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64. [성서명상]: 고운님이 떠난 빈자리

solomong 2025. 10. 28. 10:11

 

64. [성서명상]: 고운님이 떠난 빈자리

 

부활한 구세주 그 고운님의 지상(地上) 삶의 마지막을 그린 시공(時空)은 사도행전 제1장의 첫 부분이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고운님은 떠나고 임 없는 텅 빈 허전한 자리’뿐이었다. 죽은 예수님이 사셨기에 제자들은 “3년 전 갈릴리 삶의 재현인가.”모두 가슴 두근거리며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으나, 그 희망은 여지없이 깨어지는 허망하고 더 쓸쓸하기만 했다.

수양대군의 금부도사 왕방연은 조선조 역사에서 가장 애절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어린 단종 임금을 유배지인 영월까지 안치(安置)시키고 돌아오는 길 황망하기 그지없어 가슴엔 공동(空洞)이 생긴 것 같았다. 흐르는 냇물 소리마저 슬피 우는 것 같았고, 그래서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안자이다./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놓다."라고 읊었다. 고운님, 단종 임금을 이별하고 텅 빈 가슴을 메울 길 없어 냇가에 주저앉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흐르는 냇물도 자기 마음같이 우는 것 같아 정말 그때의 심정은 임은 가고 빈터에서 고독한 밤길을 울면서 돌아왔을 것이다. 가정에 있어서 대들보 같은 어른을 여윌 때, 그 어른의 빈자리 때문에 그 자손들은 허전하기 그지없어 한다. 생전에는 몰랐다가 떠나신 후, 그 자리가 그렇게 귀중하고 소중한 자리인 것을 안 때문이다. 한 공동체나 한 국가 사회도 정신적 지주를 잃고 나면, 사회나 국민들은 정신적으로 가슴에 구멍이 뚫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해방 뒤 혼란기에 백범 김구 선생님과 해공 신익희 선생님을 잃어 가슴에 공동이 생긴 경험을 했다.

지금은 우러러 쳐다볼 그런 선생님이 없다. 그나마 지탱해주던 김 추기경님도 가시고, 이 나라에 “이 사람을 보라.”는 인물이 없다. 정계는 말할 것도 없고, 학계도, 종교계도 눈 비벼 살펴도 없다. 위기가 영웅(英雄)을 낳는다고 하는데, 경제적 위기라서 사람이 아닌 돈이 영웅인가. 그래서 로또 복권 1등으로 당첨된 그 사람이 오늘의 영웅이라고 모두들 흠모하는가. 왜 이 모양으로 된 것인가. 하늘만 쳐다보기 때문이다. 별 수가 없는가 하고 말이다. 그 옛날 제자들도 멍하니 허공만 처다 볼 때, 우리 그 고운님의 옥음(玉音)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받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지상명령(至上命令, The Great Commission)이셨다.

필자의 심경도 지난 한주간은 쓸쓸한 상가(喪家) 집에 머문 것 같았고, 어제는 즐거운 잔치 집 들뜬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리 허전한가. 마치 하늘만 쳐다보았던 제자들처럼 말이다. 요사이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살이가 창공(蒼空)만 바라보며, 뭐 한 가닥 재미있고 뾰족한 일이나 없을까를 은연히 기다리고 서성거리는 마음들이다. 그러나 이젠 정신을 차리고 스승과 제자들의 고별의 장면을 자세하게 깊이 있게 통찰(洞察)해 보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임이 없는 세상사엔 다 같이 고통에 연대(連帶)하여 그 아픔을 나누어 덜게 하고, 위로하고 격려하여 기쁨을 나누라는 말씀이다. 그 고운님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이 있겠다는 함축된 말씀이다.

그래서 신앙적 환영(幻影)을, 꿈을, 희망을 견지(堅持)하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신앙적 환상과 열망에 이끌려 주님을 따라, 배도, 그물도, 혈육조차도 버리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갔었다. 십자가에서 이 환상이 여지없이 짓밟혀 그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었다. 그래서 그 임은 떠나는 마당에 그들이 마음과 몸을 재집결 시킬 필요성을 아셨기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다. 다만 성령만이 존재의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그런데 여기 사도행전 1장 8절 처음에 나오는 접속사인 [오직, 헬라원어=‘alla’(알라)]이란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부정(否定)의 말씀에 대한 긍정적 말씀으로 성령을 받고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다윗 왕조(theocracy) 재현의 꿈을 잊지 못하고, 로마를 쳐부수고 지상의 메시아 왕국을 은근히 바랐던 그 꿈이 십자가에서 산산조각이 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주님은 아셨다.

그래서 제자들의 그 국가 건설 앞서서 개인이 먼저 중생해야 하고, 정치적인 것 보다 신령한 은혜가 삶의 기본인 것을, 일거에 국가를 건설하기보다 가까운데서 출발하여 먼 곳으로 복음화하라는 뜻이다. 또한 메시아 왕국에 대한 목적보다 그 목적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인 성령으로 채우는(filled with Holy Spirit)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채운다는 그 전제는 비었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의 가슴에 공동(空洞)이 생겼다는 말이다.

