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69. 실패의 성공

solomong 2026. 3. 23. 09:55

69. 실패의 성공

(막 10:32~45)

I). 서론:옛날이나 지금이나 입신출세,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수도로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및 군사의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신라 천 년의 역사 속에도 그러했고, "로마로 가는 길은 세계로 통한다"고 말할 정도로 정치인, 상인, 문인, 군인 및 하물며 노예까지도 큰 도시, 사람 많은 곳인 로마에 숨어 버리기 위해 상경 길을 택했습니다. 지금도 세계 각국에 저마다 많은 사람들이 입신양명하기 위해서 수도 상경(上京)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서울도 만찬가지입니다. 서울을 중심한 외곽 위성도시가 경기도 일원에 도시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이래서 생긴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목적으로 예루살렘 상경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단적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엔, 특히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그 상경 길이 왕으로 등극하는 양으로 보았습니다만, 주님께서 골고다로 향하신 후엔 성공의 상경 길이 아닌, 여지없이 실패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과연 주님의 상경 길은 실패의 길인가. 성공의 길인가를 이 수난주간과 부활절기에 묵상되는 말씀이 되었으면 합니다.

II). 본론: 예루살렘에 상경한 예수님은 결국 로마제국 권력에 의해서 체포되어 식민지 정치범이나, 극악한 범죄자에게 가하는 참혹한 처형법 중에 하나인 십자가에 매달리어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신학자들은 마가복음 14장부터 수난사라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마가복음의 본연의 모습은 13장에서 끝나고 14장 이후는 다른 사람들이 손에 의해 부가되었다는 가설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생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처음부터 예수님의 죽음(3장, 6장)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3번에 걸친 예수님의 죽음 예고(8:31, 9:31, 10:33~34)도 있었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12:1~9)에서 농부의 외아들을 죽이는 이야기는 분명 예수님의 수난사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핵심적인 질문과 그 해답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상경했는가.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상경 길 자세는 장엄하고 결의에 가득 찬 모습이었습니다. 예수살렘에 입성할 때, 민중의 '호산나' 환영은 그의 신변의 어두운 그림자를 더 짙게 해 주었습니다. 로마에 대한 군중 선동죄도 첨가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상경 길에 가장 인상 깊은 행동은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시며 성전을 숙청하신 일이었습니다.

유대 제사장들, 서기관들, 저들은 유대 종교의 핵심 분자들로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점유하여, 하나님까지 '연금(軟禁)'하여 독점하고, 그것을 미끼로 하여 참배하러 온 이방인들에게로부터 외국 돈을 부정하다고 해서 환전하도록 하고, 그 과정에서 고혈을 빠는 착취를 했습니다. 성전의 제물로 바치는 짐승은 순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실은 자신들의 소유를 전매하여 막대한 착취의 미끼로 삼고, 성전을 위해 전 유대인들에게서 모든 십일조를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성전의 장(長)이라는 직책이 곧 민족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어용의 통치권도 있기에 그 자리를 탐내어 매관매직도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체포당한 직접적 동기가 이 사건인 양, 11장 1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내면적 음모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공포심의 발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외면적으로는 예수님의 성전 숙청은 다윗 왕조의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자기들, 즉 어용 지배층을 향한 선전포고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성경적 증거는 성전 파괴와 3일 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미루어 생각할 수 있고, 누가복음(22:36)엔 "검 없는 자는 겉옷(밤엔 이불 대신으로 하는 중요한 것)을 팔아 사라"고 했으며, 성전 숙청은 계획성 없는 분노의 몽둥이를 들고 덤비는 무모한 민중의 일면으로 보았습니다.

