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66. 포기시대에 움트는 희망 (The Hope in Time of Abandonment)

solomong 2026. 3. 10. 10:55
 

66. 포기시대에 움트는 희망 (The Hope in Time of Abandonment)

(본문: 창세기 12:1-5)

I.서론: 현재 프랑스의 평신도 신학자 J. ‘Ellul’은 “현대는 길을 잃고, 미래도 없으며, 삶의 의미도 없으며, Pop music ,Movie, Sex라는 마술사에 의해서 사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불신시대, 타인의 희망조차 짓밟아버리는 잔인한 시대, 다만 냉소, 절망뿐인 시대를 가리켜 "포기의 시대”라고 그의 저서에서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포기시대에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의 새가 우는 징조가 보입니다. 남북분단의 비극은 2차세계대전후 공산주의라는 이데오로기(이념)와 강대국인 미. 소라는 타의에 의해서 갈라졌습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혈육의 이별, 두고 온 산하(山河) 그리면서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1991년 소련의 고르바초프(M. Gorbachev)의 페레스토로이카(Perestroika, restructuring,새로운 기구와 조직을 위한 계획, 개혁)를 선언을 한 이래, 중공의 변화 및 세계 공산주의 이데오로기의 종언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72년 7. 4. 남북의 당국자 공동선언문을 선포한지, 2007. 10. 4.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까지 약3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렇게 염원하던 조국통일의 이제 우리세대와 다음 세대가 짐을 져야할 때가 도래 했습니다.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로 '세미(細微)한 바람 속에 계시는 분’(왕상19:12)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의 새벽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가진다는 의미를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II. 본론: ⑴.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을 인류역사에 있어서 한 세대의 종식, 다음에 새로운 인간상으로 등장시키는데, 그 출발은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고향과 가족에서 떠난다는 것은 낡은 질서에서 탈출을 의미합니다. ‘갈대아 우르’지방에서 그간 잡은 터전일체를 포기하란 말입니다.(인맥, 재산, 명성, 그곳에서의 생의 의미 등.) 그 대신 그에게 주어진 것은 <희망>하나뿐이었습니다. 희망은 손안에 들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딘지는 모르는 미지(未知)의 곳, 단지 지시하는 방향으로 가라는 것은 희망의 성격을 말하는 것뿐이며, 희망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보유(保有)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신약성서에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⑵. 그런데 그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롬4:18)고 합니다. 이것을 <절망 속의 희망>, <포기 속의 희망>, <불가능 속의 가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희망’이란 낭만적인 Utopia의 환상을 말하거나,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전망 같은 것이 아니고, 언제나 포기 속의 희망이요, ‘고통스런 기대’(painful expectation)요, “희망은 하나님에 대한 응답 속에 있는 인간의 행위라.”고 신학자 불트만(R. Bultmann)은 말한바 있습니다. 또한 Ellul은 “하나님이 역사의 현장에서부터 뒤돌아 등을 보이시고, 침묵할 때, 인간을 향한 포기하시는 듯한 순간에 인간은 희망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묵묵히 침묵하실 때, 그 때가 바로 희망의 때란 것입니다. ‘갈릴리’바다가 흉용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같이 동승(同乘)한 배가 거의 난파직전에 제자들은 겁에 질리고, 거의 절망적인 상태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물에 베개를 하시고 주무시기만 하였습니다.(막4:35) 하기야 하나님의 아들이 익사할 일은 만무하겠지만, 제자들은 공포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⑶. 예수님의 침묵은 예수님 편에서 보면, 희망을 보장한 침묵이었으나, 제자들 편에서 보면 불안, 절망,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인간 편에서의 절망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희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에게서 희망을 걸었는데, 하나님은 그 희망을 성취할 줄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라’는 인간적으로 이미 생산 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한사코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부부가 폭소(爆笑)를 터트릴 만큼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기적적으로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제는 희망이 아니라, 구체성을 띈 현실이었습니다. ‘이삭’ 그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희망 그 자체>(hope itself)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끝장이다”(All or Nothing)라는 잠시 그의 머리에 인간적인, 하나님보다 ‘이삭’이 더 귀중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울려왔습니다. ‘이삭’을 ‘모리아’ 산상에 가서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바쳐서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해보는 것이었지, 인륜대사를 그르치는 그런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의 등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경륜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업혀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⑷. 그것은 바로 ‘이삭’을 통해서 인류의 새로운 미래가 약속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죽이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단순히 하나의 생명, 아브라함의 혈육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와 하나님의 경륜이 그 어깨에 짊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아이를 죽이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죽이는 것이 되며,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저항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꼼짝 못하고, 이 같은 하나님의 강요에 굴복해야만 했던 것입니다.[당장 쉽게 복종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고 목석(木石)이었을 것입니다.]종래 믿음이란 대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찾은 것입니다. “믿음은 희망이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히11:1)고 했습니다. 즉 신앙은 희망, 아직 오지 않는 것, 또 보이지 않는 것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기본적인 입장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리라는 신앙, 창조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어진 불굴의 신앙입니다. “죽어도 산다,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저도 이긴다.”라는 역설적인 신앙이 참 신앙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⑸. 이렇게 볼 때, 오늘 날 “이것이 없으면, 끝장이다.”(All or Nothing)라는 모든 것이 다 ‘이삭’이란 외아들입니다. 1950년의 민족끼리의 상쟁과 원한이 있어 아직까지 그 상흔이 남아 있음에도 조국통일이란 세계사적 흐름에 부응해야하는 역사적 사명을 우리가 지금 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사를 위해 고민하다가 포기했으면, 새로운 희망의 놀이 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인간의 포기 속에 하나님의 희망의 놀이 뜨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인간 그 자체는 그 어떤 <바람도 불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 편에서는 세미한 바람 소리 속에 속삭여 왔습니다.

