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죄와 벌
(본문: 시 38:1~22)
1). 서론: 어렸을 때부터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기에 하나님은 기특하게 생각하시어, 그 사울 왕의 시기하는 마음에서 다윗에게 가해 오는 고난의 역정과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은 돌보시어 끝내 왕으로 등극하도록 보살펴 준 다윗이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속어처럼, 본문은 시인 다윗이 제6, 7계명의 죄를 범하고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벌 받는 정황이 측은하고 불쌍하다는 생각보다도 고소하다는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곧바로 하나님께 사죄를 호소하기는커녕, 인간적인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여 시침을 딱 띄고 죄를 덮어서 선한 것처럼 가장하려는 모습이 가소롭기 그지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명을 받은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 지적할 때까지 얼굴빛 하나 변치 않았던 그가 오늘따라 밉살스럽기가 그지없습니다. 범죄행위의 동기도 불가항력의 상황이라든지, 피치 못할 형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것이라든지, 오해하여 실수로 인한 것이라면 몰라도, 고의적인 욕심에서 쏟아놓은 더러운 물을 씻은 듯이 깨끗이 보이려고 은폐하는 그의 태도는 용서받기엔 너무 깊은 죄질이라, 일말의 동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 신자는 완전무결한 聖人이 아닐진대, 이따금 잘못된 죄과를 범할 때, 지체치 말고 진실한 사죄의 고백을 하나님께 아뢰어 용서받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본문의 시는 7개의 회개 시(6, 32, 38, 51, 101, 131, 143)의 3번째로 사순절(Lent) 주간에 역대 교회에서 낭독되었다고 합니다. 저작 시기는 압살롬의 반란 조금 이전에 작시 되었으며, 그 당시 다윗은 중병에 시달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7개의 시 저작 순은 6, 38, 51, 32, 101, 131, 143편. 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 구분은 1. 고난 중에 회개(1-10), 2. 친구, 친척들의 등 돌림과 원수들이 모함으로 인한 고통(11-14), 3.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애원(15-22)으로 분류됩니다.
3). 본론(Context): 이 본문의 시는 Augustine이 그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고민하고 있었을 때 즐겨 외우던 시였는데, 그 후부터 교회에서는 이 시는 참회의 시 하나로 많은 성도가 즐겨 읽어 오던 시라고 합니다. 본문 시의 첫 구절은 같은 종류의 시 6편 1절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죄책감에서 오는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영혼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 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는 “개인 탄식과 참회 시”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시인의 수난 이유는 주로 심한 병에 걸린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병이 어떤 병인지 병명을 붙일 수는 없으나(어떤 주석 학자는 문둥병이라고 하지만), 그의 육체가 중병에 앓아누워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 구절들로써 알 수 있습니다.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4, 7절),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3절),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5절),“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6절), “내 허리에 열이 가득하고”(7절),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10절), “내가 넘어지게 되었다.”(17절) 라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들로 보아서 이 시인이 거의 사경에 이르는 중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그의 병이 중태임을 알고서 기뻐하고 이를 그들의 비판의 기회로 삼고 있는 원수들이 있음도 그의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생명을 노리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악담을 하여 온종일 사악한 일을 꾸미고 있다.”(12절), 또한 “내 원수가 드세게 위세를 부리며, 아무 까닭도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다.”(19절) 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 시인은 육체의 중병으로, 원수들의 모함과 살의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친구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친척들까지도 그를 가까이 접근하고 위로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도 멀리하고 돌보지 않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친구들도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나를 못 본 척합니다.”(11절) 라고 합니다. 본문의 시인은 완전히 고독한 사람입니다. 그를 위하여 관심을 기울이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그는 이제 완전히 혼자 버려진 사람으로 자기 육체의 중병과 그를 에워 쌓인 냉대와 모함과 저주 속에서 어둡고 지루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참으로 육체나 정신이 지칠 대로 지쳐서, 마치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비참한 상태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모든 수난의 현실을 신앙으로 받아들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조용히 자기의 수난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누가 밖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실수와 죄가 결국 이러한 수난을 가져오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죄 때문입니다. 내 악 때문입니다. 내 실수가 커서 이 고통이 왔다."라고 했습니다. 