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새 사람의 생활 원리
(본문: 골 3:1-17)
1). 서론: 새 사람은 옛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탄생하는 것을 말함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세례의 원리요, 이 세례란 단순히 물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옛사람과 그 이상의 대상이었던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合一하여 새사람이 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 생명은 씨앗이 땅속에서 죽고 거기서 새싹이 움터 태양을 향해 자라가는 것처럼, 엣사람이 죽고, 새 생명에 살아서, 새 사람이 걸어가는 向路인 것입니다. 위에는 자기의 참 생명이 있고, 무엇보다도 자기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산 새 생명이 현재에 있어서 신령한 새 세계를 사모하며 부활 승천하신 주님과 靈交 하는 것이 그대로 미래의 생명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새 사람의 생활 원리를 묵상해 봅시다.
2). 본론(Text): ①. 본문3:5-11-옛사람을 버릴 것- ‘죽이라’(νεκρώσατε)-決斷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결코 이런 것에 관용하는 태도를 취하지 말고, 추호도 이것들을 묵인해서는 아니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이란 도덕적인 의미를 지칭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性慾과 物慾에 대한 것입니다. “그에게 여자와 돈을 주어 보라. 그것을 극복할 때, 그는 완전한 인격자가 될 수 있다.”(R. Emerson)고 했습니다.
‘탐심(πλεονεξία) -貪慾은 물질을 추구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위치에 놓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유형적인 형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代置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벗어 버리고’(ἀπεκδυσάμενοι)-강한 표현인데, 즉시 깨끗하게 씻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이 용어는 鬪技를 위해서 준비 연습을 하는 鬪士들이 사용하던 말이라고 합니다.
실천 편에 있어서 그 목표를 ‘새 사람’에 두고, 그 원리를 해부하기를 소극적으로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버릴 것을 말합니다. 옛사람을 버린다는 것은 세례를 통해서 새 사람의 면모를 갖추라는 것인데, 그것은 순간적입니다. 聖化(Sanctification)을 통한 부단한 노력은 일생동안 성결을 위한 순례의 삶(生活)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②. 본문3:12-17-새 사람을 입을 것- ‘온유’(πραύτητα) - 온유는 고전어에서는 순한 말(馬)을 표현했고, 이 온유란 말 중에는 환희, 온화, 친애, 친절, 관대 등의 값 비싼 옷의 관념이 포함되어 있으나, 보담도 하나님 상대의 내적인 요소가 선행됨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회개와 겸손에서 오는 부드러운 심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띠’(σύνδεσμος)-여러 가지 결합하는 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미덕이 있다손 치더라도, 고린도전서 13장에 비추어 볼 때,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소극적인 교훈에 이어서, 적극적으로 새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가리키는데, 사랑으로 단장하고, 더 나아가서 관용으로 남과 조화하여 성령의 은사로써 하나님께 찬양하는 몸이 되기를 바울은 권하고 있습니다. *(아주 더 구체적인 생활 원리를 골3:18-4:1에서 부부간, 친자 간, 주종 간의 실제 생활을 통한 쌍방의 윤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기독교는 이념이나 명상의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는 바른 진리에 입각한 삶이 반드시 요구되는 살아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생활을 무시한 교리, 실천을 도외시한 신앙고백은 모두가 무가치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엔 옛사람을 벗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룩한 새 사람을 입은 자는 그 변화된 존재에 걸 맞는 변화된 <새로운 생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외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즉 생활의 신앙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고 수많은 교인이 있지만, 경건의 모양만 추구할 뿐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모습들이 많습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생활이 예배가 되고 언어가 기도가 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참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많이 말한다고 하여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과 생활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우리 곁에 계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관심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쌓은 업적이나 실적보다는 예수님의 향기를 품어내는 아름다운 생활을 더 귀히 여기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志操를 지키기 위해서 당장 순교하는 것보다, 일생의 생활을 통해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서, 날마다 성화 되어 가는 생활은 더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 생활의 기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되고 더불어 부활하게 된 그리스도인이 옛사람의 옷을 벗는 것으로서, 그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반드시 곧 새사람으로서 새 옷을 입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새 사람에 합당한 여섯 가지 옷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 정성껏 단장하듯, 새사람으로서 아름다운 옷을 하나하나 입어가야 합니다. 실로 우리는 어떤 자에게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해를 주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겸손'함과 '온유'한 마음으로 '오래 참아냄'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자에게 선을 행하여 사랑과 화평의 단계를 창출해내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때때로 다투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지라도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한편 우리는 이 새사람을 위한 여섯 가지 의복 위에 ‘사랑의 띠’를 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위에 제시한 모든 의복(덕목)들을 완전하게 하며 또 하나 되게 하는 힘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지신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되기도 했으며, 해방 후 여수의 애양원으로 돌아오셔서 나환자들을 돌보며 목회를 하던 중, 1948년 10월 19일 좌익계 군인들이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을 일으켜,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이 두 아들을 죽인 좌익계 청년을 양아들로 삼은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지요. 손양원 목사님의 삶은 그야말로 <생활의 신앙>이었습니다.
