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오늘날 출애굽 해방의 의미
(본문: 시114:1~8)
1). 서론: 우리는 종종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권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하나님의 임재라고 말합니다. 본문 시편은 짧지만, “하나님께서 임재 하신다.”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이 변화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하나님이 다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원형이자 신약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틀이 됩니다.
본문 시편을 통해서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사건”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쏟아진 거룩한 하나님의 사건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쁨이 넘치는 이스라엘 민족의 사건으로만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현대의 출애굽 해방” 의미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심도 있는 묵상을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본론(Text): 출애굽 때의 여호와의 능력을 찬미하며, 이로써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백성을 격려합니다. 아름다운 서정시로 단테가 이를 애송하고, 그의 신곡(神曲)에 응용하였다고 합니다. 70인 역에는 다음 편과 합쳐 있습니다. 내용은 1. 이스라엘이 주의 성소가 됨 (1~2), 2. 홍해와 요단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3~6), 3. 이런 주 앞에 두려워 떨 것(7~8) 등입니다.
3). 본론(Context):이 시는 70인 번역에서 다음 시와 합해서 한 편의 시로 보고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시 자체는 115편과는 달리 시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시의 하나입니다. 그 내용은 간단하지만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의 사건 중 가장 대표적인 출애굽 사건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 사건이 얼마나 훌륭하고 놀라운 사건이었던가를 사람의 말이나 행동보다 자연의 태도를 들어서 알려 주고 있습니다.
물론 출애굽 당시 상황을 후대의 사람의 손으로 기록한 시가 되어서 그 연대를 정확하게 잡기가 어렵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포로 이전 왕국 시대로 봅니다. 바이저 같은 학자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전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2절에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크라우스 같은 학자는 포로시대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축제 제8일에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학자들마다 이 시를 부르게 된 축제를 다르게 설명합니다. (크라우스는 길갈 성소 전통을 여호수아 3~5장, 모빙켈은 대관식 축제와 관련시킴). 본문 시가 학자들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여러 고대 축제와 관련되었다는 것은 본문 시가 가진 사명이 이스라엘의 어떤 축제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민족사와 관련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건은 아무래도 위에서 언급한 대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포로 후 시대라 하게 되는 이유 한가지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사건은 과거 역사 중 출애굽 사건이었기 때문에, 망국의 백성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구원사를 강하게 부각하여, 그 역사의 어두운 순간에 출애굽 사건 같은 구원사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114편 시인은 출애굽 사건을 유일한 시의 제목으로 삼고 그 사건에 대한 것만을 노래하는 유일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인이 이해한 출애굽 사건의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시가 보여주듯이 이 사건은 단순히 민족사에서 길이 찬양해야 할 “해방의 사건”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쏟아진 거룩한 하나님의 사건이라 하여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출애굽 사건을 행하실 때, 이스라엘과 야웨와의 관계는 특수했다는 것을 2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야웨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시인은 반드시 남북 왕조를 각각 따로 생각하고 남 왕국은 “성소”요 북 왕국은 “영토”라고 구분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은 야웨의 성소요 영토가 되었다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성소”는 야웨 하나님이 임재(臨在) 하시는 곳, “영토”는 야웨의 주권이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라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출애굽 사건 당시 야웨가 모세에게 알려 준 관계개념은 소속 개념입니다. 야웨에 소속한 백성이라는 특수성이 야웨로 하여금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게 한 동기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 5~6) 여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가 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신명기 기자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다.”(신 4: 20)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의 성소요 영토가 되었다고 할 만큼 이스라엘은 야웨께 속하고 그의 기업이 된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분명히 출애굽 사건을 보는 눈을 정치적인 것에서 신앙적인 것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의 종살이함에서 해방된 그 정치적 기쁨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그의 기업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만들어주신 일이 감격스럽다고 본문의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기업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된 사건입니다. 애굽 사람 앞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여 축하한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개천절(開天節)을 노래함과 같습니다.
이 기쁨을 대 자연물들, 바다와 산들이 어떻게 대했는가를 본문 시인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보고 도망가고 요단은 물려갔다”(3절) 여기에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과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이 똑같이 자기들의 능력으로 건넌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 바다나 강을 인격화하여 “도망가고 물러섰다”라고 하여 자연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순종하고 도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상 배후에는 대자연의 세력도 하나님의 구원사의 의지 앞에 떨고 물러갔는데 어찌 감히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사를 방해하거나 이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자연과 인간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놀람으로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웨가 자연의 힘과 더불어 싸우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의지가 움직임을 안 자연들은 스스로 후회하고 만 것입니다. ( 시편 77:16, 하박국 3:10에도 같은 사실을 보여줌.)
