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56. 고난의 현장

solomong 2025. 12. 6. 11:00

56. 고난의 현장

(시 107:1~ 43)

1). 서론: 우리의 인생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를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시인 Henry wadsworth Longfello“인생의 고통은 우리를 쓰러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를 더 크게 보여주려는 도구이다.”라고 했습니다. 광야 같은 자리, 감옥 속 어둠의 자리, 병상의 자리, 풍랑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역사하시며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시편은 우리를 향한 초청입니다. 어제의 은혜를 잊지 말고, 오늘의 은혜를 감사하며,내일의 은혜를 기대하며,“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선포하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2). 본론(Text): 포로 귀환기 작품으로 보이며, 제5권(107!150편)의 서론으로 그 특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105, 106편과 일치하여 동반시가 됩니다. 내용은 과거를 회고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서론(1~3)에 이어 감사(4~32)와 기도(33~43)로 크게 나누어 집니다. 즉 광야에서(4~9), 포로에서(10~16), 병에서(17~22), 및 바다의 풍랑에서(23~32)의 구원을 감사하고, 토지의 회복(33~38)과 압제자의 처벌과 선인의 구원(39~43)을 위해 기도합니다.

3). 본론(Context): 하나님은 인간을 그 고통의 현장에서 건져내어 주시는 분임을 노래한 시가 이 107편입니다. 본문의 시는 단일한 시라기보다 종합적인 감사의 시요. 또 찬송의 시입니다. 여기 고통의 현장을 말하는 사람은 첫째 나그네(4~9절), 둘째 감옥에서 석방된 자(10~16절), 세째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자(17~22절), 네째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항해자(23~33절) 등입니다.

모두가 심각한 고통의 현장에서 구출된 사람입니다. 이렇게 건짐을 받은 것은 시인 자신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이스라엘의 공동예배 때에 이렇게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과 믿음의 공동체 앞에 각각 자기들의 구원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절차 때에 드린 찬송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경험은 모두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건짐을 받을 수 없었음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에는 감사와 찬송의 이중의 후렴이 노래 중간에 삽입되었습니다. 6절과 8절, 13절과 15절, 19절과 21절, 28절과 31절입니다. 본문의 시는 인간이 경험하는 4가지 고통을 살감한 사람들이 각각 그 당면한 괴로움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고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노레입니다.

그런데 본문 시는 어느 개인들의 현재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기보다는 과거에 경험한 4가지 고통의 현장을 회상하며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며 이 찬송을 부르면서 그 고통을 현재의 것으로 되살려주고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도 현재적인 의미로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의 모임"(32절)에서 신앙의 공동체 사람들에게 미래의 구원을 보장시켜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노레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는 고통의 현장이 여러 차례 언급되면서도 탄식시 형태의 시가 아니고, 고통에서도 찬양하는 감사시 형태입니다. 본문 시의 성격은 첫째 부분(1~3절)에서는 성소에서 제사장과 백성들이 교창식(交唱式)으로 부른 노래임을 보여주며, 둘째 부분(33~43절)에서는 예배드리는 전체 신앙 공동체가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내용입니다.

