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
(시 110:1~7)
-설 명절에 젊은이들에게 선물 하는 말씀-
1). 서론: 본문 시편은 시인 다윗이 장차 오실 Messiah(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예언을 담고 있으며, 이 110편은 신약 성서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시편 구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Messiah를 만왕의 왕이자 멜기세덱 반열을 따라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그리스도는 Messiah로써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궁극적인 승리와 심판 그리고 영광스러운 완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통치를 하시며,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으로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이젠 만왕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모든 원수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젠 우리는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처럼 기쁨으로 헌신하며 왕의 통치에 참여하는 거룩한 백성임을 기억하고 담대히 나아갑시다. 특히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를 주제로 한 본문을 심도 있게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M.Luther는 유명한 Messiah 시(詩)라는 뜻으로 “황금과 다이아몬드의 상자 속에 둘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신약성서에도 가장 많이 인용된 구절에 속합니다.(마22:44, 26:64, 막12:36, 눅20:42, 행 2:34~35, 히1:13, 5:6, 7:1) 시 내용은 1. 메시아가 왕이 되시고(1~3), 2. 제사장이 되시며( 4), 3. 승리자가 되실 것(5~7)을 예언합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의 시는 시편 중에서도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처럼 신약성서에 많이 인용된 시도 없습니다. “다윗과 같은 임금이 주라고 부르신 분은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이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이 시의 첫 절을 인용한 이유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유대인 자신들이 반대하기에 유대인이 잘 아는 이 고대 시 한 구절로써 예수께서 메시아 되심을 입증하려고 한 것입니다.
본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시인 다윗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영력(靈力)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의 역사 계획을 한 임금과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이 왕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맡은 군주(君主)로서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시온이 그의 왕국의 중심지요, 여기서 행하는 그의 정치는 모든 원수 적들을 굴복시킵니다. 이 나라의 주권을 침략하는 모든 원수 적들과의 싸움에서 용감한 청년들이 속속 일어나서 비록 새벽이슬처럼 사라지지만 새 아침을 빛나고 신선케 하는 역할을 이 청년들이 감당합니다.
그 임금은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아론의 혈통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계통을 따라 된 제사장입니다. 이는 옛날 멜기세덱의 제사장 반열을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나라를 대항하는 적들이 일어나 전쟁을 시작해 와도 왕들 전부를 쳐부수고 시원한 물을 마시는 깨끗하고 시원한 승리를 거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지만, 여기서 문제는 그 왕이 누구냐입니다. <유다 나라 역사상 나타났던 어떤 임금이냐, 또는 미래에 나타날 Messiah 왕이냐?> 라는 것입니다.
본문 시의 나타난 왕의 권위와 그 위치가 하나님의 권위와 그 사명에 직결되어 있기에 시편 2편과 72편과 같이 Messiah 시로 불리는 시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대제사장이라 말한 히브리서 기자의 사상(히5:5; 7:17, 21)은 본문 시의 4절에 의해서 확실한 소신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에서 Messiah 시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排除)한다면 모르거니와 그것을 인정하는 초대 교회 신학자들의 입장을 그들 나름대로 정당하다고 한다면 이 110편 시도 예수의 Messiah 성격을 인정케 하는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의 종교가들, 바리새파, 사두게, 서기관들은 이 시를 그렇게 읽지 않으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배척하였고 또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초대 교회의 해석대로 Messiah 시로 읽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명상(瞑想)의 관심은 그러한 신학적, 해석학적인 복잡한 문제보다 “청년은 새벽이슬”이라 함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본문 시 자체의 해설이 복잡하듯이 이 구절의 해석도 복잡합니다.
