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67. 제네바와 존 칼빈의 종교개혁

solomong 2025. 11. 14. 12:16

 

67. 제네바와 존 칼빈의 종교개혁

1. 서언: 츠빙글리가 사망한 후에도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계속 진행 되었습니다. 취리히의 개혁은 베른에 전파되었고 베른은 제네바에 개혁 사상을 전했습니다. 이 때문에 제네바는 가톨릭 사보이(Savoy) 가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도시가 되었습니다. 베른 시정부는 츠빙글리의 친구인 개혁자 기욤 파렐(William Farel, 1489~1565)을 제네바에 파송하였습니다. 이후 파렐은 제네바의 개혁에 대해서 늘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 때 한 청년이 제네바를 우연히 방문하자, 파렐은 그를 설득하여 함께 일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그 청년은 서구 문화에 세계사적 영향을 끼친 개혁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입니다. 그의 프랑스 이름은 '장 칼뱅'이고, 영어로는 '존 캘빈'이며 라틴어로는 '요하네스 칼빈(칼빈우스)'으로 불리었습니다. 전 세계에는 라틴어식 '칼빈'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2. 존 칼빈의 종교개혁: 칼빈은 역동적이었던 루터와 달리 왜소한 체격의 조용하고 신중한 인물이었습니다. 수즙은 성격에 건강도 약하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종교개혁의 위업을 이루었는지 의아스런 일입니다. 1509년 프랑스 북부 노용(Noyon)에서 제라르 코뱅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아들이 신학을 공부해 사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14살 때에 칼빈은 파리로 보내져 마르슈 대학과 몽테그 대학에서 거칠고 냉담한 소년들과 공부하였습니다. 기숙사는 쥐와 벼룩이 넘치는 불결한 곳이었습니다. 또 칼빈은 간단한 저녁 식사 후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전혀 운동을 즐기지 않는 생활의 연속이었으므로 건강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1528년 칼빈은 신학을 준비하다가 법률가로 목표를 바꾸고, 오를레앙 대학과 부르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루터는 법학에서 신학으로 진로를 바꾸고, 칼빈은 신학에서 법학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오를레앙 대학과 부르제 대학은 프랑스 종교개혁자들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칼빈은 자연스럽게 개혁적 신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독일 출신의 최고 고전학자 볼마르(Melchior Womar) 교수와 사촌 올리베땅도 칼빈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칼빈이 처음 파리에 유학 왔을 때,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신교 박해가 막 시작되는 단계였습니다.1523년 8월 8일 사실상 최초의 프랑스 개신교 신자 장 발리에르(JeanValliere)는 마리아 숭배를 비판하였다가 체포되어 혀가 잘리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개혁의 확산은 계층에 불문하고 계속되었습니다.

늘 신중했던 칼빈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531년 고향 노용에서 일어난 아버지의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노용의 교회 운영위는 회계사였던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를 금전 문제로 파문하고 핍박했으며, 그 직후 아버지는 사망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칼빈은 가톨릭에 큰 실망을 느꼈고, 수년 전 오를 레앙과 부르제의 수학 시절 접했던 루터의 사상을 기초로 스스로 발견한 개혁 원리들을 정립하였습니다.

신교로 전향한 놀라운 변화에 칼빈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고집스런 마음이 순종하도록 만들어져 교황제의 미신으로부터 갑자기 돌이킬 수 있었다." 칼빈을 개혁자의 길로 내몬 것은 친구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의 '연설문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콥은 파리 소르본 대학의 학장 취임을 앞두고 있었는데, 칼빈은 그의 연설문에 폭력적인 가톨릭을 비판하고 복음에 근거한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던 것입니다.

1533년 11월 1일 만성절에 학장 콥은 많은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그 연설문을 다 읽었고, 곧 엄청난 소동으로 이어 졌습니다. 가톨릭 사상의 "본산"인 파리대학의 교수진들은 매우 분개하여 콥을 이단으로 당국에 고발하였고, 가톨릭의 도시 파리도 그 연설문에 경악하였습니다. 즉시 관련자들의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학장에 취임했던 콥은 단 며칠 만에 그만두고 급히 바젤로 도피했고 칼빈도 변장하고 파리에서 빠져나가 역시 바젤로 갔습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만성절(All Saints Day) '전날(10월 31일)'에 게시되고, 1533년 칼빈이 쓴 연설문이 만성절 '당일(11월 1일)'에 선포된 것을 주목하면 역사가 주는 유머를 읽을 수 가 있습니다.

마치 개혁이 성자 숭배로 점철된 중세를 배격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새 신앙을 전하는 숙명임을 예고하는 듯했습니다. 1536년 칼빈은 바젤에서 대표적 명저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초판을 출간하였습니다. '강요'란 기본적 원리나 교본을 뜻하는 용어로서 이 책은 하나님, 예수, 성령, 교회, 윤리 등에 관한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제1판은 간단한 분량이었으나 1558년 최종판은 약 6배나 더 커졌습니다.

1536년 8월부터 칼빈은 제네바의 설교자 및 교사로 일하며 개혁 정책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원해서 제네바에 머문 것도 아니었던 그에게(제네바의 개혁 지도자 47세의 파렐의 요청) 시의회와 시민들은 반감을 표하며 칼빈의 노력을 좌절시켰습니다. 일부는 칼빈의 집 주위에 몰려와 돌을 던지거나 총을 쏘며 위협도 하였습니다. 수차례 모욕과 곤욕을 치렀던 칼빈은 결국 '파렐'과 함께 2년이 못되어 제네바에서 쫓겨났습니다.

