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76. 영혼의 갈증

solomong 2026. 4. 28. 10:35

76. 영혼의 갈증

(본문: 시 42:1-11)

1). 서론: 하나님을 戀人처럼 사모하는 마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입니까. 사람은 무엇을 간절히 사모하여 애태울 때, 비록 그가 순간적 환락을 찾아 육체를 찾아 헤매는 그것은 저속한 것이지만, 일종의 美的인 추구를 하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재산이나 금품을 빼앗는 일에 애태우고, 남의 명예를 훼손시키기에 밤잠을 못 자면서 흉계를 꾸미고, 또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온 정열을 바쳐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가진 악의적인 애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도 솔직한 자기의 육욕을 풀어 보고자 하는 것은 승화된 차원이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의 육체적 장수, 물질적인 부 및 권력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 명예의 목마름보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애타는 목마름으로 간절히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더 아름다운 것인가를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영혼의 충돌-시편 42편은 고독한 사람의 찬미입니다. 시인은 자기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자를 돕기 위해서 自敍傳的인 文體(고뇌를 통한 신앙의 환희)로 쓴 것입니다. “나의 슬픔은 외로운 영혼만이 알아줄 수 있다.”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원수들로 말미암은 슬픔을 열거하고, 그 슬픔에서 脫皮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으로서는, ⑴. 자기 자신의 반성, ⑵.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입니다. 사람들이 다 우리 인간을 버려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는다는 신념을 견지하는 것이 신자의 태도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들을 잊는다고 해도,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영혼의 이중성(고민과 희망, 불안과 환희)을 보이는 것으로, 단순한 감정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나, “자기반성’(고민하다가 희망을 품으며, 불안해하다가, 환희의 찬송을 부르는 것)을 뜻하는 것인바, 그것이 병적인 것이 아닌 한에서는 개인 신앙 훈련에 가장 유효한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 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 42:11)라는 분명히 시인의 자기반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이 42편 시인의 노래가 없었다면 우리는 참 아름다운 것을 모를 뻔했습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들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이 아름다운 영혼의 갈증 때문에 그들의 고단하고 괴롬 받는 인간들이 새 힘을 얻고, 어둡고 지루한 하루를 웃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교의 세력이 강했던 로마에서 이 새로운 종교를 믿던 사람들은 밝은 태양 아래 살 수 없어 지하(地下) 동굴로 숨어서 살았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와 갈라져야 했고, 종들은 주인에게서 쫓겨나야 했고, 사람들은 이웃의 눈길을 피하여 그들의 신앙을 비밀히 간직해야 했습니다.

각종 천한 직업을 갖던 사람들은 이 신앙 때문에 그들의 생활 방도를 잃어버리고 거리로 방황하면서도 그들 중심에 간절히 사모하는 일임을 가슴에 간직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이 시편 42편 1절을 생각하고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라 하여, “사슴”표를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사실 사슴은 얼마나 순하고 연약한 동물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것들이 목이 말라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수난받는 기독 신자의 상징으로 삼았다는 것은 “생선”을 심벌(symbol)로 삼았다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고기”심벌엔 교리적인 냄새가 풍기나, “사슴”상징에는 간절히 애타는 괴로워하는 영혼을 알려 주어 훨씬 친근미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 목이 말라 애태우는 이 광경을 우리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목이 마른 사슴, 그것도 암사슴(공동번역 성서-대한성서공회 발행, 1977-엔 ‘암사슴'이라고 되어 있음. ), 새끼를 배었거나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경우, 그 애태움이 더 심각하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모성애(母性愛)에 견주어 보아도 넉넉히 짐작이 갑니다. 아래의 <여자와 어머니>란 대비적인 말들이 우리 가슴을 서늘케 하여, 모성애의 위대함을 더욱 절감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여자는 젊어 한때 곱지만, 어머니는 영원히 아름답다./여자는 자신을 돋보이려고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돋보이려고 한다./여자의 마음은 꽃바람에 흔들리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태풍에도 견디어 낸다./여자는 아기가 예쁘다고 사랑하지만, 어머니는 아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뻐한다./여자가 못 하는 일을 어머니는 능히 해낸다./여자의 마음은 사랑받을 때 행복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사랑을 베풀 때 행복하다./여자는 제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지려 하지만/어머니는 우리 마음에 맞추려고 하나 되려고 한다./여자는 수없이 많지만, 어머니는 오직 하나이다.”