시 전체의 분위기는 감사와 찬양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시의 독특한 형식이 시편 136편에 나타난 대로 여기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웨께 감사 찬송을 부르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1절=136:1) 여기서 감사의 이유를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시편136편은 이 귀절이 매절마다 나올 정도로 감사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 시에서 보여준 첫번째 고난의 현장인 나그네의 고통을 살펴봅시다. (4~9절) 여기 이 나그네는 광야의 사막길에서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 자신이 매우 지친 사람입니다. 이런 경험을 언제 누가 했을까요? 개인의 경험보다도 민족적인 경험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광야 40년을 지내는 동안 이런 경험을 얼마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그들의 고국을 향한 도중에서 이런 방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2 이사야는 실지로 이런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사43:14~21, 49:10) 만일 전자의 경우를 취하면 이 시의 연대는 포로 전 시대의 작품이요, 또한 후자의 경우라 하면 그 연대는 포로 이후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결정지을 수 있게 하는 확증은 없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경험을 전후로 나누는 것도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는 어느시기이든 어떤 개인이 이런 고난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겠습니다. 다만 바다의 위험 같은 것은 솔로몬시대의 무역선들이 쉽게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저작 시대 문제보다 인생의 대표적인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받고 그 은혜를 감사함은 이스라엘 모든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다음 감금(監禁)의 생활에서 해방받음입니다. 누구의 감금이냐 할 때 바벨론 포로 당시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감금을 생각할 수 있고, 그 이후 바벨론 생활 자체를 민족 전체의 감금이라 볼 수도 있고, 그 보다 좀더 이른 시대 상황으로서는 예례미야의 감금, 또는 옛날 요셉의 감금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이 시인이 언급한 것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감금당한 자의 현장의 고통은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흑암에 앉았고, 사망의 그늘에 앉은 것이며, 곤고와 쇠사슬에 메임이다."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 감금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11절)에서 유다의 멸망 당시를 상상케 합니다. 여기 이 시인은 고난의 이유보다도 또한 고난의 현실감의 문제보다 구원의 확실성과 해방된 그 사실에 대한 감사와 찬송의 심정에 관심하고 있습니다. "흑암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다."(14절) 함입니다. 이는 다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사랑의 영원함 때문에 찬양 합니다.(15절)

다음, 본문의 시인은 병과 고통을 연결시켜 "식욕을 잃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18절)라고 합니다. 물론 무슨 질병인지 밝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말씀을 보내어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셨다."(20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데바로"를 "다바로"로 읽고 "역병"(Pestilence)으로 읽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의 현장 중, 병고가 얼마나 인간을 괴롭히는가는 병을 앓아본 사람 만이 압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손길이 의사의 손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다음 본문의 시인은 풍랑 중에 구원을 노래합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광풍이 바다 물결을 일으킨다."(25절)라는 말씀입니다. 저희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또 바다 밑으로 빠진다."(26절)는 것은 풍랑에 배가 시달릴 때의 모습입니다. 이런 위험속에 선원들의 영혼은 거의 죽어 녹는 다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린다."(27절)라는 것은 친히 풍랑을 겪어 본 사람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을 잔잔케 하신다."(29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신 기사도 여기 이 시편과 동일합니다.(막 4: 39) 이렇게 바다의 위험에서 건짐받음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고난의 현장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님의 선함과 사랑이 건져 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사료됩니다.

이상과 같이 본문을 좀더 쉽게 풀이 해 보았습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기억과 망각의 반복입니다. 시편 106편이 우리의 망각과 불순종을 돌아보며 회개의 기도였다면, 오늘 시편 107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찬양의 시편입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절) 이 고백은 단순한 종교적 인사가 아닙니다. 이는 인생의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신앙의 핵심 진리입니다.

환경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우리의 삶은 흔들리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드리는 감사와 찬양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품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시편 107편은 4 가지 인생의 위기―광야의 나그네 길, 감옥속 어두움의 삶. 병상의 자리, 질풍 노도의 정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자리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셨도다.”라고 하나님의 인자한 사랑의 구원을 받게 되는 말씀입니다.

(1). 광야 길에서 나그네로 방황하는 자 (4–9절): 광야의 현실은 길 잃은 인생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되었지만 곧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머물 곳도 없는 사막에서 길을 잃은 그들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직장을 잃고 미래의 방향을 알 수 없을 때, 관계가 끊어지고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영적으로 메말라 기도의 길, 말씀의 길을 잃었을 때,우리도 광야를 걷는 나그네가 됩니다.

광야의 특징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없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길을 내십니다. 인생의 길을 잃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광야 같은 인생이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내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길만 열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분입니다.

(2). 감옥 속 어두움의 삶 (10–16절): 어둠은 단순히 햇빛이 없는 공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흑암”은 하나님 없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둠 속에 갇히고 쇠사슬에 매였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은 결국 영적 어둠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말씀에서 떠나면 빛이 사라지고, 죄에 사로잡히면 마음이 쇠사슬에 묶입니다.

