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78. 지성이면 주님도 감동하신다.

solomong 2026. 5. 9. 10:33

78. 지성이면 주님도 감동하신다.

(시 37:1-40)

1). 서론: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가 되었기에, 그래서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이었습니까! 실낙원 이후, 주님의 구속으로 선과 악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인격적인 존재가 되었지요! 그런데,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으로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인생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지요. 본인 자신이 부모의 사는 착한 모습을 보면서,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서 착한 마음을 먹고 자라면 선한 사람의 삶을 살게 되지요.

반대로 부모가 거짓말도 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면서 자라난 아이는 그가 보고 느낀 그대로 나쁜 마음을 먹게 되고, 악한 행실을 하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선함을 칭찬하면 신바람이 나서 더욱 선하게 생명력 있는 나무처럼 자라게 되고, 수다한 사람들이 그의 악함을 나무라면 위축되어 쓸모없는 나무처럼 자라서, 자기 죄악에 점점 침몰 되어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것을 인과응보이니 사필귀정이니 하는 말로 결국 심은 대로 거들 수밖에 없게 됩니다.

본문의 시인은 죄악 된 세상에서 악인의 형통에 대해 불평하거나 투기하는 대신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기독 신자가 이 세상에서의 삶도 악인의 형통에 대해 불평만을 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분의 심판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악인의 종말은 심판으로, 의인에게는 은혜가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기독 신자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고 선을 행할 것을 촉구하며 세상에 죄악이 관영해져도 의인의 종국은 하나님으로 인해 축복받는 확실성이 보장되었다는 말씀을 명심하면서 우리 모두 살았으면 합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본문 시는 “섭리의 거울”(The Mirror of Providence)이라고 호칭 되고 있으며, “어찌하여 악인이 번영하고 선인이 고생하느냐.”는 질문에 회답하는 시로서, 그것은 모두 일시적인 현상이고, 결국 악인은 멸망하고, 선인은 기업을 차지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분류해 보면, 1. 악인의 번영을 탐하지 말 것. (1-11), 2.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심. (12-20), 3. 여호와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심. (21-31), 4. 악인은 끝내 멸망하고, 의인은 구원받는다는 내용입니다. (32-40).

3). 본론(Context): 이스라엘 신앙의 고민은 이 땅에서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통받는 이 모순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날부터 因果應報 사상을 믿고 있었습니다. 의를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 사람은 그 행한 대로 하나님의 報應을 받는다는 것을 진리로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자식들과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이스라엘의 가훈과 사회교육은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훈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많은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이 땅에는 이 교훈과 진리와는 정반대의 사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오히려 악한 사람이 잘되고 행복하고 의로운 사람과 선한 사람은 고생스럽고 가난한 삶을 사는 현실이었습니다. 이 현실적인 모순을 누구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고민해 왔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의심까지도 하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 불평을 했습니다.

