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따르라.
(마4:18-22, 막1:16-20, 눅5:1-11)
1). 서론: 우리들이 기독자가 된 과정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그저 그럭저럭 된 것입니다. 모태 신앙이거나,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다녔거나, 친구의 권유 및 지인과의 인연으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이 대부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으로써 자각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얻어 출발하기도 하고, 특수한 계기가 있어서, 처음부터 비장한 경험과 결심을 하고 교회에 나오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 자체보다는 제2차적인 효과를 찾아서 신자가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혼자 있기는 외로우니까 사회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문화형태를 보고서, 혹은 윤리적으로 공감적으로 긍정해서 교인의 일원이 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를 떠난 사람도 적지 않게 있을 것입니다. 가정적인 전통에서 저항하고 독립하기 위해서, 또는 기대했던 것에 실망을 느껴서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머물러 있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습관의 연속이거나, 지적이나 정서적으로 별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그런대로 재미가 있어서 그냥 다니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점점 고조되는 소명감에 감격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2). 본론(Text): 어찌되었든지, 우리 각자는 왜 크리스천 되었는지 좀 심각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오늘 본분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인 두 형제 베드로와 안드레 및 야고보와 요한 등의 단면(斷面)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들은 모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갈릴리는 바다라고 하기보담은 호수라고 함이 더 적합하지다고 생각합니다. 길이가 20Km(50리) 폭이 13Km(약30리)의 게네사렛 호수 또는 디베랴 바다라고도 하지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였으며, 헬몬산에서 북풍이 불지 않으면 그 수면은 유리같이 맑고 잔잔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위해서, 사람을 낚는 어부를 택한 이유가 왜 하필이면 불학무식한 어부들을 부르셨는지 자못 궁금하기도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산을 보고 자라난 사람은 이상(理想)이 높고, 평원(平原)을 보면서 성장한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 바다를 보고 자라난 사람은 억세고 강인하다고 합니다. 불학무식은 차근차근 가르치면, 오히려 속에 다른 것이 들어 있는 사람보다 겸허히 쉽게 받아들일 것으로 아신 것 같고, 천국 복음을 위해서 일할 사람에겐, 인내력, 불굴의 정신, 용감무쌍한 자 등등의 기본 자질을 구비한 자가 '어부'라는 것을 갈릴리 해변을 거닐면서 깊은 사념 끝에 나온 결론으로 보여 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서 말씀하신 것에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처음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제자의 의미와는 전연 다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엔 제자란 선생과의 관계에서 수업료를 주고 지식을 사는 경우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는 것은 삶 전체로서, 전적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배와 그물, 그리고 혈연까지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하심에, 제자들이 순종하고서 따라간 그들의 심적 저변에 깔린 염원은 천시를 받으면서 어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먹어야 살지만 먹는 것만으로 삶의 보람으로 살기엔 너무나 초라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은 더 넓은 바다를 동경했다고 봅니다. 또한 노도광풍과 싸워왔던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풍겨진 결연한 의지와 더불어 따스함을 느꼈으며, 남성적 이상(理想)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포부를 사람을 낚는 어부 운동에 접선(接線)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현재 교인들은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단지 생활의 일부만을 교회와의 연결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에 분개한 독일의 순교 신학자 ‘본훼퍼’는 <제자>라는 말 대신에, 늘 ‘뒤를 따르는 사람’(Nachfolge)이란 용어를 썼다고 합니다. 이것은 본훼퍼 자기 스스로의 각오였기도 했습니다. 신자(信者)가 된다는 의미는 오늘날의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것처럼, 어느 부분적인 것만 연결되어 그것만 배우려고 하지 말고, ‘내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각자 자기의 가진 것에서 더 첨가해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가진 것을, 사도 바울 같이 ‘분토’로 여기고, 새롭게 출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삶의 전환(轉換)을 의미하며, 이것은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결단은 부모나 친구, 교회 분위기가 다소 영향을 줄 수 있어도 전적인 전환은 스스로가 할 일인 것입니다. 성서에서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강조하는 말씀을 2가지만 그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 57절 이하를 보면,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저는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스스로 자청한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예수님 편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나를 따르라고 말했을 때, 우선 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와서, 따르겠다는 자에게는 “죽은 자를 장사하는 일은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당장 나를 따르라.”하고, 또한 따르고는 싶지만 우선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을 하게 해달라는 자에게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과감한 결단(決斷)을 요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하나를 선택(選擇)한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결단’이란 어느 하나만을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가진 것에 좀 더 보태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교훈은 2번째로, 마19: 16 이하의 부자 청년에 대한 말씀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 삶의 정황을 볼 때, 부자요, 영생을 추구한 것을 보면, 희망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모세 십계명을 잘 준수한 모범 청년이었습니다. 또 누가복음(18:18)에는 관원(官員)이라고 했으니, 벼슬도 차지한 억세게 재수가 좋은 사나이로서, 세상 행복의 조건을 거의 독차지 한 젊은이 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생각을 좀하고 지나갈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니, 조금 더 말해 봅시다.