이 고통은 결국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책망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정의의 손이 나의 불의를 누르기 때문에 받는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나의 비 진실을 책망해서 온 벌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2절) 라고 주의 징계의 손이 나를 눌러 이 아픔을 갖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욥도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의 화살에 맞아 생긴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욥 6:4),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시 7:12~13절) 이런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덮어두지 않고 그 책임을 따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인이 자기 고통을 하나님 징벌의 화살이라 생각하는 이 죄책감이 좀 늦었지만, 우리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몸에 성한 곳이 없도록 하나님이 그를 치셨고, 그 뼈 속속들이 고통을 느끼도록 하나님의 벌이 임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이처럼 하나님의 침략과 공격을 좀 더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4절) 라고, 마치 하나님 징벌의 침입을 홍수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영적 고통을 홍수의 범람과 같이 불가항력적이라 함을 다른 시인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 124:4~5절)
이것은 하나님의 벌하심에서 자기 전 존재가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또 하나님의 벌은 머리에 무겁게 이고 있는 짐 같다고 합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벌을 받고 “내 죄 짐을 지기가 너무 무겁다.”라고 한 말씀과도 같습니다. (창 4:13) 이렇게 하나님의 벌을 실감하고 고민하는 본문의 시인은 자기의 고민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죄와 벌”로 인한 양심적인 한 인간의 울부짖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한다.”(18절) 라고 했습니다. 또한“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지 아니하나이다.”(8~9절) 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괴로움을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께 호소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피곤, 상처, 불안, 신음, 탄식> 등이 죄로 말미암은 자기의 실존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는 주 앞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벌이기에, 하나님이 이를 거두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옵소서.”(15절) 이런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풀려나는 길은 병을 고치는 것이나, 원수의 모함과 그 살인적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우선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용서와 돌보심만이 그를 수난에서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절)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받는 길만이 그를 수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지, 다른 여타의 길이나 방법이 없다는 확신 속에서 이렇게 본문의 시인은 애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본문의 시는 매듭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적인 교훈은 죄로 인한 벌의 아픔을 겪는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죄에 대한 벌을 받아서 신음하고 있는 시인 다윗을 하나님께 사죄의 용서를 구하여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본문의 시인 다윗의 범죄가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해 보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사료 됩니다. 그렇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다윗이 하나님과의 단절된 벽은 뭐니 뭐니해도 그 첫째는 밧세바에 대한 제7계명을 범한 죄와 이로 인한 ‘우리야’ 살인 (제6 계명), 그리고 불신앙과 탐욕으로 인한‘인구조사’라고 하겠습니다.
<강간, 살인, 불신앙과 탐욕의 범죄>라면 오늘날에도 重罪에 속하는 범죄행위라고 하겠습니다. 그것도 중첩된 범죄이었고, 이런 중죄를 범하고 이내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가 아니라, 자기 죄를 감추어서 모면해 보려는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했다는 점에서 악의적인 범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밧세바 강간죄를 모른 척 슬쩍 입 닦으려고, 남편 되는 우리야를 전쟁 중에 특별 휴가를 주는 것처럼, 집으로 가서 쉬라고 유인했다는 점입니다. 이때 밧세바는 벌써 다윗의 씨앗을 잉태했기에, 다윗은 우리야에게 전가하려는 심보로 우리야의 씨로 둔갑시키려는 계책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순수한 군인 우리야를 우연을 가장해서 전투가 가장 치열한 전선으로 배치하여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고, 더 큰 죄로 확장된 셈입니다. 다윗의 악독함은 사울을 능가하고, 나봇의 포도밭을 탈취한 아합보다 더 잔인하고 저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 친척들까지도 등을 돌리게 되었고,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결국, 나단 선지자로 통한 하나님 질책의 비유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 (삼하 12:1-25) 라고 정곡을 찔러 피눈물이 흐르는 회개를 했던 것입니다. 밧세바 사건 직후 곧바로 悔悟에 넘치는 회심의 호소를 하나님께 드렸더라면, 본문의 상황처럼 매서운 벌로서, 사경에 이를 만큼 아픔을 겪지 않았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벌 받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뚫고 나갈 길을 모색 하다가, 하나님도, 친구, 친척들 전부가 “너 해 볼 데로 해 보아라.”라는 식의 길이 전부 차단되어 완전히 외로운 신세가 되어, <죄에 대한 벌>로써 신음하게 된 결과라고 사료 됩니다.
