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70. 바울의 受難 자랑

solomong 2026. 1. 14. 10:42

70. 바울의 受難 자랑

(본문: 고후 11:16-33)

 

1). 서론: 우리 속담에“고생을 사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이 2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잘못 처신한 탓으로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게 됨을 이르는 말이고, 둘째는, 여러 가지 정황 중에서 자신이 스스로 어려운 일을 맡아서 고생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두 번째 가까운 의미로,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 줄 항복을 하고서, 회오에 찬 뉘우침으로 正義와 주님 향한 믿음과 사랑을 위하여, 험난한 복음 전도자의 길을 해쳐갔던 것입니다.

 

受難은 힘들고 괴로운 것이므로 누구나 그것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되도록 당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면서, 갖은 수단방법으로 수난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正義와 주님을 위하는 신앙의 길이라면 오히려 수난을 ‘떠맡아서’ 자랑하면서 산 人生行路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는 수난의 矜持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그 수난 자랑의 간증을 좀 더 묵상해 봅시다.

 

2. 본론(Text): ①. 본문 11:16-20-자랑에 대한 용서를 구함-고후11:16-12:10절까지의 열쇠가 되는 말(Key Word)은 “자랑”이란 낱말입니다. 바울 자신의 자랑을 피하려고 하지만,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어서 그러하니, 자기를 변호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치 말아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사실”이란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한 ‘옹호’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사도들에 대한 ‘견제’ 및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부득이 선택한 것이란 것입니다.

 

②. 본문 11: 21-29-수난의 자랑-바울은 자기의 태도와 유대주의자들인 거짓 사도들의 태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유대 거짓 사도들처럼 빈정대는 말로 鐵面皮하게 용감치 못하고, 연약한 사람으로 말하는 자랑은 욕된 길을 自招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민족성의 자랑인 히브리어를 말하는 유대인과 선민의식에서 나온 이스라엘인과 언약의 자손으로 아브라함의 씨라고 한다면, 유대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는 반대자들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우월하다고 자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군’인 사실을 증명키 위해서 그의 수난업적을 보여 줌으로써,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생각을 바로 잡아 줄 생각에 자기가 당한 수난과 반대자들의 그것과 비교하여 자신이 당한 수난이 더욱 위대한 것을 말하려고 했으나, 자랑하기가 쑥스러워 “정신없는 말”을 한다고 하면서, 끝에 가서는 수난의 목록만 열거하였습니다.

 

③. 본문 11:30-33-바울의 약점 피력-바울은 자기가 당한 수난을 진술한 후에, 박해자인 사울이 회개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미움에 차서 그를 체포하여 죽이려고 한 사실을 말하여 교만한 바리새인의 가장 수치스런 점을 언급하고, 자신은 다메섹에서 도피한 것이 하나의 약점인 것을 자랑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행9:21-25, 참조) 이는 자랑의 달관적인 수법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학벌이나 신분 등의 외적 조건을 자랑하였으나, 바울은 수난의 체험에서 느낀 자신의 약점과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약점에서 공감되는 약함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바울이 말해 온 자기의 약함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하심>과 마찬가지란 것입니다.(고전1:25) 믿음의 눈에는 강한 것이란 것입니다. 그의 가치관은 십자가로 표준삼아, 하나님의 약함에서 구원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을 포함한 고후12:10절까지의 열쇠가 되는 말(Key Word)은 “자랑”이란 낱말입니다. 바울 자신의 자랑을 피하려고 하지만,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어서 그러하니, 자기를 변호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치 말아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사실”이란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한 ‘옹호’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사도들에 대한 ‘견제’ 및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부득이 선택한 것이란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기의 태도와 유대주의자들인 거짓 사도들의 태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유대 거짓 사도들처럼 빈정대는 말로 鐵面皮하게 용감치 못하고, 연약한 사람으로서 자기 자랑은 욕된 길을 自招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민족성의 자랑인 히브리어를 말하는 유대인과 선민의식에서 나온 이스라엘인과 언약의 자손으로 아브라함의 씨라고 한다면, 유대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位置는 반대자들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優越하다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군’인 사실을 증명키 위해서 그의 受難業績을 보여 줌으로써,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생각을 바로 잡아 줄 생각에 자기가 당한 수난과 반대자들의 그것과 비교하여 자신이 당한 수난이 더욱 위대한 것을 말하려고 했으나, 자랑하기가 쑥스러워 “정신없는 말”을 한다고 하면서, 끝에 가서는 수난의 目錄만 열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당한 수난을 조목조목 진술하고,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박해자인 사울이 회개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미움에 차서 그를 체포하여 죽이려고 한 사실을 말하여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가장 수치스런 점을 언급하고, 자신은 다메섹에서 도피한 것이 하나의 약점인 것을 자랑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행9:21-25, 참조) 이는 자랑의 달관적인 수법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거짓사도들은 학벌이나 신분 등의 외적 조건을 자랑하였으나, 바울은 수난의 체험에서 느낀 자신의 약점과 고린도교인들의 약점에서 공감되는 약함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바울이 말해 온 자기의 약함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하심>과 마찬가지란 것입니다.(고전1:25) 그러나 믿음의 눈에는 강한 것이란 것입니다. 그의 가치관은 십자가로 표준삼아, 하나님은 약함에서 구원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상기의 언급들을 요약해본다면, 바울은 평생 4가지 受難을 자랑했습니다. 그 첫째는, 유대교의 광신자로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동참했고, 교회 박해의 앞잡이였습니다. 그런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으나, 유대인의 반대자들은 배신자라고 하여 미움에 차서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육체적인 연약함인 안질과 간질(몸의 가시)로 그는 오히려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움과 위로를 받으며,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본문의 나타난 수난의 목록인데,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고, 3번의 태장과 한 번의 돌로 맞음, 3번의 파선을 당했으며, 또 강(江)의 위험을 비롯해 강도와 동족, 이방인, 시내, 광야, 바다의 위험을 겪었고, 주리고 춥고 목마르고 배고프고 不眠의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를 위해 받은 수난이었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예수님의 痕迹이었습니다.