이런 제자들의 심경을 다 예견한 주님이셨기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 빈자리에 새 출발의 불을 붙이라." 고 이처럼 당부하신 것이다. 인간적 집착에 연연하는 한, 밑 빠진 독에 쪽박으로 물 붓기에 불과하다. 생명 되신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침잠(沈潛)시키는 방법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인생들은 갈증에 허덕이면서 쪽박으로 해갈하려고 덤벼든다. 가슴에 공동이 생긴 삶일수록 명예, 물질, 권력 등으로 해갈하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인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이젠 예루살렘인(신앙인)이 되라고 하셨던 것이다.

'만 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별하고 난 제자들의 그 가슴의 빈자리, 그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자리였다. 제자들이 몰라서 그렇지 승천하시는 주님 때문에 놀랄 것도, 슬퍼할 것도, 허전해 할 것도, 의지할 정신적 지주(支柱)가 없어졌다고 허탈해 할 것도 사실은 없는 것이었다. 그 고운님은 침묵(沈默)치 않는 임이기 때문이다. 사실 침묵의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 중에 고통이요, 아픔이다. 주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의 은혜만이 그 가슴의 공동을 채울 수 있었다. 제자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그 가슴에 뚫어진 공동을 "주님께서 주님의 영으로 우리 가슴에 찾아오셔서 그것도 오래지 않아 ‘고통의 연대’로 임재 하겠다." 라는데 왜 이리 불안하고 나약하고 초라한 형색이었을까!

일본의 문인 ‘미우라 아야꼬’의 수필집에 소개된 '발자국'이란 제목의 서사시(敍事詩)가 있다. 근10 여 년 전에 미국의 작자 미상의 이 시를 크리스마스카드에 쓴 것인데, 그때 미국 국민들 사이에도 애송됐던 시였다. 그 내용은 인생의 최후가 가까이 온 한 작가가 꿈속에서 인생의 가장 고통스런 삶의 장면을 전부 보게 된다.황무지와 같은 빈터에 잡초가 우거진 숲 속을 지나서, 모래사장을 주님과 더불어 에덴동산과 같은 곳을 걸어가는데, 가다가 보니까 모래사장의 처음엔 발자국이 네 개였는데, 가장 힘든 순간에 갈증에 허덕이고 괴로울 때 발자국이 두 개뿐이더란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 "주님! 제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주님은 어디를 가셨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 발자국 두 개는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었느니라"하셨다는 것이다. "네가 고통에 지쳐서 쓰러져 있을 때, 내가 너를 어깨에 메고 왔기에 발자국이 두 개뿐이었다"라는 꿈이었고, 이 꿈은 나중에 시(詩)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너무나 감동적인 시이다. 주님은 가시고 빈자리에 제자들만 그냥 두시지 않고 제자들과 같이 '고통의 연대' 속에서 아파한다는 말씀이다. 지금도 우리가 힘겹고, 고통의 순간에 늘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같이 또는 대신 고통을 당하신다는 말이다.

신앙인의 가장 아픈 고독한 순간에도, 내가 홀로 고독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같이 아파하시고 나의 무거운 짐을 대신에 져 주시는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고독은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요, 주님과 같이 있기에 그 고독은 달콤한 것이다. 그 임은 갔으나 그 임을 그리며 임이 계실 때보다 더 제자들이 결속하고, 기도에 힘썼다. 그 결과 주님께서 약속하신 선물인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더불어 기독교회의 줄기찬 역사의 거보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복음의 증인(헬라 원어의 ‘말투레스’는 순교자란 뜻), 즉 순교자들의 피로 생명이 움터왔던 기독교 2000년의 역사였다.

순교자적 신앙을 견지하여 오늘의 백골처럼 창백한 한국교회에 만연한 잡초를 뽑고, 묵은 땅을 갈고 씨를 뿌려서 성령의 열매를 다시 맺게 해야 하겠다. 아픔의 쓴잔을 마신 자도 일어나고, 성공 이후에 오는 가슴에 생긴 공동 때문에 방황하는 자도 일어나서 새로운 창의적인 일에 몰두해야 하겠다. 저마다 사랑하는 임을 잃고 빈터에 주저앉은 모든 자들은 이제 일어서자! 우리 주님이 우리들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있는 것을 잊지 말자. 이 사실 앞에 우리는 감사하자. 그 빈터에 신앙의 아름다운 꽃씨를 심자. 이것이 그 고운님을 생각하는 것이요, 그 임의 유업을 계승하는 길이다. 그 임을 사랑하는 길이다. 이 황무지 같은 한국교회 빈 터전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그 고운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임의 노래로 화답하자! 끝.

2009년 4월 17일

山下연구원장: 양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