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배신 당한 사랑
(시편 109:1~31)
1). 서론: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구절들을 만나게 됩니다. 특히 구약의 ‘저주 시(Imprecatory Psalms)’는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는 신약의 메시지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여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할 시편 109편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시편은 배신당한 한 영혼의 처절한 부르짖음이자, 원수를 향한 소름 끼칠 정도의 저주가 담긴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텍스트를 현대를 사는 우리 자신들의 삶의 실존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좀더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2). 본론(Text): 잔인한 원수의 핍박을 호소하는 시로 사울 또는 도엑(삼상 21:7, 22:18)의 핍박 때로 추측 됩니다. 내용은 1. 핍박 중의 호소(1~5), 2. 적에 대한 보복의 기도(6~20), 3. 주의 구원을 위한 기도입니다.(21~31)
3). 본론(Context): 본문 시는 학자들이 "탄식시"라고 부를 만큼 시인의 고통이 노골적으로 호소되어진 시입니다. 일부의 학자들이 민족의 고난을 노래한 시(詩)로 읽으려 하지만 이 시에는 제 1인칭 "나", "나의", "나를", "내게" 등의 대명사가 연달아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이 시에 수차 언급된 "저희"(2,5, 25, 28)와 "대적"(6, 20, 29)들에게서 여러 가지 곤욕을 치르고 있는 수난당한 어느 개인의 노래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악의에 찬 원수들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고통에 어떤 이유나 까닭이 있는 것인지 시인 자신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원수들이 "미움"으로 무고한 비난을 하고 욕설을 한다고 했습니다.(2, 3절) 그러나 이 시인은 "가난한 사람이요, 궁핍하고 마음이 상한 자입니다."(16, 22절).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삶에 지친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석양 그림자 같다"고 했으며 그의 육체는 수척하여(24절) 보는 사람마다 "머리를 흔들어"(25절)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시인은 금식까지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24절) 이 금식이 식욕을 잃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기도를 하기 위한 것인가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하나라고 하기보다 이 사람은 너무도 애매하고 억울한 고난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당하고 있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절망적인 딱한 사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해서 금식 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 69편 시인도 원수의 비방과 압제가 너무 견딜 수 없어서 금식하며 기도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69편 10, 13절)
본문의 시인이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말로 이 시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기 원수의 핍박 때문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무릎이 약해지고 육체가 수척할 정도로 쇠약해졌다고(24절) 이해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시인은 자기를 미워하고 비방하고 까닭없이 괴롭히는 원수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랑하지만 저희는 오히려 나를 대적하오니 나는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저들의 악을 나는 선으로 갚고 나는 사랑합니다."(4, 5절)
이렇게 노래하여 시인 자신이 기도를 하며 저들의 미움을 사랑으로, 그들의 악을 선으로 갚는다는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말하는 관대한 태도도 본문 시인의 신앙에서 배웠다 할 수 있습니다.(롬 12:17~21)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5:43) 이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구약에 있는 "성결의 법전"(레 19:17~18) 안에 밝혀진 사랑입니다. 본문 시인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오히려 사랑하는 아름다운 신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시에는 이러한 정신과 정반대가 되는 내용이 6~20절에 나옵니다. 사랑과 선으로 원수를 대함과는 달리 원수에 대한 저주의 말이 연속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시편을 주석하는 사람마다 이 부분이 시 전체의 아름다운 신앙을 완전히 깨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이 자기의 원수에 대한 복수 감정에서 말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가 시인의 하나님, 야웨의 원수(경건하고 양심적이고 사랑과 선으로 원수를 대하는 시인 개인의 원수라기보다 이 시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원수로 보아서)이니까 야웨의 저주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조로 말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에는 이런 저주의 시가 의심 없이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에서는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58: 6~9; 69:22~28; 137:7~9). 예레미야 같은 사람도 원수의 불행을 기원했습니다.(렘 11:20) 지혜문학에서도 이것을 그렇게 잘못된 것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삶에서 흔히 있었던 태도로 말하고 있습니다.(잠 17:13) 이렇게 해석하면 시인의 저주시가 적당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독일 학자 슈미트(Hans Schmidt)는 6~20절까지의 내용은 시인이 저주하는 말이 아니고 원수들의 시처럼 비인도적임을 보여 준 것이라 합니다.
