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72. 죽어도 산다는 믿음​

solomong 2026. 1. 31. 11:23

72. 죽어도 산다는 믿음

고대 원시종교에서는 자기들이 믿는 ‘신’의 진노를 막기 위해서 아이를 잡아 바친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고전에 속하는 '심청전'도 그 서술의 초점은 달라도(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공양미 300석 받아 바치고, 인당수 제물이 되는 것, 효성의 극치로 표현했지만) 배경에는 이러한 풍습의 전제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 본문의 사건을 두고'비윤리적이니, 잔인한 하나님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히11: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어도 산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창22:1-14, 히11:8-19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아브라함의 ‘죽어도 산다는 믿음’을 명상해 보십시다.

하나님 편의 저변에 흐르는 생각을 통찰해 봅시다. 창22:1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Test, “시도 한다.”의 뜻,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확인코자한 시도)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시험했을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 나이 90세에 이삭을 생산케 했습니다. 처음엔 ‘아브라함과 사라’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창17장17절엔 아브라함이 ‘웃었다, 21장 6절=사라가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요사이 애들 말로 “하나님 웃기지 마세요.”의 의미와 상통) 그러나 정말 이삭을 생산했습니다.(창21장7절엔 “....노경(老境)에 아들을 생산....)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게 되어, 너무나 좋아했다는 말입니다. 불가능 속에 얻은 아들이기에 “어허 둥둥 내 사랑아!”, 아브라함은 이삭 사랑에 푹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편의 생각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사랑 여부를 시험하기로 했습니다.

아브라함 편의 저변에 흐르는 생각을 정리해 봅시다. 창15장5절에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축복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창17장2절 이하와 하나님의 ‘언약’, ‘약속’, 히11;17 이하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을 받은 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하기를, “하나님 약속하셨으니 믿습니다만, 만약에, ‘이삭’을 죽이신다면, 인륜대사(人倫大事)가 허물어지는 것이 됩니다. 이삭의 등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업혀 있습니다. 동시에 이삭을 통해서 인류의 새로운 미래가 약속 된 것인데, 다 허물어 질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약속을 어기는 불신의 하나님이 됩니다.” 라는 항변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창 22:1이하, 집에서 모리아 산상으로 향해 출발합니다. 이 장면을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떠날 때, 집에서부터, 이삭을 벌써 죽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그냥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시험해 보는 것으로 알았다면, 시련(試鍊)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진정한 명령으로 생각해서, 정말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 것으로 알았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은 하나님의 쇼(Show)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심각한 아픔이 있는 것이지요. 모리아산상, 종들과 나귀는 따로 있게 하고, 이삭과 단 둘이 제단에 당도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 제물(어린양)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했지만, 종국에는 “네가 제물이다.”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반항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약속의 아들이 아닙니까. 나를 통해 아버지가 대국의 조상(祖上)이 되실 터인데, 나를 죽여서 제사를 지내면, 그 약속은 어찌됩니까.”라고 했을 것이며,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위에 놓고, 칼을 들었습니다. 그 찰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잠간만......” 아브라함의 피가 마르는 순간이요, 장면입니다. 실존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아브라함이 칼을 내리치는 그 순간이 ‘결단’이요, 그 ‘결단은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마르틴 루터는, “죽음의 경각에 하나님이 계셨다. 우리는 삶 가운데 죽는다고 하나, 하나님은 아니다! 죽음가운데 산다!” 고 대답하신다고 했습니다. 히11:19에, “저가 능히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이것이 죽어도 산다는 믿음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그것은 죽음 속에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리라는 신앙, 창조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어진 불굴의 신앙입니다. “죽어도 산다.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저도 이기다.” 이런 역설적(逆說的)인 신앙이 참 신앙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체념(諦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내세우는 자세에 체념이 도사리고 있음을 또한 종종 봅니다.

‘신앙은 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될 것’으로 알고 자기를 투신(投身)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만용(蠻勇)이 아니라, 신앙의 존재양식(存在樣式)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곧 삶입니다. 우리들의 보편적 삶도 믿음의 터전 위에 살고 있습니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주부들에게 불안신경증(不安神經症)이 많이 생긴다.” 고 영국의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일직이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보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문어지지 않는다는 믿음 가운데서 사는 삶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시련 중에, 중요한 특징은 언제나 ‘외아들, 이삭’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련이란 오늘날도 우리들에게도 위협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실존 속에, 우리들의 ‘외아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없어지거나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전부 ‘우리들의 외아들입니다.’ 특히 오늘의 이 현실, 이 시점에서 가정과 소유권과 같은 것이 외아들일 수 있습니다. 남편, 자식, 아내, 그리고 우리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의식주(衣食住)의 권리가 입니다. 화가에게는 눈이, 음악가에게는 귀가 외아들입니다. 정치가에게는 '당선'이, 사업가에게는 사업체가 외아들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완전히 자기를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굉장한 시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것들에만 ‘교두보’(橋頭堡, 다리를 지탱하기 위한 축조된 보루, 군인이 전쟁에서 작전을 유리하게 전개시키기 위하여 설치하는 거점)를 두고서, 거기에 매달려 있다면, 이는 벌써 신앙과 먼 거리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하나님의 일단의 뜻은 그 '외아들'을 ‘제단’에 바치라는 명령이 하달(下達)된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에겐 더 바랄 것도, 내일도 없는, 암담한 현실에 힘없이, 체념에 빠지기 쉬운 가능성 속에 항상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배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제 아들을 잡아 바치면서도 절대로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산다. 죽은 이를 다시 살릴 것”이란 신앙이 그에게 새로운 이삭을 찾게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제시된 그의 궁극적(窮極的)인 삶의 근거(Foundation=터전)는 눈에 보이는 혈육의 ‘이삭’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분명히 그 아들을 살리려고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면 포기하느냐의 기로(岐路)에 섰었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다시 얻었습니다. 신앙은 체념을 모르는 것입니다. 체념은 신앙의 무덤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희망 속에,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뿌리를 박은 확신으로써, 우리들의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불변의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들에 닥치는 시련은 새로운 차원에서 자신을 다시 찾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이 계속 전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

2009. 9. 8.

山下연구원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