청년이 누구냐 함을 생각하기보다 “젊은이는 새벽이슬”이라고 함이 그 속에 무궁한 의미를 내포한 시의 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펴는 임금에게 젊은 사람들이 새벽이슬처럼 온다는 것은 첫째, 이 젊은이들이 새벽이슬처럼 온 땅 위에 있는 초목과 땅을 적실만큼 풍성하고 차고 넘치는 신선함입니다. 이 신선함은 곧 시들어 죽고 말 초목에 이슬이 생명력을 주듯이 생명력이 차고 넘친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분에게로 몰려온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의 어떤 지도자이든, 그가 왕이든 정치의 대표자이든, 심지어 교회의 목사이든 하나님의 정의를 행사하는 이 땅 위에 사는 대표자에게 신선한 생명력을 충만히 가진 생기발랄한 청년들이 모여온다는 것은 그의 지도력의 영향력이 새벽이슬처럼 온 땅에 자비로운 혜택을 줄 수 있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인간들의 사회에 미치는 광경을 새벽이슬이 충만한 것으로 비유하여 노래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리라.”(호14:5)는 것입니다.
이슬은 새벽 일찍부터 온 땅을 적십니다. 새벽은 온통 이슬로 인해 습기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방의 대낮의 햇빛이 아무리 불볕이라 해도 모든 식물은 새벽에 흠뻑 내린 이슬의 습기로 인하여 그 생명이 커가고 그 열매가 여물어 갑니다. 한 나라의 젊은이는 그 나라 역사의 아침을 적시는 새벽이슬입니다. 한 교회의 젊은이는 그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로 젖게 하는, 이슬과 같이 신선한 생명력의 발랄함을 보여줍니다.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가 모여드는 주권자는 행복합니다. 새벽이슬과 같이 빛나고 신선한 젊은이가 차고 넘친 교회는 복 받은 교회입니다. 이 젊은 생명들이 신선한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왕권을 잡으시고 다스리는 날은 하나님의 통치가 펴지는 때입니다. 인간의 정치적 욕망의 앙금이 엉킨 권력이 다스리는 때는 결코 새벽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밤입니다. 거기에는 정의도 사랑도 찾을 수 없고 다만 자기의 권력을 지키려고, 그것을 연장하기 위해서 온갖 부정, 거짓, 날조, 살생 등을 아무런 양심적 가책도 없이, 역사를 지배 하시는 참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도 없이 자기 욕심과 탐심과 자기만족과 이익만을 위한 정치를 하기에 이런 권력이 다스리는 때는 아침이 아니라 깊은 밤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정의와 공평이 다스리는 때”(사 9:7)는 역사의 아침입니다. 만물이 새 생명에 충만히 발달하는 밝은 아침입니다. 새벽이슬에 젖은 아침입니다. 이 젊은이들은 거룩함으로 옷 입은 사람들입니다. 옷 입는다는 말의 원어는 장엄한 위엄을 갖춘 의미입니다. 거룩함(구별된 삶)을 예복과 같이 장엄하게 입은 젊은이들이 당신의 주권 아래로 몰려온다고 했습니다. 바이저(Beiser)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신화적 용어를 가진 이 구절에서 우리는 새벽의 품속에서 생겨나서 퍼진 충일(充溢)한 생명력이 이른 아침에 자연을 신선케 하듯이 거룩함을 갑옷처럼 입은 젊은 전사들을 연상케 합니다. 이들은 임금이 언제나 필요할 때 쓰일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는 아침 이슬처럼 풍성함과 젊음에 차고 넘치는 전투력을 가진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젊은이의 자랑은 또한 역사의 아침을 신선케 하고 빛나게 하고 만물을 소생케 하고 성장과 결심을 향해 거룩한 사명을 다한 다음, 후회 없이 이슬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는다.”라는 말은 오히려 진부한 표현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는 정의의 주를 위하여 진리라고 해도 좋습니다. 아침 이슬처럼 귀중한 소임을 다했다면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도 여한이 없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가 인간 역사를 빛나게 하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이상과 같이 본문 시를 좀 더 알기 쉽게 풀이해 보았습니다. 본문 시는 왕의 즉위와 하나님의 통치가 결합 된 선언이며, '주(너)의 권능의 날'은 메시아를 통해 그분의 주권이 드러나는 날을 가리킵니다. 특히 ‘너의 청년들’은 그 통치 아래 거룩한 옷을 입고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젊은이들로서 새벽이슬처럼 삶을 영위하란 것입니다.
