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64. <삶에 이르는 병> (신입 교인을 위한 설교)

solomong 2026. 2. 20. 10:41

64. <삶에 이르는 병> (신입 교인을 위한 설교)

(본문: 겔 16:6-14)

1). 서론: 19C. 정말의 실존 철학자요 신학자인 ‘제렌 키엘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그의 저서에서 그 병은 <절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병은 죽어 버리면 끝나는 병이 아니고, 별난 희망이 있어서 사는 것도 아니라, 죽을 수 없어서 사는 정신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없어져 버리고 싶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면서 살 때, 키엘케골은 “그것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부자나, 빈자나, 행복했거나, 불행했거나, 고귀한 왕관의 광채를 띄고 있거나, 아무도 보아주지 않은 천한 사람으로 그날그날 무거운 짐과 울분을 짊어지고 왔었거나 간에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사실 20C. 후반부터 현재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은 누구나 키엘케골이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인간이 아니고, 혼자 있는 고독한 인간입니다. 혼자서 고독을 벗어버리고 둘이 함께 있어 보면 고통은 없어지지 않아서, 또 혼자 있고 싶어집니다. 지나간 추억도 없고, 내일의 희망도 없으니, 어제와 내일이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현대인만이라도 즐기려고 하면 할수록 허무한 실존입니다. 그래서 과거도 미래도 오늘도 없는 인간들, 살 수도 죽을 수도,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인간들, 이것이 현대인의 얼굴입니다.

연애하면 행복하고, 돈을 벌면 즐겁고, 벼슬하면 우쭐하는 것도 아직 철부지가 되어 오해해서 그렇지, 연애가 무엇인지 알고 보면(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 돈이 무엇인지 (돈에 노예가 된다. ), 벼슬이 무엇인지 (권력은 허무하다. ) 알고 보면, 이런 일들이 나를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 그러면 치유 방법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본문 槪要-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여인의 인생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들에 버려진 피투성이의 여자 아기를 살려서, 왕후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후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물질과 축복으로 방자한 음부 짓을 했습니다. 어찌 이런 여인을 그냥 둘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애급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번영을 누리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우상을 들여와 영적인 간음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남편 되신 하나님이 간음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의 고통을 내리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할 수 있는 비유이지만, 한 기독 신자의 영적인 삶을 개괄하는 이야기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비유를 한 사람의 영적인 여정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고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②. 기아(棄兒) [렘16:1-7] -본문은 이 죄인의 비참함을 그림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집안에 딸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어머니는 헷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상 숭배자입니다. 무슨 원인인지 몰라도 이 딸을 탯줄도 자르지 않고, 물로 씻지도 않고, 소금도 뿌리지 않고, 강보에 싸지도 않고 들에 버렸습니다. 아무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들에서 갓난아기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고 있습니다. 짐승 밥이 될 신세요, 햇볕에 타 죽을 신세요, 해가 지면 얼어 죽을 신세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진술한 것입니다. 조금도 과장한 것이 아닙니다. 背恩忘德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말합니다. 도울 자도 없고, 소망과 능력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또한 구원받기 이전의 죄인 된 모든 인간의 영적인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③.“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렘16:6) - <공동번역 성서>(대한성서공회 1977)에 의하면, “내가 지나다가 피투성이로 발버둥 치는 너를 보고, 핏덩어리야 살아라.”라고 했고, 성서 주석학자는 “피 투서성이었던 네게 이르기를 살아남으라.”라고 하는 것이 바른 문장이란 것입니다. 지금도 Palestine과 아랍 농가에서는 산파가 갓난아기의 탯줄을 끊고, 소금, 물, 기름을 전신이 바른 다음, 7일 동안 강보에 싸 둔다고 합니다.