이러한 자연의 응답은 바다와 강만이 아닙니다. “산들과 작은 산들”도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바다와는 춤을 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산들은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같이 뛰었도다”(4절) 여기 “뛴다.”라는 동사를 두려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하느냐, 기쁨의 표현으로 보아야 하느냐? 에 대한 해석은 주석자들의 의견 차이가 있으나, 필자는 기쁨의 표현으로 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말을 시편 9:6절에서는 “겁에 질려 뛰었다.”라는 의미로 보지만, 여기서 우리는 바다와 강이 두려워서 물러갔다고 생각한다면, 산들은 기뻐서 춤을 추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대자연의 반응을 반드시 공포 분위기에서만 보아야 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무섭기도 하지만, 또한 기쁘기도 합니다. 바다와 강들은 그 가던 코스를 멈추고 후퇴했으니까 겁에 질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찬양하는 뜻에서 춤을 추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요단강을 건넌 것이 과연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사건일 것입니까? 하나님의 위력을 생각하면 무서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탄생했다고 할 때, 그것은 결코 공포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구원사의 사건은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오래된 노래라 할 수 있는 미리암의 노래는 이 출애굽 사건을 찬송의 사건으로 표시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라”(출15:21) 하나님의 구원자는 노래의 대상이지 공포의 대상은 아니지요. 그래서 영국 새 번역 성서에는 7절에 “땅이여, 떨지어다.”라는 것을 “춤추어라 땅이여!”로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대로 이해하면, 바다와 요단강의 공포도 산들과 같이 기쁨으로 읽어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사와 사건을 찬송하고 춤추는 것이 정당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춤추는 산들, 춤추는 강과 바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룩하시는 구원사의 사건은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고 에돔 백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한다.”라고 해도(출 15:14~15),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사 앞에 인간은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지만, 그의 하시는 은총의 행사에 대해서는 다만 기뻐하고 춤을 추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 이상과 같이 본문 시를 쉽게 풀이해 본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그것은 오늘날 출애굽 해방의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1). 출애굽은 성경적 구속의 원형: 영국의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출애굽 사건을 성경 전체에서'하나님의 구속'을 정의하는 가장 기초적인 해석학적 모태라고 했습니다.
출애굽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원형이자 신약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틀이 됩니다. 특히 출애굽은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순종보다 항상 선행함을 보여줌으로써, 선교의 기초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권에 있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2). 구속에 대한 기초 개념: 이스라엘의 구속 개념은 고대 히브리 사회의 친족 보호 제도인' 고엘(Go’el)'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 상실한 친족의 땅을 다시 찾아주는 경제적 권리 회복, 2. 빚으로 노예가 된 것에서 해방, 3. 가문의 유지 등) 이집트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신들을 보호하거나 대변할 친족이 전혀 없는'친족 없는 노예'상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법적·관계적 진공 상태에 스스로 개입하셔서, 아무런 자격 없는 그들의'가장 가까운 친족 구속자(고엘)'가 되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스스로 혈연적· 언약의 유대를 맺으시고 그들의 고통에 법적 책임을 지시는 파격적인 관계적 행동입니다.
(3). 하나님의 포괄적 구속: 라이트는 출애굽 구속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포괄적 구속'임을 강조하며, 이를 네 가지 차원으로 분석합니다. 1. 정치적 차원: 출애굽은 단순히 국가적 예속에서의 해방을 넘어, 스스로 신이라 주장하던 파라오와 이집트의 신들을 굴복시킨 '신들의 전쟁'이자 승리였습니다. 이는 압제적인 인간 권력을 탈출 성화케 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이 온 세상에 유효함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2. 사회적 차원: 노예 생활로 인해 파괴되었던 가족과 공동체 구조를 회복시키시고, 오합지졸의 노예 집단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으로 재구성하셨습니다. 이는 깨어진 인간관계의 치유와 새로운 대안적 사회 형성이라는 선교적 과제를 제시합니다. 3. 신앙적 차원: 구속의 궁극적 목표는 이집트의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예배토록 하는 것입니다. 4. 출애굽 구속의 4가지 차원: 1. 정치적으로 제국의 압제와 권력에서의 해방, 2. 경제적으로 가혹한 노동과 착취에서 해방, 3. 사회적으로 공동체 회복과 정체성 회복, 4. 영적으로 미신에서 벗어나 야웨 하나님을 예배토록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구속 동기: 하나님의 구속 개입은 인간의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첫째로, 억눌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고통을'아신다'라고 할 때, 이는 단순한 지적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의 실존으로 직접 들어가 그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체험적이고 관계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소리를'들으시고',상황을'보셨으며',그 고통의 한복판을 깊이‘아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과거의 약속을 근거로 현재의 역사에 개입하시겠다는 의지적 신실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속의 원동력은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맺으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명예와 성품을 뜻합니다.
(5). 출애굽의 선교적 해석과 시사점: 구약 신학자 라이트는 출애굽 모델을 오늘날 선교에 적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해석적 오류들을 경계하며, '통합적 해석'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1. 신앙적 해석(Spiritualizing): 출애굽을 개인의 죄로부터의 영혼 구원으로만 축소하는 경향입니다. 이는 성경을 탈정치화(Depoliticize)하여 물리적·사회적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간과하게 만드는 한계가 있습니다.
2. 정치적 해석(Politicizing): 사건을 순수하게 사회정치적 해방이나 혁명의 수단으로만 치환하는 경향입니다. 이는 구원의 근원인 하나님의 정체성과 영적 예배라는 본질을 제거함으로써 복음을 세속화(Secularize)할 위험이 있습니다. 3. 통합적(Integral): 라이트가 강조하는 '통합적 선교'의 관점으로, 신앙적 해방과 사회적 해방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총체적 사건으로 봅니다. 구속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영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총체적 행동이며, 교회는 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4). 결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본문 시편의 메시지는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이 홍해처럼 깊어 보여도, 요단강처럼 거세 보여도, 하나님은 그것을 가르실 수 있는 분임을 재확인케 합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삶의 본질을 가르쳐 줍니다.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실한 예배자의 모습임을 명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출애굽 사건의 모델은 현대 선교가 지향해야 할'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선교'의 청사진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삶의 일부가 아니라, 온 세상과 삶의 전 영역을 다스리시는 주권자 십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선교는 복음 전파를 통한 영적 구원과 더불어 사회적 공의와 경제적 회복을 모두 아우르는'고엘(Go’el)'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선교는 단순히'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들의 고엘이 되셔서 온전한 자유와 예배로 인도하시는'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겸손히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의 현장에서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시고,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온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사역을 멈추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끝.
2026. 4. 2.
山下연구소: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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