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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공평하신 하나님(시편 113편 설교문)

solomong 2026. 3. 25. 10:11

 70. 공평하신 하나님(시편 113편 설교문)

(본문: 시편 113:1~9)

 

1. 서론: 부모가 장애의 자녀를 돌보는 것이 희생이 아닌 자연스러운 사랑의 표현인 것처럼, 시편 113편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보이시는 무한한 사랑과 겸손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식사 전에 부르던 할렐루야 찬양 시의 첫 번째 시로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겸손하심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오늘날 본문 시에서 배움과 행해야 함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2. 본론(Text): 이 할렐루야 시들은 유대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때 불렀고, 특히 유월절 때 애용되었으며, 유월절 식사 때 시편 113~114 편은 식사 전, 둘째 잔 이전에 불렀고, 115~118편은 식사 후, 즉 넷째 잔 을 마신 후에 불렀습니다. 주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부르신 찬미(마 26:30)도 이 시편으로 보입니다. 본문 내용은 1. 주를 찬양하라(1~3), 2. 주 의 위엄 때문에(4~5), 3. 천한 자를 높이시기 때문에(6~9) 라는 내용입니다.

3. 본론(Context): 유대인의 예배 전통에서는 113~118편 전체를 한 그룹의 찬 양으로 생각하여 주로 유월절, 칠칠 절, 장막절, 월삭 제, 그리고 성전 헌 당식 축제 등 고유한 예배 의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올 때, “순례의 노래”로 불러왔습니다. 114편과 118편을 제하고 모두 그 시의 서두나 마지막에 “할렐루야”를 가지고 있기에 “할렐루야 시집”이 라고도 부릅니다.

 

전체가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내용이 주가 되어 있으나(1~3절)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3절) “영원히”(2절) 찬양을 받아야 할 하나님께서는 자연, 인간, 역사, 사회 그리고 개인 가정의 문제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실상은 ”모든 이방 백성들“이라 함이 원문의 뜻) 위에 높이 계신다.”(4절) 는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만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 모든 나라 백성들의 역사 를 친히 아시고 거기에 관심을 가지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이저(A. Weiser)는 “이 시가 역사 위에 높이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영 광을 돌리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방 백성들이 가진 주권은 하나님의 주 권 아래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모든 나라들의 주권 위에 초월 하여 계시다.” 함이 크라우스(Kraus)의 해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의 주권이 인간 역사를 초월하신다는 말에서, 인간의 어떤 권위와 주권도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를 능가할 수 없고, 다만 이 하나님 아래 종속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은 또한 자연 위에 자기 권위를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늘 위에 높으시다.”(4절) 라는 말은 하늘이 아무리 높고 광대무변해도 그것은 인간 의 신앙의 대상이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의 하나로서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 아래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 까지”는 온 세상 땅끝까지를 말합니다. (말 1:11) 이러한 표현은 태양의 운 행을 논한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모두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와 자연 위에 높이 계셔서 찬송을 받으실 야웨 하나님은 인간 이 만들고 있는 사회문제까지에도 관심을 표시하는 분입니다. 하늘, 해, 세 계, 만민 등 이런 큼직한 존재들에게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가장 복잡한 빈부와 인권의 문제까지도 손을 대신다고 본문의 시 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낮추시어 천지를 살피시고”(6절), 하늘 위 에 높이 계시며, 모든 세계와 그 모든 나라들의 주권을 다스릴 만큼 높은 위엄을 가지신 분이 “자기를 스스로 낮추신다.”라는 것은, 신격에 맞지 않 는 자기격하(自己格下)입니다.

 

이방 신들은 더 높고 귀한 찬사와 존경, 대접과 공대를 받기를 원합니다. 이방 신들은 자기를 격하시키기를 싫어하고, 자기를 그렇게 격하시키는 인 간에게는 엄한 벌을 내립니다. 그런데 야웨 하나님은 그렇게 하늘과 땅 위 에 높이 계시는 분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신다고 합니다. 성경 해석가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격하시켜 천지를 보는 사실에 중점을 두기도 합니다. 그래 서 공동 번역은 “하늘과 땅을 굽어보시는 분”이라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인은 7절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 “궁핍한 자”들의 사정 을 동정하셔서 그들을 낮은 데서 끌어올린다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행동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하늘 높이에서 아래로 굽어살피는 관망(觀望)의 태도가 아닙니다. 보는 행동이나 보는 대상보다 보기 위하여 자신을 격하시킴이 더 중요합니다. 높은 위치에서는 낮은 자를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 다”라는 의미보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쇠펠”(낮게 처신한다는 뜻)하시는 행동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읽을 때, 우리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 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 2:6~8)라는 하나님의 “자기 격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의 바울신학이 영지파 (그노시 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함은 의심스럽습니다. 그의 생각은 아주 히브리적입 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종의 형상으로 격하시킨다는 사상은 제2 이사야가 소개하는 “고난의 종”의 노래(사 53장)에서도 더욱 분명합니다.