넷째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고 했습니다. 이는 자기를 사랑하시어 주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 생애라는 것입니다. 사실 평생자랑인 이 4가지는 인간적으로는 자랑스러운 목록이 아니라, 부끄럽고 고생스런 수난의 목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살았기에 위대한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든지 수난을 피하여 살려고 몸부림치는 실존입니다. 그래서 갖은 수단과 방법, 꾀를 다 동원하여 아픔을 면하려고 합니다. 大槪의 기독자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난 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헌신코자하는 자는 자신의 아픔을 지긋하게 참고 주님 위한 일편단심으로 수난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뚜벅뚜벅 앞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전의 말이 다시금 가슴에 뭉클하게 떠오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입니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遺産)인 고난의 십자가는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참 기독자처럼 살려고 할 때, 주님 때문에 손해도 보고, 수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항상 直面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예수의 고난의 유산인 십자가를 지고 매일매시 결단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당하는 현실의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수난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숭고함이 내 삶에 지속적으로 <예수로 말미암은 수난>임을 의식(意識)하게 될 때, 비로소 그 뜻은 변질되지 않을 것이고,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6:17)

 

우리는 주님을 위한 <수난>을 하나의 思辨的으로, 倫理나, 審美的으로 관계되고 동참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내 육체 속에서 예수의 현실적인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산다고 했습니다.(고후4:10) 이는 자신의 전도여행과 소아시아에서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예수의 역사적인 고통(십자가의 사건)에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체험과 십자가의 아픔의 경험은 관념으로도, 교리로도, 심미적 상상도, 종교적 환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이는 오직 내 몸으로! 내 몸에 어떤 형태로나 예수님을 위한 수난을 받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참 사랑하는 이는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 내 살을 떼어내는 아픔, 그것 때문에 계속 상처를 받고, 수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가 내 안에서 생생해 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現下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한국교회의 사건도, 수난을 피하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행복 추구가 가슴속 깊이 근본적으로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손해되고 위험한 것은 다 피한 안일한 자리에서 십자가를 아무리 노래한들 그것이 어떻게 자기의 현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야 어떤 불의가 난무(亂舞)하든 아랑곳하지 않을뿐더러, 주님의 복음도 아름다운 향기가 아닌 惡臭로 휘날릴 뿐입니다.

 

이러고도 “내 영혼아 평안 할지어다. 나는 구원받은 자로다”하는 식(式)의 기독교적 낭만주의자나, 종교적 이기주의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어떻게 <자기와 관련 된 현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기 몸에, 예수의 낙인을 자기 몸에 흔적을 남기는 그 수난을 오히려 겸허하게 자랑했습니다. Livingstone은 자기의 아프리카 희생을 위로하는 이들에게, “희생이란 갈보리의 희생 하나뿐이다.”라고 대답한 것이 일찍이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마음과 삶이 우리들의 심정과 생활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4). 결론: 바울은 正義와 주님을 위하는 신앙의 길이라면 오히려 수난을 ‘떠맡아서’ 자랑하면서 산 人生行路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군’인 사실을 증명키 위해서 그의 受難業績을 보여 줌으로써,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생각을 바로 잡아 줄 생각에, 자기가 당한 수난과 반대자들의 그것과 비교하여 자신이 당한 수난이 더욱 위대한 것을 말하려고 했으나, 자랑하기가 쑥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시어 주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초래된 수난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수난>을 하나의 思辨的으로, 倫理나, 審美的으로 관계되고 동참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내 육체 속에서 예수의 현실적인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산다고 했습니다.(고후4:10)

 

오늘날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체험과 십자가의 아픔의 경험은 관념으로도, 교리로도, 심미적 상상도, 종교적 환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이는 오직 내 몸으로! 내 몸에 어떤 형태로나 예수님을 위한 수난을 받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참 사랑하는 이는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 내 살을 떼어내는 아픔, 그것 때문에 계속 상처를 받고, 수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가 내 안에서 생생해 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음 안에서 正義와 주님의 복음을 위한 길이라면 수난 받을 각오 하에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기독자로 살려면 주님 때문에 손해도 보고, 수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直面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예수님의 고난의 유산>인 십자가를 지고 매일매시 결단하면서 사는 것이 참으로 숭고한 것이라는 矜持와 自負心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