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60. 강요는 사랑의 모독입니다.

solomong 2026. 1. 18. 13:44

 

60. 강요는 사랑의 모독입니다.

본문: [신27:11-26, 마23:1-36]

 

1. 서론:실존주의 신학자 ‘키엘케골’의 저서 중에서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비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한 젊은 왕자(王子)가 자기의 미래의 왕후가 될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큰 도시의 빈민가 지역에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한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왕자는 그 여성에 완전히 매료 되었습니다.당장 하마(下馬)해서 "나는 그대를 사랑하노라."라고 고백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왕자 체면 때문이었습니다. 왕자는 환궁해서 그 날부터 상사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 녀에 대한 영상은 눈에 삼삼! 귀에 쟁쟁! 했습니다.

 

그런데 이 왕자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한 가지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는 어떻게 하면 그 여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왕자라 할지라도, 그 여성의 사랑을 얻어서 결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당장 신하를 시켜서, "그 아가씨를 대령하라."고 명령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요, 강제이지, '참 사랑'일 수는 없다는 것이 왕자의 애정관 이었습니다.또한 그 상대방에게 "내가 장차 임금이 될 이 나라 왕자라."고 해서 결혼을 청하면, 진정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부귀영화’의 동기에서 결혼할 수도 있고, 더 없이 영광스런 것이기는 하지만, 복잡한 권력구조 관계에서 비극적일 수도 있었습니다. 즉 사랑엔 다른 동기가 개입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왕자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농부로 가장해서 그녀 앞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관심을 얻은 후에 정식으로 구혼을 하고 나서, 자기의 가면(왕자신분)을 벗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여러 가지로 고민하던 끝에, 그 왕자의 마음속에 진정한 해결책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즉, 그는 자기의 왕가의 의복을 벗어버리고 그 여성이 살고 있는 이웃 가까이로 옮겨가 살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왕자는 목수 일을 자기의 직업으로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낮과 밤으로 일하는 동안에 또는 저녁이 되어 일손을 쉬는 동안에, 그 왕자는 이웃에 사는 사람들과 친숙하기에 힘쓰고 그들의 흥미와 관심거리를 같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사용하는 언어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일하는 동안에 만일 그 왕자에게 운이 좋으면, 극히 자연스런 방법으로 그가 연모하는 여성과 친숙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자기가 이미 그 여성을 사랑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그 여성도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그 때는 정식으로 청혼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왕자는 이러한 자기의 결심을 실행했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 그 여성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극적으로 자기 정체에 대한 폭로를 하게 되었습니다.

 

2. 본론:여러분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의 생활 속에 들어오셔서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고 복종할 수 있도록 명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강제하거나 강요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사랑에는 원래가 강요(强要)가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강요는 사랑의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충성과 봉사와 사랑입니다. 그는 임금의 영광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가장 약한 어린 아기로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의 본문 말씀은 상당히 엄격하시고, 명령적이고, 순종을 강요하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부의 사랑이었습니다. 모세의 고별 메시지 속에서 복과 저주를 놓고, 복종하면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다고 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믿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강압적인 방법을 강구했지만, 결국 이 방법을 변경하셔서,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한 정 반대 방법인 힘 있는 자가 약한 자와 타락하고 죄로 죽을 자들을 위해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양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위선(僞善)-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인격을 가장 미워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모세오경 속에는 줄곧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및 신명기에서 거듭 거듭 되풀이 되는 것은 애급의 굴종의 삶에서 탈출시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명심하고,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 것이며,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에 있어서 십계명, 의식 법, 시민법, 사회법을 잘 지켜 행하면 복을 받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공포의 하나님으로 비쳐진 이스라엘의 종교는 결국 표면적으로 속 마음과는 다르게 의식적이고, 형식적으로 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벌을 받고, 저주를 받아 멸망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는시늉을 하더라도 마음에도 없는 종교의식에 취중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흘러오는 어쩔 수 없이 겉모양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습관화되고, 유전되고, 전통화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스라엘의 후기 주전 8C. 예언자 아모스, 이사야, 및 호세아 등은 신랄하게 비판을 가했던 것입니다.