그것도 암사슴이 물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자연환경이 아닙니다. 파레스타인의 기후를 생각해 볼 때, 아무 곳에서 물을 구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사정과는 전연 다릅니다. 일 년 중 가뭄의 때인 4월에서 10월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시냇물들은 말라서 완전히 건천(乾川)이 되어 버립니다. 언덕을 넘고 넘어도, 들판을 건너고 또 건너도 시냇물을 찾기가 힘듭니다. 찾다가 지쳐버리면 목을 길게 뻗은 채로 땅에 쓰러집니다. 간절한 갈증 해소를 절규하며, 목이 말라 시냇물을 향한 아름다운 의지를 뻗은 다리를 상상해 보세요.

짐승도 이러하거늘, 우리 인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삶의 갈증을 느끼는 많은 군상(群像)이 우리 앞에, 우리 실존들이 이러합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혼으로, 자유에 관한 갈급함으로, 진실에 대한 목마름으로, 정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인간 세상엔 과거도 오늘도 내일도 목타게 울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 남미(南美)의 군사 쿠데타가 빈번히 번복하여 일어날 때, 남미의 신부들과 지도자들은 ‘정의의 목마른 소리’와 ‘우리의 샘물은 우리가 파서 먹는다.’라는 자본주의 종속 국가에서 자유를 희구하는 갈증을 절규했던 것입니다.

1970-80년대의 시인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 “신 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나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살아오는 삶의 아픔/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되살아오는 끌려가는 벗들의 피 묻은 얼굴/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떨리는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의 시와 노래로 절규해서 우리가 이룬 자유 민주주의였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 영혼의 갈증을 위한 외침이겠습니까! 본문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정을 이 암사슴으로 표현한 것은 시인의 시상(詩想)이 가장 원만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야말로 파레스타인 사정을 잘 아는 독자들에게는 감동을 주는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께 목말라함은 자기 경험에서 나온 것인가, 단순히 상상이었던 것인가. 이 시편 전체의 흐르고 있는 배경으로 보아 시인 자신은 말할 수 없는 신앙적인 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예배공동체에서 축출되어 그 자신은 원치 않는 곳으로, 그것도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그 이름을 찾아 성소에 모일 수도 없는 이방 지역에 던져진 사람 같습니다.

 

본문 4절에, “내가 전에는 聖日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를 볼 때, 그는 분명히 과거 어느 한때, 예루살렘 성소에서 그 예배공동체에서 어떤 지도적인 역할을 해오던 사람이었던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러한 종교적 환경에서 완전히 차단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예배가 말살되고 있는 북한 땅으로 사로잡혀 간 어느 교회 지도자의 경우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6. 25. 당시, 끌려간 송 창 근 목사님 같은 목사님들의 경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일을 생각하고 내 마음이 상한다.”(4절) 라는 것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현재의 박해를 가슴 아프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시인은 단순히 예배드릴 성전이 없다든가, 그가 예배를 인도하고 성도들과 함께 종교적 축제나 그 행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때문이 아니라, 실지로 그에게서, 그의 삶에서 신앙 자체를 말살해 버리려고 하고, 그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없애버리려는 부당한 핍박을 당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더 절실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종일 빈정대오니 밤낮으로 눈물로 보냅니다.”(3절),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날마다 원수들이 빈정거리는 소리는 비수로 내 뼈를 찌르는 것 같습니다.”(10절) 이것은 원수들이 철저한 무신론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기를 모욕하고 자기의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짓밟는 것 같고, 사랑하는 자식들 앞에서 죽이는 것 같은 가슴을 저미는 일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당하는 이 고통을 그는 한동안 어떻게 해결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민하다가 希望을 가지고, 불안 중에 환희의 찬송을 부르는, 영혼의 깊은 충돌을 통해서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더 성숙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목마르게 사모하는 그 일 자체가 이미 문제의 해결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신앙의 자유 속에 살아서 이 경지를 모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풍만한 자유 속에서 오히려 역으로 부패(腐敗)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육의 포만 속에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각성해야 하겠습니다. 부단히 자신의 현실과 영혼의 反省(內省)을 통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환희의 찬미를 부르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4). 결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그렇게 혼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기다리라. 내 체면을 세워주시는 하나님이시오니, 오히려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라.”(5, 11절) 하나님을 자유롭게 신앙치 못한 모든 여건(위에서 구체적 예를 든 것까지) 속에서도 하나님을 목이 타게 찾는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되며, 그래서 찬송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의 경지를 체험해 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목타게 구하는 자여!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소유한 자요, 그래서 가슴 속으로 부듯한 찬미를 부르는 오늘의 기독 신자들의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세상의 민주주의 때문에 그렇게 절규했다면, 하물며 창조자 하나님께 향한 우리 영혼의 갈증을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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