가령 예레미야도 그 시대 사람들이 가졌던 이러한 의심을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당신께 따집니다. 당신은 의로우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내가 감히 묻자 옵니다. 악한 사람의 길은 만사가 순조롭고 패역한 자가 평안히 살고 있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렘 12:1) 이런 의심과 불평은 하박국 예언자도 말하고 있고(하박국 1:2-4), 시편 73편 시인도 이 37편 시인과 똑같이 이 문제 때문에 번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73편 시인은 37편 시인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더 깊은 고민을 품고서 몸부림치다가 결국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그 해결책을 보았다고 합니다. (시 73:16-17) 그러나 그 해결책은 여전히 인과응보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잘 사는 악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고, 현재 고생하는 의인은 결국 하나님의 오른손이 붙잡아 주고 또 그를 영접하여 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와 대조가 되게 73편 시인은 이러한 사회적 모순에 관하여, 37편 시인이 터득한 것과 같은 진리는 이미 일찍부터 깨달은 사람으로 번민하고 불평할 필요 없이 다만 의인은 악인이 잘 되건 못 되건 그런 외부적인 일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자기 할 일만 착실하게, 성실히 살면 그것으로 이 문제의 해결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시인도 이러한 사회적 모순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권고로써 이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하지 말라.”는 이 불평과 원망의 태도는 의로운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불평불만, 원망은 죄를 짓는 일이요. 오히려 악을 스스로 범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8절)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불평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저 팔자소관이니 운명이니 하고 비틀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정의의 외침이나 잘못된 현실을 혁신하는 일 또는 개혁하는 일은 비신앙적인 행동이란 말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인은 결코 그러한 인간의 자유의사를 금지하거나 선에 대한 의욕을 죽이고 소극적으로 세상 흐름에 자기를 맡기는 타협주의자나 영합주의 또는 무조건 맹종하는 현실주의자가 되라고 하지는 아니합니다. 본문의 시인은 인간이 만든 이러한 부조리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이 불평하는 인간 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그의 역사 계획에서 이런 부조리를 다 아시고 그 처리를 하실 것이니, 사람들은 불평이나 원망하는 것만이 그의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부조리를 볼 때, 그 일에 관한 분개심이나 그 악한 사람에 관한 생각보다도 이것을 보는 자신의 문제를 우선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는 강하게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나 탄원이나 애원이 없고, 오직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함이 바른길이라.”라는 식의 문장으로 진리와 윤리에 대한 지혜로운 의견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인과응보 사상의 현실적 모순으로 고민하는 의인과 그와 뜻을 같이하는 착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서두에 인용한 3~4절은 그 교훈의 핵심입니다. 여기 “의지 신앙”을 제일 먼저 권고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시인들은 억울한 수난을 당해도 의지의 신앙을 권고하고 원수나 병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기를 당해도 의지의 신앙으로 그 해결을 하였습니다.

여기 인생의 모순과 부조리를 보아도 의지의 신앙을 말하고 있음은 히브리 사람들의 신앙과 敬虔이 얼마나 이 “의지심”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순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믿게 함입니다. 그다음에 본문의 시인이 둘째로 권고하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런 인간의 모순에서는 선을 행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의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는 수난자보다는 악을 행하는 부자와 권력자가 더 낫지 않느냐 함에 대한 반박입니다.

세상 사람이 아무리 악으로 기울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보지 말고, 인간의 본분으로서 해야 할 선행을 단념하지 말고 계속하라고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의롭지 못한 악한 방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쉽게 선행을 단념해 버리게 되고 따라서 인간이 사는 사회는 더 어둡게 되고 더욱 모순된 일이 생기고 불의와 악이 행패를 부리게 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어떤 사정 아래서도 단념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편이 좋을 때만은 선을 행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선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진실을 음식처럼 먹고 사는 일입니다. 본문의 시인이 “성실을 먹고 살라.”고 했습니다. 선을 끝까지 단념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성실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익과 손해에 좌우되고 대접과 멸시에 좌우되는 선은 선이 아닙니다. 끝까지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선행입니다.

또한 이것만이 사회적 모순을 내 손으로 극복해 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악인이 만든 악의 연결 고리 속에서 어려움을 당해도 성실을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보살핌과 만족한 인생의 삶을 주시고, 우리에게는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하나님께로 통하는 길 즉, 지성과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시게 되는 것은 오직 “성실”입니다. 이상으로 본문은 지혜문학의 형식에 영향받은 <성실성>으로 요약해서 풀이해 보았습니다.

또한 본문은 <하나님께서 세상사를 섭리>하심에 그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시인 다윗은 오랜 인생을 살면서 의인과 악인의 운명에 대해 관찰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지혜로운 교훈의 말씀은 <선악의 종국>에 대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하다면 이왕 “지성이면 감천”이란 속담은 우리가 보통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지성껏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도 감동해서 소원이 성취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 반대 현상으로 성실치 못하여 인생을 허무하게 끝낸 옛날이야기부터 한 번 해봅시다. ‘지성'이란 앉은뱅이와 ‘감천'이란 盲人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성'이란 사람은 앉은뱅이걸음으로 걸어 다니는데, 날씨가 추운 겨울밤이 되면 얼어 죽지 않으려고 남의 집 굴뚝을 끌어안고 밤을 보내고, 낮에는 장터를 돌아다니며 빌어먹으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장터에서 구걸하는 ‘감천'이란 盲人을 만났습니다.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끌어 앉고 울면서 같이 살기로 하였습니다. ‘지성'이란 앉은뱅이는 ‘감천'이란 盲人에게 업히어 다니면서 길을 안내하여 주겠다고 하였습니다.'‘감천'이란 盲人이 ‘지성'이란 앉은뱅이를 업고서 장터에 나타나면, 서로 돕는 모습이 보기가 좋아서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넉넉한 인심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빌어먹고 살지만, 예전보다는 살기가 좋아 보이니, 보는 놈이 똑똑하다고 점차 ‘지성'이란 앉은뱅이는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게 되고, ‘감천'이란 盲人에게는 음식을 조금만 주다가 보니, ‘지성'이란 앉은뱅이는 점점 몸에 살이 찌게 되어 무거워졌고, ‘감천'이란 盲人은 점점 약한 몸이 되어 갔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시골 논길을 가다가 ‘감천'이란 盲人이 힘이 빠져 쓰러지면서 두 사람 모두 도랑에 빠져서 죽게 되었답니다.