 

“너희는 벧엘로 가라, 그래야 죄를 짓겠지, 너희는 길갈로 가라 그래야 죄를 더 지을 것이 아닌가!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손에 들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치면서, 누룩으로 넣은 떡으로, 감사제를 올리며, 특별감사 예물도 바치며, 공포하고 선전하는구나, 너희들이야 말로, 이런 일을 즐겨하지 않는가! 아하 이스라엘 자손들이여, 이것이 주 야웨 말씀이시다.”(암4:4-5) 거의 동시대의 예언자로 활동했던 이사야는,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형식적인 거짓 예배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사1:10-20)

 

위의 아모스서의 말씀을 현대적인 말로 풀이한다면, “그 따위 행실을 하면서, 예배당에만 가면 그만인 줄 아니, 너희가 실제적인 삶과 종교의식인 교회출석이란 경건행위가 불일치하다면, 너희는 오히려 교회당에 가는 그 일 때문에 더 죄를 짓는 것인 줄 모르는가!”라는 식의 야유적인 말의 뜻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종교인에 대한 모독도 이만하면 최대의 신랄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당에 가지 말라.”는 금지보다 더 골수에 사무치는 아유와 조롱, 아모스는 “너희는 벧엘로 가라”는 말에서 인간의 내면적인 죄의 근성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벧엘 성소가 죄의 용서를 받을 곳이 아니라, 죄를 지을 장소가 되어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이스라엘의 형식주의 신앙인들에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너희 놈들은 성소 밖 어느 장소에서 너희들의 더러운 손과 발이 죄를 짓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제는 성소 그 신성한 제단 앞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아니냐? 라는 뜻입니다. 벧엘은 이스라엘의 모체적인 성소입니다. 옛날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자기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길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이 한해에 한 번씩 찾은 곳이며(삼상(7:6), 사울이 여기서 왕이 된 곳이며(삼상11:14-15.), 항상 중요한 제사행위가 집행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삼상10:8, 11:15, 13:8-10, 15:21.)

 

그래서 “길갈로 가지마라.”(호4:15), “저희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서 저희를 미워하였노라.”(호9:15, 12:11)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종교행사였는가 보다, 이스라엘이 드린 제사는 거룩한 성소에서 행한 성사(聖事)가 아니고, 속사(俗事)버릇처럼 행했다는 것입니다. 종교행사 그 자체가 범죄로 화할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아모스가 말하고자하는 뜻은 이스라엘 부유층의 사람들이 종교적 행사를 성소에서 드리면서 그것을 하나의 유흥기분이나, 오락의 기회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도가 죄로 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시109:7) 어느 교회 목사나 장로가 자기들의 반대자를 위하여 저주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면 알 것입니다. 장로와 목사가 단합해서 교회당에서 헌금을 착복하고, 노회에서 회의록을 위조하여 노회장에 당선되고, 형제를 정신적으로 죽일 것을 음모하고, 노회. 총회재판에 금전이 왔다 갔다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당, 제단에서 벌어지는 악행들입니다.

 

이사야가 규탄한 예루살렘 성도들의 종교적 행사가 죄악 그 자체라고 했고(사1:11-14), 호세아도 그들이 고기를 하나님께 바쳐 제사를 드리건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식도락'을 위한 것이라고 비판을 했습니다.(호8:13) 이래서 신약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 교인을 힐난하게 비판했던 것입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의식적인 종교에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행하는 종교로 변혁해야 된다는 의미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잔과 대접의 곁은 깨끗하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이 신앙은 강요나 어떤 위협 즉,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든가, 남편이 하는 사업 때문에, 자녀의 성공을 위해서, 그래서 예수를 믿고 기도한다면, 불공(佛供)드리는 것과 다를 바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 구속의 은총에 감격하여, 교회에 나오고, 감사기도를 들이고, 헌금을 드리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선교하는 그 동기가 바로 조건이 아니라, 그 구원의 결과로 감격한 심정에서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신앙행위를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자기를 배반하고 다른 남자에게로 달아난 부정한 아내 '고멜'을 달래고 달래어, 다시 자기에게로 돌 아 오게 하는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서 반역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께서 고통 하시면서 용서하는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감사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본회퍼는 그의 <신도의 공동생활>이란 저서에서, 형제를 미워할 수밖에 없지만, <그와 나 사이>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서 계시기에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3. 결론:신앙에 있어서 <강요는 사랑의 모독입니다.> 조건부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모독이기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께서 선수적인 사랑을 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복음의 대강령인 것입니다.(마22:37-40)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Dialogue), 절대의존의 정서로서 구속은총에 감격하고(Feelings), 험난한 인생길을 지켜주시기에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받고(Acceptance), 이러니 앞으로도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사랑해 주심을 이해하고, 이해는 사랑의 별명이기에(Understand), 그래서 개인 윤리적인 차원에서 형제를 용서하고(Forgiveness),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니, 이제부터 조건부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발적인 심정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강요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끝.

 

2007. 9. 15.

山下연구원 원장: 양       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