 

④. 은혜의 손길(렘16:8-14) -하나님께서 사생자와 같이 버려진 여자아이와 같았던 예루살렘을 어떻게 구해내서 양육했는지 비유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아비는 아모리 사람, 어미는 헷 사람으로서, 태어나자마자 배꼽 줄도 자르지 않은 채로 버려진 헐벗었던 존재였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원래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으로서, 그다지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만한 곳이 아니었음을 뜻하기도 하며, 선택받기 이전의 이스라엘 민족의 비천했던 모습에 대한 묘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루살렘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겨 “너는 피투성이이라도 살라”고 하시면서 거두어 주셨으며, 그녀를 보살펴 건강하게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성숙한 나이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 여자아이를 아름답게 단장을 시켜 자신의 아내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방인의 성읍이었던 예루살렘(수15:63)이 다윗 왕 때부터 하나님의 성읍으로 선택되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이제 아름다운 여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다”라는 말씀은 솔로몬 왕 시대 예루살렘의 번영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왕상 10:1-10, 23-25).

 

3). 본론(Context): 본문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은 “피투성이가 된 인간”입니다.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민족은 시온 산성이 있는 예루살렘이 부패하여 폐허가 되어 마치 부정한 여인이 만신창이가 되고,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전체가 상처투성이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요, 역사적 당시의 현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과 역사를 성경에서 샅샅이 폭로시키고 나서, 하나님은 그 곁을 지나가시면서,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2번씩이나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피투성이가 되어 삶의 기쁨도 희망도 없는 인간의 곁을 지나시면서 “죽지 말고 살아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사실적으로 말해서 우선은 고마운 소리는 아닙니다. 피투성이가 된 인간은 차라리 죽으라고 하는 말씀이 차라리 좋다고 생각됩니다. 1975년 8월에 필자가 미국 CA. 버클리 유학 중일 때,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 신문에, “병자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식물인간)에서 계속 혼수상태로 의식이 불명한 것에 <안락사 논쟁>이 치열하다는 보도를 읽은 생각이 납니다. 그때 그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식물인간이 된 환자가 죽을 권리도 있다.”라고 소리가 더 크게 났습니다.

마치 고양이가 쥐 한 마리를 잡아놓고 당장 물어뜯어 죽이는 것도 아니고, 놀려대는 고양이와 같이 심술궂은 상황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결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피투성이가 된 인간의 곁을 팔짱이나 끼고,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식으로 죽지 말고 살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기독교의 하나님이 저 높은 하늘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시며,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사진이나 찍고,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지옥이나 만들고, 앉아있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피투성이가 된 병자의 곁에 찾아와 그 병을 고쳐 주는 의원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가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말 구유에 태어나서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안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역사 세계에 오신 그 자체가 피투성이요, 가장 낮고 천한 인간으로 나심의 상징인 말구유였습니다. 15, 16세에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여의고 홀어머니 마리아와 동생을 위해 목수로서 땀 흘리면서 호구지책에 골몰했던 15년의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30세에 비로써 천국 건설을 위해 가정도 매정하게 뿌리치고, 유대 군중 속에 뛰어들었을 때, “미쳤다”라고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것이 피투성이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아들이 멸시와 조롱과 배척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했을 정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은 30에 팔림을 당하고, 마지막 골고다 석벽을 향해 14번이나 쓰러지면서 면류관 대신에 가시관을 쓰시고, 춤 뱉음을 당하고, 해면에 탄 쓴 포도주를 강요로 먹었고, 임금의 홀의 상징이었던 갈대를 조롱으로 오른손에 들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시며, 운명하신 예수님의 삶은 고독, 배반, 아픔의 상처투성이요 피투성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투성이를 치료하기 위해 당신 자신이 피투성이가 되심으로 우리를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앞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병을 다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가지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는 성한 사람이다.”라고 우겨대는 환자의 병입니다. 죄가 없는 깨끗한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고 사는 바로 그런 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자기 천국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는 병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실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고, “삶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삶에 이르는 병!” 삶 때문에 오는 병, 살기위해 야기되는 병! 그것은 저마다 어쩔 수 없이, 고칠 수 없는 힘의 한계성을 느끼고, 이병을 무조건 치료해 주는 의원인 주님께 내어 맡기는 순간, 이병은 “삶에 이르는 병”으로 화(化)해지는 것입니다.

4). 결론: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말구유에서 골고다까지 이런 병균을 모조리 정리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병든 나를 품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도 주님과 나 사이를 끊을 수 없기에, 내가 나를 용납하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의 삶에는 혁명적인 전환이 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삶에 이르는 병인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