주님의 가장 외로운 순간에 흐뭇하게 하고, 한 인간의 가련한 생이 가냘픈 여인의 몸과 정신으로 갱생된 것은 만고에 다시없는 지고지순한 행위는 율법적, 위선적인 신앙을 격파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의 이런 행위는 자발적이었습니다. 강요는 사랑의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행동하는 양심을 우리는 길이 신앙의 사표로 삼아야겠습니다. 옥합을 깨트렸다는 것은 그녀의 인격 자체를 그리스도에게 봉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존재와 소유 전부를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인격도 고귀한 향유입니다. 그리스도께 인색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대한 신앙이란 이 여인들과 같이 인격의 옥합을 깨트려 송두리째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처럼 물욕에 빠진 사람은 물욕을 가리기 위해 구제 등의 미명을 앞세우는 법입니다. 참 구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심정에서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구제는 오래간 지속하지 못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어 만민을 대속하신 일은 인류 역사의 단 한 번의 사건입니다. 여인들의 행위와 그 가치는, 금전적 가치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의 상태, 곧 사랑의 많고 적음에 따라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향한 지고한 가치에 반(反)하는 것은 타산의 결과를 고려하는 행위, 또는 본능에서 나온 행위는 가치가 적은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이 여인들의 이런 희생적인 행위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모든 죄에 대해 주님께서 스스로 책임을 짊어지셨다는 말입니다. 죄는 일면 대인 행위(불효, 살인, 간음, 허위, 탐욕, 절도 등), 정신적 행위(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 모독)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인 행위로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뜻에서 정신적 행위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향한 반역을 그 기초적 죄로 삼고 있습니다. 대인적 죄과는 사람에 대한 참회로서, 그 사람에게서 사죄함을 받을 수는 있지만, 상대에게 준 각종 손해는 보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죄도 결국 하나님에 대한 죄이고(시 51:4), 모든 죄는 요컨대, 하나님께 향한 반역의 죄이기에, 이 반역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무엇으로서 갚을 수 있는가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죽음으로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는 참으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기 죄의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합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회개한 우리는 죄과의 책임을 면제받고 완전한 죄 사함을 얻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처럼 마음과 행동, 즉 삶 전체를 주님께 바치는 생애 속에는 무수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간에 감동적인 이야기를 후세 교회와 사회에 남기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이 여인들이 어떻게 죄 사함을 받았는가의 열쇠는 예수님의 속죄에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은 옥합을 깨트리고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이 사건을 <물질과 사랑의 낭비>가 아니냐 하는 식이었습니다. 헬라어로 사랑의 행동을 의미하는 ἀγαθός는 도덕적 선, 엄격하고 멋이 없을 수 있습니다만, καλός는 사랑의 의미는 좋을 뿐만 아니라 사랑스럽고 귀여움을 가리킵니다. (상냥하고 정다운 기분이나, 아름답고, 귀여운 일)
만일 사랑이 참되면, 다소의 낭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은 다소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다 주고도 못 주어서 안달하는 것이 사랑의 정체입니다.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주는 존재(남편, 자식을 위해 희생)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여인들의 상을 본받아서, 정말 예수님께 '결초보은'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어느 곳, 어느 시대라도 이 여인들의 지순한 행위가 말하여지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꽃피우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아름다운 이야기(아름다운 행위의 이야기)를 남겨서, 후세 사람들이 감동하는 이야기로 꽃피우는 story를 남기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
'04. 신약설교마당(13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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