 

여기 본문 시인이 하나님을 이렇게 격하시킴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의 역사 지배 원칙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원칙이 아니고 하 나님은 어디까지나 약하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신 공평하신 분이라고 본문 시인은 믿기 때문입니다. 그의 공평의 원리는 7절에서 구체화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치 켜 올려 세워주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는 엄격하게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구약에서 “가난한 자를”를 표시하는 대표적인 말은 3가지가 있습니다. 가 장 많이 사용된 것이 “아니”(부정 접두사로 ‘~이 없다’의 뜻), “엡욘”(궁핍 하다의 뜻), “달”(dal-경제적 빈곤, 사회적 약자의 뜻) 이란 말입니다. 이 “달”은 시편에는 5회 사용되었지만, 잠언 서에는 14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아모스의 정의 주장에도 이 “달”이란 “가난한 자”를 변호하는 것이 여러 곳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단순히 물질적인 빈곤으로 괴롬을 겪는 사람만이 아니라 아무 의지할 데 없는 천민이요 약자임을 성서 본문들은 알려 줍니 다.

 

여기 본문 시인의 인권사상 및 철저한 사회주의 사상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본문 시인은 단순히 인권 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집단적인 제도개선을 통하여 이룩하는 혁명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인간이 구성하고 있는 사 회가 인간들의 욕심으로 삶의 불균등과 공평치 못한 사실을 만들고도 이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제도 또는 체제를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인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이러한 부조리와 모순적 현실을 시정하신다고 외 칩니다.

먼지 또는 티끌 속에 사는 가난한 자의 신분을 고쳐 주신다는 것 입니다. 옛날 이 씨 조선시대에 쌍놈으로 취급받아 온갖 불공평 속에서 신 음하던 사람들을 양반계급과 꼭 같이 앉을 수 있게 만드심이 하나님의 인 권 존중의 사상이요 모든 사람을 일시동인(一視同仁) 하는 공평과 균등의 원리가 통하는 사회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티끌” 또는 “먼 지” 그리고 “거름 무더기” 등은 높은 사람,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먼지와 티끌 속에서 호흡하고 거름 무더기 에서 먹을 것이나 쓸 수 있는 물건이 있을까 뒤지고 또한 이런 거름더미가 이 사람들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것도 된다고 해석가들은 말하고 있습니 다. 예루살렘이 적군에 의하여 무너지고 나라가 망했을 때, 귀인들의 비참 을 노래한 “애가” 시인은 이 7절과는 반대되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맛난 음식을 먹던 자들이 거리의 외로운 사람이 되었고, 전에 화려한 옷을 입고 자라던 사람들이 이제는 거름더미에 앉아 있습니다. (애 4:5)

 

하나님은 이 인간 사회에 있는 불공평한 사회제도를 바꾸어서, 이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높이 들어 귀인들과 함께 앉혀 주신다고 함이 8절 말씀입 니다. 얼마나 위대한 선언인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이십니 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서 우는 우리 사회는 하나 님이 미워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반드시 이런 사회의 모순을 용납하지 않 으십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시기도 하고, 이런 모순을 얼마 동안은 못 본 척, 모르시는 척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공평한 사회는 바 로 잡아야 합니다. 총과 칼로써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런 부조리를 심판하신다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혁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상과 같이 본문을 좀 더 쉬운 풀이로 적어 보았습니다. 본문의 요지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부터 영원까지”라는 표현은 시간적 초월성을, 공간적 초월성으로는 “해 돋 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처럼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어 이 땅의 가장 연 약한 자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겸손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심을 통해서 가장 완벽하게 낮아지심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 영광 을 내려놓고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증언) 더 나아 가서 가장 낮은 자들과 교제하시며, 병든 자들을 치료하시고, 죄인들의 친 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은 하나님의 겸허한 사랑이 얼마 나 깊은 심연으로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결정적인 본보기였습니 다.

 

본문 시편 말씀의 핵심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사색의 증거를 제시한 것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낮은 심연으로 내려오심은 우리를 연 민의 장(掌)으로 감싼다는 진실은, 우리도 이웃 형제를 향해서 겸손과 사랑 의 정성을 쏟아야 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영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망극하신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 시편은 단순한 찬양 시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본질과 그 어른 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삶의 방식을 깊이 있게 보여주는 영적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종(始終)을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마치는 본문 시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겸손한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면서 그 어른을 찬양하는 삶 을 영위(營爲)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까지 임하셔서 우리를 돌보시는 그 은혜 를 찬양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 하나님을 본받아 겸손히 낮아지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또 다른 이들을 일으키시고 회복시키 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이 시편의 처음과 끝처럼 "할렐루야"를 고백 하며 살아갑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까지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오늘을 살아 갑시다. 우리의 죄악과 약함을 사하시고 회복시키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을 노래하며 살아갑시다.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찬양이 우리의 삶이 되고, 우 리의 고백이 되며, 우리의 사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끝.

2026. 3. 25.

山下연구원 : 양 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