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71. 여명을 밝히는 기독자

solomong 2026. 3. 28. 10:05

 

여명을 밝히는 기독자

(시편 108:1~13)

1). 서론: 오늘 본문 시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를 후대에 편집하여 두 편의 시를 한 편으로 만든 합성시 입니다. 곧 57편과 60편의 시를 조합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두 연으로 보면, 1연(1-5절)은 시편 57편 7-11절의 내용과 같이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숨어서 쓴 것입니다. 2연(6-13절)은 60편 5-12절의 내용과 같이 다윗의 통치 초기에 에돔의 전투에서 패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108편 시편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다윗 시인이 당시 자신이 겪은 이방나라에서의 수치와 서러움을 토대로, 자신의 시를 읽고 묵상하며 두 곳의 내용을 한 시로 편집한 것이라 봅니다. 다시 정리하면 1연에서는 열방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서원하고, 2연에서는 열방의 대적들에 대해 승리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 시편은 합성시(合成詩)이기에, 복잡성을 떠나서 시57편의 8절이 108편의 2절이 된 것을 중심해서 <여명(黎明)을 밝히는 기독자>란 제목의 주제로 하여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본론(Text): 본문은 다윗의 합성시(合成詩)로, 1~5절은 시57:7~10에서, 6~13은 시60:5~12에서 취한 것입니다. 전자는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고, 후자는 미래의 승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합성의 시기와 동기는 알 수 없으나, 1. 다윗 자신에 의해, 2. 귀환기에 찬미용으로, 및 3. 마카비시대 등의 추측이 있습니다. 일단 2. '귀환기 찬미용으로' 를 취해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의 2개의 시가 하나로 합쳐진 시 가운데 대표적인 것입니다. 즉 본문 시의 1~5절은 시편 57편 7~10절, 그리고 본문 시의 6~13절은 시편 60편 5~12절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이 2 시가 하나로 합쳐진 것인지 아무도 살명할 수 없습니다. 본래 하나였던 시를 57편과 60편 시인이 각각 이용했다고 보기보다는 108편 시인이 이미 있었던 2 시에서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주석가들은 대체로 이 108편 시를 주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 마지막 귀절을 명상하며 57편과 60편애서 배우지 못했던 진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 우리는 용감하리라. 하나님이 우리 대적을 짓밟으신다."(13절) 구역(舊譯)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의 원문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권능을 행한다."가 됩니다. 하나님의 힘을 믿고 능력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원문에서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해서 그 뜻을 강조하여) 우리 원수들을 부숴버리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나다. 이로써 하나님의 힘을 믿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라는 사상이 나오게 됩니다. 이 108편의 시가 어떤 예배 환경과 관련됐는지 아무도 분명히 말할 수 없습니다. 57편에서 빌어온 첫부분(1~5절)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요, 찬송의 내용입니다.

그의 찬송은 목소리로만이 아니라,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고 찬양하는 것이며 밝은 대낮이나 밤에 부른 찬송이라기보다 이른 아침 새벽을 깨우는 찬송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용감한 사람은 결코 왈력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할 줄 아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며 잠자는 새벽을 깨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여 용감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찬양의 노래는 다른 사람의 경우와 같이 자기 자신을 원수에게서 구원했다든가, 자기 병을 고쳐주셨다든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셨으니까 찬양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찬양은 순수한 하나님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늘에 차고 하나님의 진실이 궁창에 미치고 그의 온 세계 위에 충만하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진실, 그영광이, 즉 기본적인 하나님의 본성이 찬양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른 새벽에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아침 하늘, 푸른 궁창에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과 영광을 가득 채우는 일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 부분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구와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서 얻을 수 있는 튼튼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옛날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될 때 야웨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주의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많은 민족 중에서 택하심도 그들을 남다르게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신 7: 8)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적들을 쳐부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겜을 나누어 숙곳을 측량하셨습니다. 이 2지방은 요단 동쪽으로 모두 야곱의 전승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창 33: 17~18) 여기서 이스라엘 조상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간섭으로 모든 적들을 물리치고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길르앗과 므낫세는 역시 요단 동편으로 므낫세 지파가 정착한 곳입니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유대는 요단 서쪽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가장 중요한 지파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의 주권을 보호할 책임을 지고 유다는 다윗의 조상을 이룬 지파로 이스라엘 왕권을 쥐었음을 상징하여 "나의 홀"이라 했습니다. 8절 이하에서는 이스라엘을 주변에서 괴롭힌 대표적 나라들인 모압, 에돔, 블레셋을 언급하면서 그들은 야웨 하나님께 항거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하여 종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시인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한 그를 힘입어 용감할 수 있다는 구체적사실을 자기들의 선조가 가나안 땅을 점령한 사실로써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결코 이스라엘의 용기와 그 전략적인 성공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싸움터에 나가서 친히 저들과 더불어 싸우시고 그들을 승리의 길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누가 우리를 에돔까지 인도할꼬?"하는 그 대답은 '하나님밖에 할 수 없다.'입니다.