제네바의 처참한 실패로 끝나자 애초 목적지인 '스트라스부르'로 향했습니다. 스트라스부르의 개혁 책임자인 '마르틴 부써'는 종교개혁자들을 화합시키기 위해 늘 노력한 인물이었습니다. 관용과 사랑이 많았던 부써는 쫓겨난 칼빈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고, 자신의 집에서 6개월 동안 머물게 했습니다. 이 자유의 도시에 거주하며 30살의 칼빈은 50살의 부써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토마스 교회의 목회자가 되어 프랑스 난민을 섬겼습니다.

독신으로 살 결심이었던 칼빈은 이곳에서 두 자녀 둔 재세례파 출신 과부 이델테드 뷰어를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칼빈의 제네바 추방은 넓은 의미에서 인생의 많은 득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년 후인 1541년 칼빈은 제네바로부터 개혁 지도자로 다시 와달라는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그에게 제네바는 "천개의 목숨이 있다 해도 하나도 주고 싶지 않은" 싫은 도시였지만, 곧 마음을 돌이켜 초청을 수락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신속하고도 신실하게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 이후 "신속과 신실(Prompte et Sincere)"은 칼빈주의자들의 표어가 되었습니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제2차 사역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제네바에 목사, 장로, 교사, 집사의 4 직제를 가진 교회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더 이상 교황의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신자들의 교제로 세워진 교회가 출발하였고, 도시 제네바도 민주주의적 제도로 운영 되었습니다. 칼빈의 '장로 교회(Presbyterian Church)', 즉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장로회 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칼빈의 가장 큰 공헌은 위기에 처한 종교개혁을 구하고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센터를 건설한데 있습니다. 제1세대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독일 비텐베르크였다면, 그 뒤를 잇는 제2세대 개혁 본부는 바로 제나바였습니다. 1550년부터 10년 동안 제네바는 약 60,000여 명의 피난민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칼빈이 처음 거주했을 때 제네바의 인구가 10,000여 명에 불과했음을 고려하면 이곳이 도피성이며 신도시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칼빈의 사상은 400년 이상 서구인들이 성찰하였던 철학, 교육, 복지, 정치, 문학, 음악, 예술, 경제 등의 많은 영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칼빈은 제네바를 유럽 최초로 성공적인 공교육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시립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빈민 자녀들도 성경, 인문, 실기교육을 받았습니다. 칼빈이 세운 제나바 아카데미는 유럽 명문대학으로 급성장했습니다.

킬빈주의의 영향은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여실히 들러났습니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모두 기인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를 토론과 투표로 결정하는 체제로 규정할 때는 그것은 헬레니즘의 유산인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들이 모든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과 법에 대한 만민의 평등,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에 있다고 규정할 때, 이것들은 헬라철학보다는 칼빈주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칼빈의 사상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서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칼빈은 신적인 주권에 의해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로 인간이 선택되어 있다는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주장했습니다. 이 예정 사상은 구원이 인간 기원이 아니라, 창조주의 절대 주권에서 나온다는 고백적인 사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정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사치와 방종이 아닌 청빈과 절제의 열매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칼빈주의가 퍼진 곳에서는 낭비와 방종이 질책되고 근면과 미덕이 칭송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칼빈의 자본주의는 물질을 숭상하는 배금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결언: 한 인간의 측면으로 보자면 칼빈은 나약한 질그릇이었습니다. 결혼 9년만에 아내는 병사했으며, 그는 아내가 남겨둔 전남편의 두 아이와 제네바의 모든 아동들을 자신의 자녀로 여겼습니다. 칼빈은 엄중한 권위로 인해 "제네바의 교황"으로 비판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네바를 중심해서 청빈하고 존경받는 지도자로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습니다.

칼빈의 '장로 교회(Presbyterian Church)를 창설하였으며,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들이 모든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과 법에 대한 만민의 평등,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에 있다고 규정할 때, 이것들은 헬라철학보다는 칼빈주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습니다. 1536년 칼빈은 바젤에서 대표적 명저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초판은 간단한 분량이었으나 1558년 최종판은 약 6배나 더 크게 출하였습니다.

칼빈은 신적인 주권에 의해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로 인간이 선택되어 있다는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주장했습니다. 이 예정 사상은 구원이 인간 기원이 아니라, 창조주의 절대 주권에서 나온다는 고백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사치와 방종이 아닌 청빈과 절제의 열매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칼빈주의가 퍼진 곳에서는 낭비와 방종이 질책되고 근면과 미덕이 칭송되었습니다.

늘 자선과 기부에 힘썼던 칼빈은 자신의 장례식을 치를 재산도 남기지 않고, 여러가지 병마에 시달다가 1564년에 5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네바의 후임 개혁자 베자(Theodore Beza)는 칼빈을 이렇게 추모하였습니다. "그보다 겸손하고 가난하게 산 사람이 있는가? 그의 재산은 소장하고 있는 책들에 불과하다. 그는 진실로 모방하기도 어려운 경건한 삶과 죽음의 본보기였다." 끝.

2024년 2월 5일

山下연구소: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