한국교회여! 단지 생존을 위해서 우리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무사안일주의와 회의주의에 젖어 자조의 빈 웃음을 날리고 허허로운 가슴을 쓸어 내어야 한단 말입니까! 주림을 피하기 위하여 수모와 치욕을 삼키며 채미(埰薇)라도 먹지 않을 수 없었던 <중국의 백이 숙제>가 한없이 그립기만 합니다. 폭군의 피 묻은 칼날이 무서워 신앙의 지조와 양심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박해시대의 변절한 신앙자들, 그들은 살았으나 죽은 삶이었고, 살아서 참수형, 죽어서 부관참시(副棺斬屍)를 당할지라도 서슴없이 그 지조를 지킨 신앙의 열사들. 묵묵히 순교의 길을 걸었던!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중세 종교개혁자들 및 대원군 시대의 순교자들과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들이 유독 오늘날에야 왜 이다지도 그리운지 모를 일입니다. 마침 내일이 기미년 3. 1.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일이 아닙니까!
기독자여! 이런 신앙 선배의 유훈을 본받아서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생활이 무엇입니까, 생활이란 우리 몸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몸(σῶμα, Body)입니다. 몸은 知性, 感情, 意志, 精神, 物質, 生理, 良心, 靈魂 등이 전체로서 존재합니다. 이것을 어떤 형식으로든지 분열시키면 이미 몸은 아닙니다. 이유는 몸은 곧 생활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롬12:1) 肉體라고 靈魂이라고 精神 또는 行動이라고 하지 않고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몸(σῶμα)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사람을 분해해서 靈이니, 肉이라고 二元論的으로 표현하는 듯했지만, 그것은 시대적인 제약에서 온 표현이며 그의 본 뜻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선 당시의 풍토는 희랍적인 영지주의(Gnosticism)와 그레코-로마 사회 풍조는 二元的으로 극단의 육의 찬양과 향연이었습니다. 바울의 싸움은 그리스도 사건의 非歷史化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 몸을 죽인 十字架, 몸의 부활이며, 동시에 인간의 몸으로서의 제사, 부활이었습니다.
몸은 생활입니다. 생활은 全體입니다. 이 생활은 思辨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몸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生活은 人格의 영역입니다. 인격은 사변으로 생각할 수 없고, 오로지 몸으로서만 가능합니다. ‘나와 너의 관계, 사랑, 예배도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간 서구문화의 전래로 이중적인 생활의 태도는 내적 갈등을 招來케 했습니다,
이제 새사람의 생활 원리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보는 장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우리 교회들과 신도들은 몸으로 드리는(生活로 드리는) 예배의 깊은 뜻이 바로 새사람의 생활 원리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몸에 그리스도의 낙인(στίγμα)을 짊어진다고 했듯이, 우리도 ‘생활에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옛사람을 벗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룩한 새사람을 입은 자는 그 변화된 존재에 걸 맞는 변화된 <새로운 생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志操를 지키기 위해서 당장 순교하는 것보다, 일생의 생활을 통해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서, 날마다 聖化(Sanctification)되어 가는 생활은 더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마침 내일이 기미년 3. 1.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일이 아닙니까! 기독자여!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선배의 遺訓을 본받아서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생활이 무엇입니까, 생활이란 우리 몸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몸(σῶμα, Body)입니다. 몸은 知性, 感情, 意志, 精神, 物質, 生理, 良心, 靈魂 등이 전체로서 존재합니다. 이것을 어떤 형식으로든지 분열시키면 이미 몸은 아닙니다. 이유는 몸은 곧 생활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롬12:1) 肉體라고 靈魂이라고 精神 또는 行動이라고 하지 않고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몸은 생활입니다. 생활은 全體입니다. 이 생활은 思辨으로 파악 할 수 없고, 오직 몸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生活은 人格의 영역입니다. 인격은 사변으로 생각할 수 없고, 오로지 몸으로서만 가능합니다. ‘나와 너의 관계, 사랑, 예배도 人格的인 관계입니다. 그간 서구문화의 전래로 이중적인 생활의 태도는 내적 갈등을 招來케 했습니다, 이제 새사람의 생활 원리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보는 장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우리 교회들은 生活로 드리는 예배의 깊은 뜻이 바로 새 사람의 생활 원리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몸에 그리스도의 낙인(στίγμα)을 가진다고 했듯이, 우리도 ‘생활 속에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끝.
'04. 신약설교마당(135)'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32. 몸으로 행하는 믿음 (0) | 2026.04.15 |
|---|---|
| 131. 나를 따르라. (4) | 2026.04.13 |
| 129. 바울 삶의 마지막 정리 (0) | 2026.04.01 |
| 128. 신자의 영적 경주 (2) | 2026.03.30 |
| 127. 경우를 초월한 삶 (3) | 2026.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