그러나 야웨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이스라엘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교만할 때 저들은 부득히 적군에게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한때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패함은 "당신이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솔직하게 저들의 패망의 원인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대적을 치는데 도와주어야만 승리가 옵니다. 이러한 고백은 이스라엘의 힘의 원천과 승리하는 구원의 원동력이 인간 자신에게서 올 수 없고 다만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는 선언입니다. 이 근거에서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우리는 용감할 수 있다." 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적을 이스라엘이 무찔러 없애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가 그들의 적을 무너뜨리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 야웨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능력을 믿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라는 사상은 구약신앙 중 가장 자랑스런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이 사상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가 나온 것입니다. "야웨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나이다.(시 27:1~2) 너는 야웨를 바라볼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랄찌어다."(시27: 14) 라는 말씀입니다.

* 이상과 같이 본문을 좀더 쉽게 풀이 해 보았습니다. 풀이한 내용들을 현대적 시각에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같습니다. 시 108:2: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하던 절박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외침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짧고 강력한 선포는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현실만을 바라본다면 한없는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절망 속에 머물러야 마땅하지만, 다윗은 현실을 뛰어넘는 신앙적 결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든 영적 악기를 깨우다: 다윗은 '비파'와 '수금'이라는 악기를 향해 "깰지어다"라고 명령합니다. 악기는 연주되어야만 소리를 내는데 악기를 향해서 깰지어다 라고 말한 것은 세상의 고난과 염려, 혹은 나태함에 젖어 잠들어버린 영적 신앙을 향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찬양하는 악기이자 복음을 선포하는 악기로써 깨워 있어야 하껬습니다.

수동성을 거부하고 새벽을 주도하다: 보통은 새벽이 우리를 깨우지만, 다윗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새벽을 깨우겠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신앙의 수동적인 자세를 능동적인 자세로 전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주님께 무언가를 받기만을 원하거나, 막연히 하나님의 때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신앙의 태도에서 벗어나, 어둠이 깊을지라도 빛을 선포하며 시대를 주도하겠다는 오늘날 우리들의 결단이어야 하겠습니다. 시련과 절망 속에서도 찬양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과 기도로 하루의 첫 순간을 정복하겠다는 영적 용기를 담아야 핬습니다.

새벽별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러한 깊은 어둠 속에서 새벽을 깨우는 삶은 새벽별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또한 다윗의 고백과 새벽별 되신 주님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어두운 이들에게 참된 복음의 빛을 밝히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다윗처럼 현실의 절망 속에서도 능동적으로 영혼을 깨우고, 어둠을 향해 빛을 선포하는 삶을 살겠다는 굳은 다짐을 해봅시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는 이 고백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그래서 이젠 우리는 <여명을 밝히는 기독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새벽’은 ‘밤이 거의 새고 날이 밝을 무렵, 먼동이 트기 전’이지요. 새벽 미명은 만물이 새롭게 출발하는 그 시간, 여명의 시간입니다. J. Milton도 그의 시집에서“시냇가 물 흐르는 소리와 목동이 부는 풀피리가 어떻게 즐겁게 아침을 깨우는지 종종 듣고 있다.”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주의 새벽은 가만두어도 때가 되면 옵니다,

이젠 인생의 새벽을 깨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여명의 시인> 다윗처럼 새벽을 깨워서 어두움을 녹여 여명의 새날을 만들어 보자는 깊은 생각으로, “새벽아! 일어나라, 나와 함께 일어나 주 하나님을 찬양하자.”라고 한 후에, 역사와 인생의 여명을 여는 주님의 종들과 기독 신자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여명의 기독자는 앞장서서 엄청나게 정의로운 일을 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하자는 것입니다. 잠에서 덜 깬 무지몽매한 민중을 내가 모두 일으켜 세우고 정신 차리게 만들어서 ‘역사의 여명’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역사의 여명은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 속에서만 가능하지만, 동시에 기독자 자신들은 적지 않은 희생을 감내하려는 단호한 결의를 해야 합니다.

