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63. 종교성과 신앙에대하여

solomong 2025. 9. 19. 10:14

63. 종교성과 신앙에대하여

우리는 여기서 종교성과 신앙을 좀 구별할 줄 알아야 하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을 운명(기독교 신학에서는 “운명”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自然)에 맡겨 놓고 살아왔다. 자기의 일생은 이미 출생 이전에 하늘이나 운명에서 다 정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그 정해진 궤도에 따라 사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기구한 운명의 생을 저주하면서 살아간다.

자기의 생을 바꾸어 보려는 재창조(recreation)의 생각은 없고, 철새처럼 주어진 자연적 조건에 순응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갖다 붙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기독청년이나 신자들 가운데도 많다고 본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소, 돼지 머리를 놓고서 제사를 지내는 기우제보다는, 양수기로 한 방울의 물을 뿜어 보려는 의지는 없다. 운명에 맡기는 것이 다 팔자니, 그렇게 체념하면서 살아간다. 사주팔자, 점치는 것, 인간의 노력 없이 복(福)을 받아 보겠다는 것이 우리민족의 근성인 것 같다.

지리풍수설, 이것은 자연(自然)에다가 자기와 후손을 맡기는 사고방식이며, 명당자리에 조상의 뼈를 묻으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자기 밖의 운명에다, 하늘에도, 후손의 삶까지 맡기고 살겠다는 생각이다. 손금을 보는 것은 자기 운명이 손바닥 여하에 따라서 내일의 방향이 결정지어 진다고 생각하면서 살아 온 우리 조상들이었다.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성이나 무속신앙이다. 이런 것이 교회에 탈을 쓰고 나타나곤 한다. 교회가 무속신앙의 실천 장소인양 착각하는 사고(思考)이다.

기독교 신앙은 무속신앙이나 하늘(自然), 운명에 맡기고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한(민족) 고난과 희생을 해가면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신자는 땅의 모든 축복을 다 누리겠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가면을 쓴 무당종교 신봉자임에 틀림이 없다. 신약성경 마태 19:16~22, 마가 10:17~22, 누가 10: 10:25~37에서 대조적인 두 청년을 우리는 본다. 한분은 30대 초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요, 다른 사람은 30대를 전후한 부자 청년이었다. 3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마태는 청년, 마가는 부자, 누가는 관원이라고 했으니, 인생의 행복의 조건을 다 구비한 사람이었다. 아마 이런 조건을 일직이 구비한 것을 보면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은 아니고, 뼈대가 있는 귀족의 아들인 것 같다. 잘 입고, 잘 먹어서 얼굴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고 배가 나오고, 그래서 제자들에게는(갈릴리 어부들에게는) 퍽 인상적이어서 세 복음서에 모두 기록한 것 같다. 이토록 인간적으로 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이 청년이 예수께 무릎을 꿇고, ‘영생’을 구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성 깊은 태도라고 하겠다.

이 젊은이의 종교성은 자기중심적이었다. 사회심리학자 프롬(E. Fromm)은 이런 것을 “소유 모형”(having model)이라고 했다.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존재(being)가 아니라, 소유(having)로 종교를 파악한 것이다. 이 청년은 영생을 추구한 것이 소유욕이지, 또 율법을 지키는 것도 영생 때문이지,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가난하고 도적질 하는 유혹에 빠질 범법자들을 위해 자기 재물을 풀어 나누어 주려는 사랑보다는, 땅위의 부(富)와 하늘의 복(福)을 다 합한 이기적인 욕심에서 종교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러니 종교성과 기독교의 신앙은 정반대의 개념이다. 교회 문을 두드리는 것은 구속(救贖)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 복음의 기초라면, 땅위의 부와 하늘의 복을 다 받겠다는 것은 종교적 무속신앙에서 나온 발상(發想)이다. 주일날 모여든 교인들에게 무속적 종교성에 부응하기 위하여, 기복(祈福)만 하고, 희생과 십자가 없는 메시지를 전한다면, 분명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전할 뿐이다. 교회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J. Moltmann, The Crucified God, op. cit., p.25, p. 243.)

교회는 땅위의 축복을 파는 곳이 아니요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서 땅위의 축복을 희생하고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종교성은 기독교 성경 속에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방언, 병 고치는 것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생각할 때,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방언, 병 고치는 것은 초대교회 때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지금은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초적인 은사를 조금 맛보이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자체에만 만족할 때, 이기적인 종교, 반사회적(反社會的)이 되고 탈역사화(脫歷史化)하는 이기적인 종교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땅위에 축복만을 강조하는 교회는 자칫하면 이러한 이상한 종교인을 만들어 내고, 바로 이것을 주신 하나님보다 그 자체에 도취하고 만족하게 된다. 종교성과 신앙! 신앙이 중요한가. 아니면 병고치고, 아들 낳고, 시집가기 위한 개인적 이익이 중요한가. 신앙은 현실의 구체적 삶 속에서 교회와 타자(others)를 위해서 생의 보람을 느끼고 사는 동적(動的, 動詞인 believe, behave)인 삶이다. 그리고 신앙과 역사성(歷史性)이 맞부딪치는 곳에 참 기독자의 삶이 이어져 가는 것이다.(이만열,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 서울: 지식산업사, 1981.p.148.)

받은바 축복자체에 매어 버릴 때, 감정적 어떤 황홀경에만 안주하려고 한다면, 그 시원함 자체에 억매일 때, 하나님을 망각(忘却)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을 따라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 시간을 따라서 그 시원함이 없어짐에 따라 신앙도, 하나님도 없어지는 것이다. 기독교 의 신앙은 약속(희망)에 근거하고 있다. 주어진 여건, 은혜, 선물에 대해서 신앙은 기다리는 것이다.(waiting for) 그래서 히브리 11:1에서 믿음은 약속에 근거한다고 했다. 갈급한 자세이며, 기다리는 자세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아픔이다. 고난이다.(이만열, 상게서, p. 254.) 그러나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은 “하나님 무엇을 할까요.”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고로 신앙은 약속에 근거한 것이지, 성취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약속에 근거해서 사느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만, 만족하고 거기에 매달려 사느냐에 따라서 신앙과 종교성이 구별된다고 하겠다. 끝.

2009. 3. 25.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