쇠사슬을 끊는 열쇠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슬을 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옥문을 열어주십니다. 존 뉴턴은 한때 노예선 선장이었고, 죄의 사슬에 묶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풍랑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그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Amazing Grace”라는 찬송을 지으며 고백했습니다.“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고 말입니다.

(3). 병들어 고통당하는 자 (17–22절): 본문은 병의 원인을 단순히 육체적 원인으로만 보지 않습니다.“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고난을 받아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7–18절) 라는 것은, 영적 불순종과 죄가 우리의 삶에 고통과 질병을 불러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물론 모든 질병이 죄 때문만은 아니지만, 죄의 결과로 인한 병이 분명히 있습니다. 탐욕으로 인한 병, 분노와 미움으로 인한 병, 방탕으로 인해 스스로 초래한 병.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이런 모습이 많습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19절)라고 한 것은, 병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의학이 필요하고 약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 무릎 꿇을 때 진정한 치유가 시작됩니다.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죽을 병에 이르렀지만,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0절)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음을 말합니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히 4:12), 치유와 회복을 가져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상처 입은 마음을 고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며, 때로는 육체의 병까지도 치유하십니다. 한 성도가 암 진단을 받고 절망했지만, 말씀을 붙들며 하루하루 기도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라고 함은 그 믿음이 그의 영혼을 살리고, 육체의 병도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한 말씀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의 행사를 선포할지로다.” (22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한 자는 단순히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간증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곧 감사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을 주셨다면, 그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 회복을 주셨다면, 그 은혜를 나누는 간증의 삶. 이것이 치유받은 자의 합당한 응답입니다.

모든 병이 죄 때문은 아니지만, 죄가 병의 원인이 될 때가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회복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치유와 회복의 능력입니다. 은혜 입은 자는 감사와 간증으로 응답해야 합니다.혹시 오늘 영혼이 병들고 마음이 지쳐 있습니까? 육체의 병으로 신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주께서 말씀으로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4).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자 (23–32절): 시편 기자는 바다를 항해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위기를 묘사합니다.광풍이 일어나 배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장면은, 인생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인생도 바다의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건강의 풍랑, 가정의 풍랑, 경제와 관계된 풍랑, 예기치 못한 위기의 파도!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지혜와 능력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들의 모든 지혜가 구하여졌도다.” (27절)라고 해도, 인생의 큰 파도 앞에서는 무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전환점이 있습니다.“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28–29절)라고 하십니다. 풍랑 속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노련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우리를 평안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제자들은 죽을 것처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순종하더라.” (막 4:41)라는 것을, 그 순간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풍랑을 잠잠케 하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들이 원하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0절)라는 것은 하나님은 단순히 풍랑을 멈추시는 데 그치지 않으십니다. 풍랑을 지나 목적지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던 항구, 곧 안식과 평강의 자리, 구원의 완성으로 이끄십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반드시 공동체 앞에서 찬양해야 합니다.혼자만의 은혜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선포하는 것이 참된 응답입니다.

한 가정이 사업 실패와 질병의 풍랑 속에 무너졌지만, 함께 기도하며 다시 일어났습니다. 인생의 풍랑은 우리의 능력을 무너뜨립니다. 풍랑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를 주님은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위기를 해결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원하는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은혜 입은 자는 반드시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인생의 풍랑 속에 계십니까?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분은 폭풍을 고요하게 하시고, 반드시 여러분을 원하는 항구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4). 결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라.(33–43절)라고 하심은 시편 107편의 마지막은 인생의 다양한 상황을 다시 요약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전의 은혜를 베푸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가 강을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을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광야를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을 샘물이 되게 하사.”라고 하나님은 상황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번영이 교만으로 변할 때는 강을 광야로 바꾸십니다. 그러나 겸손히 부르짖는 자들에게는 광야를 샘물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 삶의 환경을 바꾸는 이는 사람도, 상황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권세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세우십니다. 이 역전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드러냅니다. 한 무명의 전도자가 평생 시골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죽고 난 뒤, 그의 삶이 알려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무시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삶을 높이셨습니다. 마지막 결론은 분명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행하심 앞에 침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역사의 모든 장면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닫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끝.

2025. 12. 5.

山下연구원: 양 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