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58. 요셉의 눈물

solomong 2026. 1. 5. 11:19

 

요셉의 눈물

(본문: 창 50:15~21)

 

1). 서론: 눈물은 단순히 비애를 표시할 수도 있고, 또한 패배자의 비참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만, 눈물은 말 없는 웅변으로써 위대한 일을 성취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셨다는 성서 말씀이 적어도 세 번 나타나 있습니다. 한 번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한 번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면서,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과 땀이 피처럼 흘리며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을 향하여, 에베소 교인을 향하여, 고린도 교인을 향하여, 예수님을 생각해서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 역시 새벽마다 닭이 울 때, 옛날 자기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사실을 기억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눈물은 실로 아름답고 고상하며 깊은 교훈을 줍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요셉이.......울었더라.”-요셉이 그 형제들의 화해 요청에 대해 눈물을 흘린 것은 이미 그의 형들을 용서하였음에도 불구하고(창45:4-8), 그의 형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구덩이에 빠졌을 때, 애급으로 팔려 갈 때, 음녀의 모함에 들었을 때, 바로의 옥 중에서 종살이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씨앗 같아서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낮에도 자라며, 비오는 때도, 해가 빛나는 때에도 자라게 하십니다.

 

②.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까.”- 이 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에서 나온 말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형들에게 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형들을 정죄한다면, 하나님께서 벌써 하신 일에 반항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놓는다는 말이 됩니다. 요셉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높은 차원에서 관찰하여 인간의 흥분과 격정을 초월했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 17절에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이때, 요셉의 울음이 주는 의미와 교훈은 실로 큰 것입니다. 때는 요셉이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아 애급으로 팔려 가서 千辛萬苦를 겪은 이후 드디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으로 애급의 총리대신이 되고, 그의 아버지와 형제, 가족 70명을 애급에 데려다가 편히 살게 한 뒤 그 아버지 야곱이 죽어 고향 가나안 땅에 장례를 지내고 돌아왔을 때입니다.

성경에는 요셉에게 어떤 허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가 어릴 때, 형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도 요셉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허물이 있었다면 그 아버지 야곱의 편애(偏愛)가 허물이었을 것입니다. 하여간, 이때 요셉의 마음에는 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가득하였습니다만, 죄지은 그 형들은 혹이나 요셉이 자기들을 보복하지나 않을까 하는 무서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보복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본문의 나타난 바로 이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포에 떤 나머지 요셉 앞에 꿇어 엎드려 수 십 년 전 자기들이 공모하여 요셉을 팔아먹고, 아버지에게는 들짐승에게 잡아 먹혔다고 보고한 그 묵은 죄를 새삼스럽게 자백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남을 친자는 발을 오그려서 자고, 맞은 자는 발을 펴고 잔다.'라는 것은 이런 때를 가리킨 듯합니다. 이런 공포에 쌓인 형들의 자복을 들었을 때, 요셉은 무슨 말도 말하기 전에 그냥 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요셉의 눈물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원수 갚기를 원합니다. 옛날 사형(私刑)이 성행할 때, 무지한 보복 이야기가 많습니다. 전쟁에서 적의 왕을 잡으면 그의 목전에서 그의 자녀를 학살하고, 그의 눈을 뽑고, 손가락을 자르고 무자비한 보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승리자의 일종의 쾌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제사를 바쳤을 때 그는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장수' '부귀' '원수의 생명을 끊는가.' 등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그가 백성을 다스릴 '지혜'를 구한 것은 높이 칭찬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복은 장수·부귀와 더불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 이때, 원한다면 형들에게 보복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애급의 총리대신으로 그의 명령이 아니면 '애급인'들은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7년 대흉년 정책에 성공하여 백성을 구제함으로 그의 권능과 위세는 장대하였습니다. 이런 요셉이 피난민인 형들을 보복한다는 것은 파리 한 마리 잡는 힘도 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요셉은 아버지 사후인 이때, 보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살아있을 때는 아버지가 만류해서 보복을 못 하였을 것입니다만, 이제 아버지는 별세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는 요셉이 어떻게 하든 누가 만류할 사람도, 누구에게 미안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권세나 이런 기회를 타서 형들에게 보복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본의 내촌(內村) 선생은 “양은 자기를 해치는 사람에게 어떻게 보복할까 하는 생각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하나님의 아름다운 어린 양이었습니다. 요셉의 눈물은 완전한 용서를 말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요셉이 이때 말로써 적당히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했을 경우 형들은 감사하다며 물러갔을 것입니다만, 그들의 마음 한쪽 구석에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말없이 울었습니다. "눈물에는 거짓이 없다. 단, 무기로 생각하고 짤짤 우는 여자의 눈물은 제외한다.”라고 어느 문인의 글에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어찌했든 요셉의 용서는 거짓이 없는 것이요, 완전한 용서였습니다. 이때 요셉의 형들은 여지없는 약자였고 요셉은 큰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요셉은 형들 앞에서 울었던 것입니다.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유다의 모략으로 은 20에 팔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동족인 유대민족에게 거부를 당하며 제자 가롯, 유다에게 은 30량에 팔렸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처신에서 신적(神的)인 용서를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는 모습과 모형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강자는 정적(政敵)의 약점을 노려 치는 것입니다. 또 약자는 마지 못 해서 굴복을 하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절대적 강자가 자발적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단,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그는 형들을 용서하는 이유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철저한 신앙자의 모습입니까? D. Bonhoeffer는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랑할 수 없는 그와 나 사이 그 중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의 저서 「옥중 서간」(獄中 書簡)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요셉이 애급으로 온 것은 형들의 무자비한 손길에 의해 팔려 온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400년간 손 노릇하리라.” (창 15:13) 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상의 두 가지 사실에서 불신앙 자는 전자(前者)만 봅니다(애급에 팔려 온 것=원한) 그러나 신앙자는 후자(後者)를 치우쳐 봅니다(하나님의 섭리).