사람은 바로 초심을 잊지 않고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성'이란 앉은뱅이가 마음이 변해서 자기는 좋은 것만 많이 먹고, ‘감천'이란 盲人에게는 좋은 음식을 적게 주는 바람에 힘이 약해져서 함께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똑똑하고 능력 있다고 베풀지 않고, 혼자만 배를 채우다 보면, ‘지성'이란 앉은뱅이와 같은 실수를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나 세상은 균형과 지성스러운 성실을 잃으면 서로가 공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至誠이 못되어 하나님께서도 감동할 수가 없어서 공멸케 된 것입니다.

식사 후, 적극적으로 밥값을 계산하는 이는 돈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돈보다 관계를 더, 중히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할 때, 주도적으로 하는 이는 바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툰 후, 먼저 사과하는 이는 잘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상대를 아끼기 때문입니다. 늘, 나를 도와주려는 이는 빚진 게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를 잘 새겨 보는 우리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본문의 핵심적인 교훈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찌하여 악인이 번영하고 선인이 고생하느냐”는 질의에 해답은 <결국 악인은 멸망하고, 선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으리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하나님의 섭리”하에 있으니“성실을 먹고 살라.”는 중심 주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善惡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잠정적으로 침묵하심을 전제하에서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온 세상이 악인의 길이 형통하고 행복을 누리며 기쁨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잘살게 되니, 감히 성실이니, 정의니 하는 소리는 간곳없이 잠잠합니다. 권모술수, 모략,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 사니, 그렇지 못한 정직한 자들, 의로운 자들은 <찍소리>도 없이 조용하고, 악한 모사꾼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나, 그 세상의 종말은 모사꾼끼리 무질서하여 싸움판으로 결국 자멸하게 되는 것은 뻔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온 세상이 착하고 의로운 자들이 <쉽게! 쉽게!> 출세하여 성공하고, 감히 전부 다가 “선해야 잘 산단다.”, “의로워야 출세한단다.”라고 외치면서 출세 가도가 인산인해로 메워지고, 꾀부리고 권모술수에 능한 모사꾼들은 <쭉 소리도 없이> 쥐 죽은 듯이 종용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황금 덩어리는 찾기가 어렵고 귀하니 값이 있고, 부러워하지, 발에 차이는 것이 황금 덩어리라면 누가 귀다고, 값지다고 하면서 기뻐하겠습니까! 고생스러운 고개언덕도, 땀 흘림도 없이 쉽게 넘어온 인생이기에 뿌듯한 삶의 의미와 감격도 없이 그냥 흐느적거릴 뿐입니다.

중국 故事 成語에 <螢雪之功>이란 말은 손강(孫康)이란 자가 눈(雪)에 비추어 책을 읽어서 官界로 출세를 했고, 차윤(車胤)은 비단 주머니에 몇 마리의 반딧불을 집어넣어 책을 읽고서 역시 官界로 출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생스러운 노력 없이 성공과 행복한 성취감을 쉽게 얻는 길이 참 행복스러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선하고 성실한 사람이 고생스럽게 노력한 보람으로 성공했을 때, 그 감격이 행복하고 기쁜 것이지, 아무런 노력 없이 절로 쉽게 찾는 성공과 행복이 정말 즐겁고 감격한 것이겠습니까? 자! 이제 우리는 “공든 탑이 무너지겠느냐”는 본 궤도인 誠實 문제로 돌아가서 더 좀 생각하다가 결론을 매듭지읍시다.