이런 해석을 크라우스(H.J. Kraus)도 따르고 있습니다. 다만 29절만이 시인의 입에서 나온 저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부자연스러움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16절에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는 말이 원수가 시인에게 악담을 한 말로서는 부합되지 아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 성서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저주는 시인 자신이 그렇게 금식하면서 육체가 피곤할 지경에 이르도록 원수를 위해서 기도할 만큼 사랑과 선으로 대한 태도와는 너무 모순이 된다고 해도 역시 이 모순을 가진 것이 연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랑에 배신당한 시인이 하나님을 대적한 자기 원수에 대하여 저주의 말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나은 해석 같습니다. 구약의 시인만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크리스천들도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자기의 핍박자와 고통을 주는 원수에 대하여 하나님께 저주를 호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약점입니다. 본문 시인이 이런 약점을 나타내는 저주의 말을 6~20절까지 말했다고 해도 그가 원수의 악을 선으로 갚고, 미워하는 대적을 사랑하고 금식 기도를 하여 육체까지 쇠약해졌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29절)라고 간구하는 심정을 우리는 인간적인 표현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수가 본문 시인의 "영혼을 대적하기"(20절)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 시인의 사랑과 저주는 자기의 독백이 아니고 자기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아뢰는 기도로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시인의 신앙 장점을 여기서도 본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자기 기도에서 솔직한 대화를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 모든 의심과 염려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본다."라는 바이저의 말처럼 전적인 신뢰의 기도는 본문 시인의 자랑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를 통하여 원수를 위한 사랑이 더욱 나타나기를 빌어야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본문의 말씀을 좀더 쉽게 풀이를 해 보았습니다. 특이한 내용의 그 주제는 2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개인적으로(인간적으로)는 본문의 시인인 다윗은 자기를 미워하고 비방하고 까닭없이 괴롭히는 원수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고(1~5), 그 둘째는 적(원수들)에 대한 하나님께 보복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6~20) 이 2가지 주제가 오늘날 우리들애게 주는 교훈의 의미를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첫째로 배울점은 본문 시편은 다윗의 절규로 시작됩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는 지금 사방이 거짓과 악독한 입술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까닭 없는 미움과 공격이 나를 겨누고 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이 공격이 낯선 이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는다.” (4-5절)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적대 관계가 아닙니다. 사랑을 주었으나 배신으로 돌아오고, 선을 베풀었으나 악으로 갚아온, 신뢰가 깨어진 관계의 고통입니다. 아마도 지금도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한 상처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진심이 왜곡되고, 호의가 권리로 변질되며, 믿었던 사람에게서 칼날 같은 말을 듣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억울하고 참담한 심정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선을 악으로 갚는 세상 속에서 사는 우리들이니 더욱 절실합니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4절). 이것이 바로 시인의 가장 아픈 상처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의 배신은 견딜 수 있어도, 사랑한 사람의 배신은 영혼을 찢어놓습니다. 이를 때 유일한 길은 "나는 기도 할 뿐이라".(4절)는 시인의 독백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진실을 알게 되지요. 억울할 때, 마음이 무너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그것은 사람에게 하소연 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하소연하는 길이지요.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도 이 믿음의 길을 걷는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둘째로 명심해야 할 교훈은 고통이 쏟아낸 저주에 대한 적에 대해 보복의 기도입니다. (6-20절) 문제는 그 기도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원수를 향해 끔찍히 저주를 쏟아냅니다. 그의 직분을 다른 이가 빼앗고,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의 모든 재산은 타인의 것이 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조차 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를 기억하는 모든 흔적이 끊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이 구절들을 읽으며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저주를 섣불리 정죄하기 전에,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 정직한 감정의 표출: 이것은 위선적인 경건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쏟아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한 모습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상처 입고 분노하는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2). 공의에 대한 갈망: 이 기도의 밑바탕에는 사적인 복수심을 넘어선, 훼손된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강력한 열망이 깔려 있습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받는 세상의 부조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정의를 실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칼을 들지 않고, 심판의 주권을 전혀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3). 