새벽이슬의 이미지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밤의 냉기와 새벽의 공기가 맞닿을 때, 하늘로부터 소리 없이 맺히는 생명의 은총입니다. (호14: 5, 미5:7). 오늘의 청년들은 종종 ‘에너지 고갈’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마음은 비어가고, 성과와 비교 속에서 자신이 점점 메말라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 내 힘이 다한 순간에 하나님은 이슬처럼 찾아오십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의 헌신은 보여줌이 아니라 맺힘이어야 합니다. 이슬은 거칠고 메마른 땅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적시며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이는 청년들이 세상의 한복판(직장, 가정, 교회, 사회)에서 '말 없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소명 의식이 투철한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일상 자체가 하나님의 ‘새벽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메시아적 능력’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문자적으로 젊은 세대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청년'은 단순히 나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 다시 시작하려는 용기, 그리고 꺼지지 않는 영혼의 탄력성을 가리킵니다. 청년이란 이미 지나간 어제를 미화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믿는 사람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다시 믿고, 다시 헌신하며, 다시 꿈꾸는 사람, 곧 그가 바로 하나님의 새벽이슬입니다. 하나님은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새로워진 마음의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초대 교회는 이 시편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읽었습니다. (행 2:35-36).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권능의 날이었듯이, 교회는 '거룩한 옷을 입고 자원하는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난 곳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 부활의 생명 안에 속한 사람들이며, 우리의 헌신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격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청년은 불평보다 희망으로, 한숨보다 찬양으로 새벽을 예비하게 됩니다. 자! 그대들 젊은이들이여! 새벽이슬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새벽에 싱그런 풀잎 위에 은구슬로 찾아와서 하늘 메시지를 전하며 벽을 넘어 우리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점점 식어가는 감성에 윤기를 선물하는 것인가 봐요! 이슬처럼 영롱한 언어로 웃음 지으며, 행복하게 하라고 슬픔을 넘어 용기를 갖고 사랑의 향기를 나누며 살라고 말하듯이, 방실방실 웃으며 세상살이 즐겁게 살라고 가르쳐 주는 듯하며, 울안에 봉숭아꽃처럼 살아가라고 새벽이슬 방울은 그렇게 가르쳐 주면서 노래하는 듯이 방울방울 영롱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되지요. 이것이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의 실존입니다!
4). 결론: 본문은 왕의 즉위와 하나님의 통치가 결합 된 선언이며, Messiah를 통해 그분의 주권이 드러나는 날을 가리킵니다. 특히 ‘너의 청년들’은 그 통치 아래 거룩한 옷을 입고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젊은이들로서 새벽이슬처럼 삶을 영위하란 것이었습니다. 새벽이슬은 밤의 냉기와 새벽의 공기가 맞닿을 때, 하늘로부터 소리 없이 맺히는 생명의 은총 말입니다.
현대 청년들은 종종 ‘에너지 고갈’의 시대를 살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전무를 쏟아 부어도 마음은 텅텅 비어가고, 성과와 비교 속에서 자신들이 점점 메말라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 내 힘이 다했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이슬처럼 찾아오셔서 청년들의 헌신이 선명히 맺힐 새 힘을 주십니다. 새벽이슬은 거칠고 메마른 땅을 분명하게 적시어서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듯이, 세상 한복판 중심을 사랑과 생명의 빛을 말없이 비추어 주는 소명 의식이 투철한 자가 되도록 합시다.
그 거룩한 일상 자체가 하나님의 ‘새벽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메시아적 능력’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젊은이의 헌신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격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새벽에 싱그런 풀잎 위에 은구슬로 찾아와서 하늘 메시지를 전하며 벽을 넘어 우리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점점 식어가는 감성에 윤기를 선물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의 실존입니다! 끝.
2026. 2. 16.
山下연구원: 양 견 목사
'03. 구약설교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 65. 할렐루야(I) (1) | 2026.02.27 |
|---|---|
| 64. <삶에 이르는 병> (신입 교인을 위한 설교) (0) | 2026.02.20 |
| 62. 배신 당한 사랑 (0) | 2026.02.06 |
| 61. 포기시대에 움트는 희망 (The Hope in Time of Abandonment) (0) | 2026.02.05 |
| 60. 강요는 사랑의 모독입니다. (4) | 2026.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