중국 당나라 때 살았던 이백(李白)은 ‘시선’(詩仙)의 기질을 지닌 천재적 시인으로 유명합니다. ‘붓을 대면 비바람도 놀라고 시가 완성되면 귀신도 울게 한다.’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시인이었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뛰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이백은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워낙 좋아했습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을 불러 놓고, “너도 머지않아 세상에 나가 뜻을 펼치게 될 텐데, 깊은 산에서 학문을 닦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서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라고 하여, 이백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친구라고는 나무하고 하늘, 그리고 산짐승뿐이로구나! 아! 함께 놀던 옛 친구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라고 하면서, 산속에서 공부만 하는 생활은 몹시 지겨웠습니다. “이 정도면 아버지께서 바라는 만큼의 실력은 되겠지?”라고 하면서, 슬슬 꾀가 난 이백은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저 혼자 진단을 내렸지요. 그러고는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하산을 하였습니다. “역시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구나!”하면서, 왁자지껄한 장터며 경치 좋은 마을이 정겨웠습니다. 그렇게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향하던 이백은 어느 시냇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냇가에는 웬 할머니가 바위 옆에 앉아 날카로운 쇠도끼를 바위에 갈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뭘 하고 계십니까?”,“응, 만들 게 있어서” 호기심 많은 이백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도끼날을 갈아 무얼 만드시려는 겁니까?”라고 묻자, 할머니는 싱긋 웃으며 대답을 했습니다. “이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려는 중이라오.”“예?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고요!” 이백은 이내 코웃음이 나왔습니다. “거짓말 마세요. 그렇게 큰 도끼를 갈아 언제 바늘을 만듭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되레 이백을 꾸짖었습니다.

“아니!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도 못 들어 보았소? 무슨 일이든 정성을 기울여 노력을 쏟으면 결국엔 하늘마저도 감동케 하는 법이라오. 비록 도끼가 비늘이 되기란 쉽지 않겠지만, 갈고 또 갈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중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오.”라는 말을 하면서, 할머니는 또다시 도끼를 갈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의 말을 들은 이백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지요. 잠시 뒤, 이백은 발길을 다시 산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도끼를 바위에 갈고 있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학문에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정성이 지극하면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신다는 뜻을 되새기면서, 세상 사람이 아무리 악으로 기울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는 자기 주변 사람들을 엿보지 말고, 인간의 본분으로서 해야 할 선행을 단념치 않고 계속하도록 합시다. 사실 많은 사람이 의롭지 못한 악의 방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쉽게 선행을 단념해 버리게 되고, 따라서 인간이 사는 사회는 더 어둡게 되고 더욱 모순된 일이 생기고 불의와 악이 행패를 부리게 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어떤 사정 아래서도 단념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형편이 도래해도, 선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본문의 시인이 “성실을 먹고 살라.”라고 했듯이, 진실의 음식처럼 먹고 사는 일입니다. 선을 끝까지 단념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실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익과 손해에 좌우되고 대접과 멸시에 좌우되는 선은 선이 아닙니다. 끝까지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힘쓰면서 살아갑시다.

4). 결론: 본문의 시는 강하게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은 시로써,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나 탄원이나 애원이 없고, 오직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함이 바른길이라.”라는 식의 문장으로 진리와 윤리에 대한 지혜로운 의견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의 시인은 <인과응보> 사상의 현실적 모순으로 고민하는 의인과 그와 뜻을 같이하는 착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인은 억울한 수난을 당해도 의지의 신앙을 권고하고 원수나 병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기를 당해도 <의지의 신앙>으로 그 해결을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이 아무리 악으로 기울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보지 말고, 인간의 본분으로서 해야 할 선행을 단념하지 말고 “성실을 먹고 살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본문은 <하나님께서 세상사를 섭리>하심에 그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시인 다윗은 오랜 인생을 살면서 의인과 악인의 운명에 대해 관찰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선악의 종국>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악인의 종말은 심판으로, 의인의 종국은 축복받는 확실성이 보장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본문 시인의 신념이 우리의 신념으로 하여서 험난한 인생길을 성실하게 살도록 노력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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