성경학자들 간에는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소에 칼을 품고 있었다는 견해를 주장하지만, '마가'는 바늘 하나 지녔다는 말도 없습니다. 마가는 왜 그랬을까.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의 마지막 밤, 배신당하고 체포당하여 '산헤드린' 앞에 끌려가 군인들이 침 뱉고 채찍질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희롱당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그 당당한 로마 총독의 기세에 비해, 몽매한 군중들 앞에 선 초췌한 예수님의 모습, 임금도 아니면서 가시관을 쓰게 하고 자색 옷을 입게 하여,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조롱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꼼짝하시지 않고 최후까지 침묵을 지키시는 주님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마가'는 어처구니없는 불법의 재판 과정을 거쳐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즉 '하나님 아버지는 도대체 무엇하고 계시는가'의 질문이 터져 나올 만하고, 오늘날 어쩌면 우리들이나 세인(世人)들의 눈에는 완전히 실패적인 주님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굳게 믿었던 지난날 3년간의 일들, 그렇게 호언장담하시던 주님! 이런 처지에 하나님은 철저한 무능력자이시며, 그의 아들 되는 예수님은 오로지 때리면 맞고, 찌르면 피를 흘리는 이런 실존이야말로, 바로 무능한 그 당시 로마 식민 치하의 민중이 겪고 있는 현장이 아닌가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 처형 당사자들과, 아예 열 제자는 도망가고, 십자가 밑의 요한 제자와 멀리서 바라보는 예수님의 여제자들의 시야에는, "엘리 엘리…" 하시는 예수님의 비극적 절규 다음에, 모든 한을 품었다가 토하듯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할 때까지 그 어떤 초자연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야말로 한 영웅의 죽음이 아니라, 철저한 패배자로 생을 마친 자로 여겼습니다. 이상의 저의 묘사는 바로 예수님이 당한 수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영감으로 후에 기록한 '마가'는 처절한 비극을 노래하지 않고, 바로 그처럼 처참하게 당하는 수난의 의미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너'(마가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 오고 오는 세대의 인생들!)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말씀하신 14장 22~25절의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주님께서 언급을 피력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고 오는 뭇 민중의 매를 대신 맞은 것입니다. 아니, 그 민중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주님의 예루살렘 상경 길은 죽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에 신사참배를 거절함으로 박해를 당할 때, 주기철 목사님의 삶의 좌우명(motto)이 '일사각오'였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만, 그의 다른 아호가 선양(鮮羊)이란 것은 아는 이 많지 못합니다.

조선의 희생양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로 그래서 장렬한 순교의 피를 한국 제단에 뿌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형 교회로 성장하여 목회의 성공자란 찬사를 받는 것도 좋고, 거룩하고 경건한 카리스마적 권위도 좋으나, 주님 향한 일편단심의 일사각오! 수난의 종 모습은 없고, 주님 자리에 앉아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 이 수난주간에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역사의 탁류(濁流)가 도도히 흐르는 현장에서 그 탁류를 몸으로 막다가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잘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르게' 살고, '주님 뜻대로 살겠다'는 주님의 제자들이 왜 이다지도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호산나!' 외치던 군중들은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또한 골고다 형장의 형리들도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고 조롱하던 당사자들도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후에, 하늘이 울고 땅도 진동하자, 종내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죄책감에 가롯 유다는 자살 길을 택했고, 위기 속의 신변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시체를 장례했던 '숨은 제자'들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실패 같은 성공의 징조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수사도 베드로에게 위대한 사명을 다시 맡기셨고, 베드로를 위시한 회의주의자 '도마'까지 예수 부활의 '케리그마'를 외치다가 모두가 숭고하고 장렬한 순교의 길, '실패 같은 성공 길'로 그들의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부활의 진실 때문에 죽은 것이지, 거짓을 위해 생명까지 저버릴 자들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위대한 주님의 '실패의 성공' 길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III). 결론: 부디, 오늘의 주의 종들, 제자들, 주님의 백성들! 진정 '성공적인 실패'를 원하는가. '실패적인 성공'을 원하는가의 결론적 물음입니다. 많은 자들이(불신자 포함) 잘 살아오던 그들의 인생의 단면 단면마다 실패의 모습이 점철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주님처럼 '실패적인 성공자'들이 다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목련은 그 추운 눈보라에도, 모진 서리에도 참고 견디면서 맹아를 품고 있었습니다.

허나 4월 겨우 한 주간 만발하다가, 추하게 변해서 바람에 흩날리는 모양은 인생, 기독자, 주의 종들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추하게 지더라도 바람에 날려 낙화가 될지언정, 스스로 겸허하지 못하고(낙화를 인정하지 못하고), 끝까지 버티어 악을 쓰며, 그 세상적 좋은 자리에 연연불망(戀戀不忘)하여 추태를 연출하는 주의 종들의 이미지를 목련화를 보면서, 저마다의 순간순간 인생과 신앙의 단면을 보는 듯합니다. '성공 같은 실패자'가 되지 말고, 구세주 예수님처럼 '실패적인 성공'인 부활과 영생의 길을 뒤따라 걸어갔으면 합니다.

2011년 4월 11일

山下연구소장: 양 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