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60. <집시음악, <검은 눈동자>에 대한 신학적 성찰>

solomong 2025. 7. 21. 21:12

 

60. <집시음악, <검은 눈동자>에 대한 신학적 성찰>

독일의 Werner Muller Orchestra의 Gypsy! 라는 타이틀로 낸 이 음반에서 Werner Muller는 요약하여 가벼운 터치로 편곡을 했다. 이 Black Eyes (또는 Dark Eyes)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이 곡의 작곡자는 미상이며, 러시아의 집시 음악이다. 이 앨범에서 Werner Muller는 출중한 편곡으로 Dark Eyes를 선보이면서 gypsy 풍으로 연주하는 두 대의 violin은 가슴을 울리는 좋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썰렁한 러시아 툰드라(Tundra, 凍土) 황양한 눈 쌓인 넓은 벌판, 그래서 문학이나 음악 및 기독교 희랍정교 등의 특성은, 우수가 서려 있는 곧 얼어버리고 말 모든 존재에 대한 간절한 재생, 부활을 희구하면서 갈구하는 듯하다. 그래서 러시아 희랍정교의 종교의식과 신앙의 특수성은 ‘부활신앙’이 대단히 강렬해서 신학적으로도 예수부활에 대한 호소력이 압도하고 있다.

우리는 Werner Muller가 러시아 집시민요를 편곡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쥐어짜는 듯이 아픔까지 느끼게 한다. 이 곡의 선율도 그렇지만, 러시아의 작가 미하일 레르몬토프 (Mikhail Lermontov)의 시, 이 <검은 눈동자>에다가 러시아 집시의 민요곡을 편곡한 것이 가사의 내용도 읽는 이로 하여금 애절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검은 눈동자, 강렬한 눈동자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눈동자!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요! /얼마나 당신을 두려워하는지요! /불운한 당신을 만나게 되었군요.

오, 당신의 내면이 그토록 어둔 까닭이 있군요! /당신을 통해 불행을 보고, /당신을 통해 불운한 불길을 보네./ 가련한 이 내 마음은 그 불길에 모두 타 버렸네. (후렴)

활활 타오르는 검은 눈동자여! /머나 먼 세상으로 나를 손짓하네. /그 곳엔 사랑과 평온이 가득하고, /고통도 그 어떤 미음도 없다네! (후렴)

 

그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을, /인생을 노래하며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열정적인 눈동자의 당신이 나를 파멸시켰다오. /당신은 나의 행복을 영원히 앗아갔다네. (후렴)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 (Ochi chornyje)'는 격렬하게 기개가 넘치는 곡이라는 생각은 이 음반에 실린 곡을 들은 후, 감상자들은 생각이 바뀌게 해준다. 이를테면 <슬픔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사랑도, 추억도 기쁨보다는 슬픔에, 밝음보다는 어둠에, 가까운 애수에 찬 곡이다.

또한 가사가 말해 주는 뉴앙스는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눈동자의 소유자인 사랑하는 이의 검은 눈동자에 매혹되어 사랑하고 보니, 그 연인은 불운한 사람이요, 어쩌면 ‘저주 받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랑하는 임의 마력에 끌리어 자기까지 혼연일체로 불타버리는 정열의 화신으로 변하게 된 것을 어쩌겠는가! 이 불행한 연인, 저주의 연인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괴로움도 없는 죽음 저 건너 피안의 행복과 평안의 세계가 나를 손짓하는 듯한 유혹에 몰입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 사랑의 매혹과 마력에 빠지지 않았던들, 오히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그 행복마저 이젠 앗아가 버린(파멸시킨) 후회스런 당신이여!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 것을! 허나, 만남이란 인연으로 불행을 자초해 버린 이 사랑의 인연이 된 것을, 이제 어찌 하겠소. 그냥 당신과 영원히 파멸되더라도(희생) 사랑하는 님과 같이 그 길을 같이 떠나려하오.”라는 의미로 우리들에게 어필해 주고 있는 듯하다.