역사의 여명을 열겠다는 기독자의 역사의식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가슴 뭉클한 교훈으로 압도하고 있습니다. “주의 날개 그늘 밑에서 피하겠습니다.”(1절) 라는 것은 ‘영혼이 편히 쉬겠다’라는 말입니다. 풍랑(風浪, Storm)이 잔잔할 때까지,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쉬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현대인의 간절한 소망이 영혼이 편히 쉬는 것입니다. 소위 '스트레스'는 영혼이 편히 쉬지 못하는 데서 <긴장=Tension)>=“양쪽에서 당긴다.”뜻으로, 정신적 2개의 자기가 싸워서 평안을 자주 잃는 우리입니다. 진리 안에서 해방감(자유)을 얻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새벽을 깨우기 위한 또 하나의 준비는 기도입니다. 찬양은 우리를 더 깊은 기도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찬양하며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찬양으로 열린 가슴 안에 역사를 품는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하나 기도의 제목들이 우리의 입술로 고백 되고 주의 보좌 앞에 향기롭게 받쳐지는 순간! 역사는 허물을 벗고 새로운 신부로 걸어 나올 치장을 하게 됩니다. 기도가 진지한 행동을 낳습니다. 기도 없는 행동은 많은 경우 책임질 수 없는 충동을 낳게 되지요!

기도의 가장 진지하고 승화된 단계를 12C. 중세시대 수도원의 언어로 ‘컨템플라치오' (Contemplatio=觀照)라고 부릅니다. 깊은 침묵의 머묾 안에서 간밤의 어둠의 장막은 걷히고 새날이 밝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도된 행동'으로 새벽을 깨우러 나가게 됩니다. 수도원의 묵상의 4단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성경 읽기(거룩한 독서), 2. 메디타치오(Meditatio)=묵상하기, 3. 오라치오(Oratio)=기도하기, 4.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觀照하기, 하나님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깊은 침묵 속에 바라봅니다. 그때 세밀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의 제1단계인 성경 읽기는 본문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2단계 묵상하기에는 성경 본문 내용의 단어들을 집중적으로 묵상합니다. 묵상을 시작할 때, 온갖 잡생각이 떠오르게 되는데, 보기 싫은 사람, 속 썩이는 자녀들 생각, 미운 이웃들, 이런 잡된 생각들을 정화 시켜야 비로소 고요함과 평정이 깃들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3단계 기도하기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나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되면, 내 안에서 폭발시키는 힘이 역사하게 되고, 그 힘으로 내 영혼에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억누르게 되고, 그때 우리는 영혼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꿀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고 이 세상을 소리 없이 개혁하고, 복음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될 것이며, 역사적인 여명의 아침을 여는 초석을 마련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올바르게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여명의 종들>과 <여명의 기독 신자>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4). 결론: <여명을 밝히는 기독자>는 역사의 여명을 열겠다는 그의 역사의식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가슴 뭉클한 교훈으로 압도하게 됩니다. 풍랑(風浪, Storm)이 잔잔해 짐으로, 본문의 <여명의 시인>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쉬겠다고 한 것과 같이, 우리 현대인의 간절한 소망도 영혼이 편히 쉬는 것이 소원입니다. 소위 '스트레스'는 영혼이 편히 쉬지 못하는 데서 <긴장=Tension)>=“양쪽에서 당긴다.”뜻으로, 정신적 2개의 자기가 싸워서 평안을 자주 잃는 우리입니다. 진리 안에서 해방감(자유)을 얻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오늘날 우리는 새벽을 깨우기 위한 또 하나의 준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더 깊은 기도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찬양으로 열린 가슴 안에 역사를 품는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하나 기도의 제목들이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고 주의 보좌 앞에 향기롭게 받쳐지는 순간! 역사는 허물을 벗고 새로운 신부로 걸어 나올 치장을 하게 됩니다. 기도가 진지한 행동을 낳습니다. 기도 없는 행동은 많은 경우 책임질 수 없는 충동을 낳게 되지요! 그래서 역사적인 여명의 아침을 여는 기독자가 되도록 합시다. 끝.

2025. 12. 19.

山下연구소: 양 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