 

(6). 조국분단의 아픔 속에서도 1998년 민주화 바람과 더불어 2000년 6. 15 공동선언부터 이상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데, “바람아! 불지마라.”고 한편 사람들은 아무리 소리쳐도 세찬 바람은 그냥 불기 시작 했습니다. “바람아! 불지마라! 바람아! 불지 말라!”아무리 소리쳐도,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바람이란 기류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은 자기의 질서와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질서와 바람의 질서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지혜는 바람을 창조하거나, 바람을 불지 못 하도록 하는 힘은 없습니다. 다만 바람의 힘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밀려서 날아가는 것뿐입니다.

 

그 바람 중에 하나가 바로 민주화요, 부정부패비리 척결이요, 5.16 군사 문화의 잔재 청산과 친일파 잔재 청산이요, 수구 기득권세력이 견딜 수 없는 강한 태풍인 ‘사라’호, ‘매미’호가 부니, 누구라손 여기서 부지(扶支)하겠습니까! 이 태풍은 눈이 있어서 못 먹고, 못 입고, 억울하게 눌려서 사는 힘없는 이에게는 조용하게 지나고, <내 노라! 하는 힘센 이들만> 휘 몰아가니 어쩝니까! 사실 제대로 부는 바람인 것이지요! 세상의 틀을 마구 바꾸니까 미쳐 날뛰는 것이지요! 세상은 평등하게 고루 고루 잘 살도록 말입니다. 이 바람이 2007년 10. 4.을 거쳐, 새 대통령 선출, 우리사회의 양질의 문화(문명과 다른 차원의 개념)적인 개선, 자! 그러니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7). 확실히 신앙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자기 투신(投身)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가라고 할 때, 행동으로 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어도 산다!”라는 신앙이 그로 하여금 그 자신과 ‘이삭’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을 바랐던 것입니다. 서양격언에 “아무리 캄캄한 밤하늘에도 별 하나 쯤은 보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별 하나를 보고, 그간 그 숫한 세월을 흘러 보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따금씩 사랑스런 자일 수록 시련을 줍니다. 그런 시련을 통해서 신앙의 성숙과 신앙의 묘미를 터득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간 아픔을 주셨습니다. 일체의 포기 속에 희망이 움터 오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III. 결론: 자!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음의 시(詩)로 표현 하겠으니, 그 해답(解答)을 각자가 얻기를 바라면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합니다.

 

정직한 미움을 말하되,

거짓된 사랑을 말하지 않게 하소서.

정직한 분노를 말하되,

거짓된 인내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이기보다는,

만년을 그냥 있는 의연한 바위로,

고여서 오래 썩는 물보다는,

광란(狂亂)에 밀어 붙이는 노도(怒濤)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되게,

당신의 피 흘림이 우리의 피 흘림 되게,

당신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

당신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게 하소서.

 

일체 잠든 우리 양심에,

활활 불을 당겨주소서.

일체의 죽은 우리 영혼에,

사랑과 믿음과 희망의 불을 질러주소서.

 

침묵과 포기 속에 새로운 희망이 되게,

용기를 일깨워 주소서! 우리의 참된 신앙!

그리고 교계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아픔을 통한,

신앙의 환희를 맛보게 하소서! 아멘!!!

 

2007년 11월 16일 재수정 등재,

山下연구원장: 양 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