창문 밖에는 눈보라, 황량한 벌판, 얼어붙은 강, 캄캄한 밤하늘, 바람에 덜컹대는 창문,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꽃, 그리고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찾아 한없이 헤매다 지쳐 버린 가련한 영혼, 이 러시아 민요의 곡과 가사를 음미 하노라면 불현듯 떠오르는 서글픈 정경과 서정들이 엄습해 온다.

원래 집시의 역사를 보면, ‘집시’(Gypsies)는 또한 인종적으로는 ‘코카서스’ 인종의 유랑민족을 의미한다. 인도에서 발상하여 헝가리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 분포되었다. 입술은 두껍고, 검은 고수머리에 피부는 갈색이었다. 성격은 쾌활하며 음악에 대한 감성이 뛰어나고, 이들의 직업은 마도위(말을 팔고 사고할 때에 흥정을 붙이는 사람), 땜장이, 악사 등의 직종에 종사했으나, 냉대를 받으면서 떠도는 방랑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보헤미안’(Bohemian)이라는 것은 5-6C. 중부 유럽의 역사적 사실로 보헤미아왕국이 있었으나, 19C.에 체코슬로바키아에 흡수되어, 나라를 잃은 백성을 말한다. 그래서 보헤미안들 중에는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유랑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집시(Gipsy, Gypsy) 삶의 ‘패턴’을 살았기에 <보헤미안 집시>라는 의미로 통하게 되었다.

인간실존 자체가 사실은 원초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닌가! 아담이 상대자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환희의 찬가를 노래했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은 인류 시조 아담과 하와의 금단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보다, 먼저 심미적(審美的) 유혹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너(Thou)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미워하고 죽이는 인간의 타락 된 모습으로 전락되었다.

그래서 해산의 고통과 저주로 평생에 땀 흘리고 수고해야 연명할 수 있고, 종내는 흙으로 돌아갈 운명적 존재이었다. 흔한 말로 <사랑, 소유의 욕망, 아름다움의 희구는 전부 눈물의 씨앗>이 되고 만, 그 수천 년간의 집약된 인간사이었다. 슬프고 고독하고 괴로운 인간 실존이었다. 이런 영원한 차안의 저주와 비극을 하나님의 선수적(先手的), 희생적 사랑으로 이 괴롭고 저주 받은 인생들에게 구원의 길이열린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오늘도 인간은 어둡게 깊고 괴로운 질곡의 심연에서 허덕일 때, 이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의 십자가가 그렇게도 감격스럽게 각자에게 절감케 닥아 온다. 독일의 희망의 신학자 J. Moltmann은 그의 저서 <십자가의 못 박히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에서 그는 “<희망의 하나님> 이해는 낙관주의만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과 신음을 하나님의 역사(歷史)의 미래 안에 받아들이는 하나님은 무감정한 하나님(Deus apatheticus)이 아니라, 정감적(Deus patheticus)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달린 것은 바로 ‘하나님이 십자가 달린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의 치료는 오직 고통으로만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The suffering is overcome by suffering.) 상처는 상처로 만이 치유된다는 역설의 복음이다. 강자가 약자를 위한 그 희생만이 구원의 길이란 것이다.

 

<집시>들의 애절한 그들의 삶을 통해서 인류역사의 찬연한 낭만주의(Romanticism)문화의 꽃을 피우게 했지만, 다만 집시(gypsy)의 삶 같은 인간실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랑도, 명예도, 황금도 모두가 일시적 달콤한 환영(幻影)과 허황(虛荒)됨을 느끼고, 영원히 떠돌 수밖에 없는 방랑(exile, 귀양살이)자임을 자각하고, 그의 영(靈)을 통해, 거기에서 우리 스스로 탈출(exodus)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고대하신다. 이 애절한 음악을 들을 때 마다, 인간비극의 정체(identity)를 느끼게 하면서, 깊이 빠질 애련한 인연의 끈을 날카로운 칼로 자르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끝.

2007. 10. 27. 山下연구원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