궁극적인 원수, 사탄을 향하여: 신약의 관점에서, 이 저주는 궁극적으로 다윗을 대적하고, 나아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의 세력, 즉 사탄을 향한 선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장 20절에서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설명하며 시편 109편 8절을 인용합니다. 이는 이 저주가 그리스도를 판 배신자에게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며,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영적 세력을 겨냥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적에 대한 다윗의 보복 기도는 억울할 때 기도하며. 싸우지 말고 무릎 꿇어야 할 때란 것입니다. 또한 보복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맡겨야 하며,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망보다는 말씀을 붙들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이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종래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가까이 하시며,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억울함 속에서 무너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상처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눈물이지만, 하나님은 그 눈물을 바꾸어 찬송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악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마지막을 결정합니다. 원수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오른편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 외칠 수 있습니다. “주는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4). 결론: 본문 시편은 배신당한 한 영혼의 처절한 부르짖음이자, 원수를 향한 소름 끼칠 정도의 저주가 담긴 기도입니다. 또한 본문의 시인은 자기를 미워하고 비방하고 까닭없이 괴롭히는 원수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는 "나는 사랑하지만 저희는 오히려 나를 대적하오니 나는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저들의 악을 나는 선으로 갚고 나는 사랑합니다."(4, 5절) 라는 것입니다.
본문 시의 주된 핵심의 그 첫째는 자기를 미워하고 비방하고 까닭없이 괴롭히는 원수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고(1~5), 그 둘째는 적(원수들)에 대한 하나님께 보복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6~20) 시인이 자기의 원수에 대한 복수 감정에서 말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가 시인의 하나님, 야웨의 원수이므로 적에 대한 복수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시를 ‘저주 시(Imprecatory Psalms)’라고도 하는데,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는 신약의 메시지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여, 지금의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 시편은 배신당한 한 영혼의 처절한 부르짖음이자, 원수를 향한 소름 끼칠 정도의 저주가 담긴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09편은 억울함과 원수들의 공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들도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억울한 일이 있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며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평안케 하시고, 의로운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본문 시는 인간의 억울함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바뀌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처음엔 눈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엔 찬송으로 마쳤습니다. 그 변화의 비밀은 단 하나, “기도”였습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에는 억울한 순간이 있습니다. 이유 없이 오해받고, 진심이 왜곡되고, 선의가 악의로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기도는 상황을 즉시 바꾸지 않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방향을 바꿉니다. 원수를 향하던 시선이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분노의 손이 내려지고, 무릎이 꿇어집니다.억울함이 고통이 아닌, 믿음의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분노할 때보다 기도할 때 더 강하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 때, 그분이 말씀하시고, 우리가 포기할 때, 그분이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기도는 ‘가만히 있음’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행동입니다. 그분이 대신 싸우시도록 내어드리는 믿음의 순종입니다. 다윗은 복수를 멈추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의 억울함은 하나님의 역사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무너뜨린 말들을 뒤집어
증거의 말로 바꾸셨습니다.
억울함이 기도로 바뀌면, 그 자리가 하나님의 일터가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억울함을 자신의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해명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초대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억울할 때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태도’를 보십니다. 억울함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는가? 침묵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가? 상처 속에서도 믿음을 놓지 않는가?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다윗의 결론입니다. 그는 원수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편 앞에서 회복되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 곁에 세우는 힘입니다. 그분이 서 계신 한, 억울함은 나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처음엔 억울함이었지만, 마지막은 감사였습니다. 그의 상처는 노래가 되었고, 그의 눈물은 예배가 되었습니다. 억울함이 기도로 바뀌면,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십니다. 찬양이 바로 시편 109편의 결론입니다. 기도는 복수보다 강하고, 찬양은 상처보다 높습니다. 끝.
2026. 2. 6.
山下연구원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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