부귀영화를 한 몸에 다 지니고 있으면서도, 선행(善行)의 도리를 찾은 것을 보면 이 청년의 가슴엔 허전함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 행복의 조건 속에 구멍이 나서 허전과 공허를 채울 수가 없었다는 말도 됩니다. 일본의 노벨수상작품인 ‘설국’(雪國)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1972년에 자살했는데, 당시 나이는 73세였습니다. 그가 자살한 동기는 잘 알 수 없지만, 늙어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자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심리적 저변의 허전감이 자실의 동기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부자 청년의 심정이 이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만, 그는 재물이 많음으로 근심하면서 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변(底邊)의 교훈은,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자아중심(自我中心)의 금고(金庫)를 깨고, 전인격적(全人格的)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어찌되었던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 그들의 배와 그물 및 부친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의 뒤를 쫓았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럼 가정도 버리라는 말인가. 사도(使徒)들은 특수한 사명을 진 자들이기에 일반화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에게나 이것을 강요치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적어도 추상적인 언어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할 때에, 언제든지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언제 어떻게 버리느냐가 문제입니다.
바울이 고전 7장29-31에서 말했던 것처럼, “hos me 신앙” 즉, 마치 무엇 무엇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려고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기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소홀히 하고, 종내 하나님을 否定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가족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유가 우리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거나, 하나님의 긍휼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면서도 아닌 것처럼> 사는 신앙을 말합니다. 하나의 긍정을 위해서 다른 하나를 부정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인간들이 보내는 박수와 영광 때문이라면, 더군다나 그것이 이기적인 것을 소유함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 기쁨 또한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권세와 명예와 물질이 나를 그것에 집착하게 만들거나, 나를 우쭐대게 하여 남들을 무시하게 되고, 인간의 본질보다 그 것들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게 된다면, 그것도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과의 거래를 원만하게 하려고 하나님을 슬쩍 외면해야 한다면, 손해를 볼지언정 차라리 세상과 거래 없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선 자리나 가진 것에 궁극적(窮極的)인 보장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좀 더 깊이 들어 가 봅시다. ‘나는(自我) 무엇을 위해서, 그러한 결단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고기를 잡는 삶에서 인간을 낚는 삶에로 전환한다는 것입니다. 희랍의 철인 소크라테스가 좁은 골목을 지나다가 한 청년에게, “신발을 만드는 집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었을 때, 청년은 척척 잘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바로 만드는 집이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물음에는, “잘 모르겠다.”고했습니다. 그 때,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나를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풍자(諷刺)입니다.
즉, 물건에 대한 관심은 커서 그것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고 있지만, 인간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등한히 한다는 단적인 표현입니다. 실존철학자 ‘키엘케고르’도, "양말 ‘한 켤레’를 잃어버리면 신경을 쓰지만, 자기상실(自己喪失)에 둔감한 오늘의 인간상"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기를 낚는 것인지, 사람을 낚는 것인지를 항상 생각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물질에 대한 관심이냐, 인간 생명에 대한 가치, 존엄성, 그 존귀성을 알고,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4). 결론: 그런 일이 무엇으로 가능하냐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따름으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그런 일이 가능하고, 그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기독자라는 말입니다. 기독자는 그리스도를 선택한 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고,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석가(釋迦)는 ‘스스로 각(覺)’하기를 강조했고, 공자(孔子)는 ‘학문에 뜻을 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최전선(最前線)에서, ‘뒤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에, 우리의 ‘전체 삶’을 바쳐서 그를 믿으며, 그의 뒤를 따를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Nachfolge)이 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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