만일에 전자만 바라볼 때 거기엔 원망(怨望)뿐입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거기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후자를 볼 때, 참된 용서와 감사 및 평안함이 있습니다. 인생의 여정엔 '사람의 장난'과 '하나님의 섭리' 두 가지 사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불신앙 자는 육신의 눈으로 '사람의 장난'만 봅니다. 신앙자는 ‘인간의 장난'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봅니다. "나를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고 우리는 자주 원망합니다.

 

요셉이 눈물을 흘리며 운 까닭은 자신의 과거의 고통, 억울했던 그 상황이 기억나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운 것이 아니라, 요셉은 형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애급에 있는 동안 형들은 얼마나 괴롭게 살았을까? 얼마나 양심에 찔려 힘들게 살았을까? 내가 죄를 용서했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얼마나 불안하게 살았을까?” 등등을 생각하면서 형들이 가여워서 울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연민에 찬 사랑의 눈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기독 신자의 가슴엔 요셉과 같은 진솔한 사랑의 눈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요셉의 눈물은 형들의 잘못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있어 형들과 그들의 자손을 보호하여 먹여 살리기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요셉의 눈물은 단순한 감상적인 용서가 아니라, 신앙에 입각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하기를 '열매 없는 친구가 있느니 차라리 원수가 있어라'라고 했습니다. 꽃들은 개화 만발했고, 녹음은 점점 짙어가는 7월임에도 왜 이리도 우리의 가슴은 싸늘한지요.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을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시간을 맞아야 할 시점에 우리는 당도했습니다.

 

특별히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이 횡횡하여 저마다 허우적거리는 이 계절에 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바로 알고(섭리), 지난날에 나를 수난과 고독에 젖게 했던 저마다의 험상궂은 얼굴들을 진실로 용서하는 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따스한 사랑의 물 한 잔이라도 마음으로 울고 있는 부모, 형제자매, 고아와 과부, 연세 많으신 어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속에서 기쁨의 평화가 용솟음을 칠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수난의 계절’을 보내었으면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