우리는 ‘죄와 벌’하면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작품 <죄와 벌>을 생각하게 되는데, 문학작품의 <죄와 벌> 이전에, 그의 생 자체의 <죄와 벌>의 경험자인 도스토옙스키는 28세 때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사조에 동조하는 ‘뻬뜨라셉스끼가 중심된 서클’에 가담한 죄로 시베리아 유형을 받게 된 사유인데, 당시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자유사상가에 대한 탄압은 극심하여, 결국 8년간이란 벌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인생이었기에, 문학작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삶과 사상에 반영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은 인류는 종족 유지만 하는 범인과 나폴레옹처럼 사회의 일반규범을 초월하는 비범인이 있다고 믿는 일종의 영웅주의 또는 초인사상을 가졌습니다. 비범한 자가 무가치한 악인을 처단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불합리한 신념의 소유자였기에, 고리대금업자인 전당포 노파 알료나와 그녀의 이복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인하고서, “그저 이를 죽였을 뿐이야, 아무 쓸모도 없고 더럽고 해롭기만 한 이들.”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전당포 노파를 살해 후에 죄의식 속에서 겪는 고통과 절망, 번민을 통해서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그리고 있습니다. 창녀인 소냐의 성스러운 섬김과 헌신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자복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본문 시인 다윗의 <죄와 벌>과 도스토옙스키의 생 자체의 <죄와 벌> 및 문학작품의 <죄와 벌>을 비교해 볼 때, 죄의 동기가 전자는 개인윤리의 자기 욕심에서 야기된 범죄를 은폐시키려는 이중 죄의 면모이었으며, 후자는 사회윤리의 차원인 이념에서 온 범죄행위라고 규정 지울 수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비교해 볼 때, 본문의 시인 다윗의 죄질이 더 저질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누구라손 죄를 짓고서 감히 이내 절실한 뉘우침 속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결단이 아주 쉽게 서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시치미를 뚝 떼고, 능글능글하게 태연자약하게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는 뜻에서 자기의 죄를 은폐시킬 수단과 방법을 강구 하는 심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겠느냐는 그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대소간 본의 아니게! 알게! 죄짓는 삶이 있더라도 곧바로 하나님께 고하여 사죄의 은총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본문은 다윗의 참회를 기록한 처절한 회개의 시입니다. 회개의 본질은 단순히 입술로 죄의 조목조목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상한 마음, 가슴 아픈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본문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특히 본문은 중병에 걸린 다윗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좀 더 일찍이 위선적인 요령을 부리지 않고, 파렴치한 '간음죄'와 잔인한 '살인죄'를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던들 극심한 벌은 면할 수 있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더 긴 말이 필요 없이 다윗의 가증스럽던 <죄와 벌>의 구약성서 속에 옛날 내용을 남의 이야기처럼 불쌍하다거나, 고소하다거나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다윗의 ‘죄와 벌’이란 거울을 우리 각자의 가슴에 비추어서 거기에 반영되는 우리 자신들의 진솔한 모습을 보자는 것입니다. 저마다 반사되는 영상을 보면서 크든지 작든지 죄상이 묵은 것이든지 현 실존 것이든지 관계치 말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여 사유의 은총을 받는 우리 자신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영적 죄상이나 나와 너의 윤리적인 문제를 초월해서 사죄의 기쁨을 맛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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