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73. "20C.의 양심" 디트리히 본회퍼( D. Bonhoeffer)

solomong 2026. 2. 4. 10:44

 

"20C.의 양심" 디트리히 본회퍼( D. Bonhoeffer)

1. 서언: 광기의 히틀러 제국에서 이성적인 비판은 극히 드물었고, 소수 반대파는 모두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유럽의 영적 지도자로 늘 자처했던 로마 교황들도 독일의 광기를 묵인하거나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눈치를 보며 겨우 소극적 비평만 피력할 뿐이었습니다. 통탄스럽게도 독일의 다수 기독교인들은 히틀러를 신의 섭리로 출현한 메시야 같은 지도자라고 찬양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양심의 소리는 소수 신자들에게서 시작 되었던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보트 함장을 하다가 회심하여 목사가 된 마르틴 니묄러(M. Niemoller)는 독일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를 세워 나치 정권에 항거하였습니다. 이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 1934)을 통해 나치 정당의 정권 절대주의, 즉 파시즘을 거부하였습니다. 니묄러와 20,000여 명의 고백교회 성도들은 나치 반대 시위까지 벌였다가 모두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독일에서 교수로 있었으나, 나치반대를 표방하여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2. 본회퍼의 양심: 나치 정권의 만행에 대한 가장 숭고한 항거는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 1906~1945)에게서 나왔습니다. 본회퍼는 현재 폴란드에 속한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 병원 의사로서 독일의 유명한 신경학 전문가였습니다. 본회퍼는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27년 불과 21살의 나이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저항 운동가 이전에 20C.의 대표적 신학자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본회퍼는 루터교회 목회자가 되어 사역하던 중, 당시 급속히 확산된 극우주의, 군국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 사상들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상들이 도덕, 양심, 신앙에 모두 위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을 약탈하고 집단으로 고립시키고 심지어 무참히 학살하는 독일의 반유대주의 광풍을 질타하였습니다. 오히려 본회퍼는 구약성서의 교훈을 전하며 유대인들의 지혜를 옹호하였고, 자신의 저서 <공동생활>(Gemeinschaft)을 통해 특정 인종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서로 어울려 사는 기쁨의 신 세계를 꿈 꾸었던 것입나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적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예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역설하였던 것입니다.

1930년 초 극우주의 광풍에 질린 본회퍼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유니온 신학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가르쳤습니다. 기독교 현실주의 사상의 대가 라인홀드 니버가 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치정권에 비판적인 독일 고백교회를 이끌기 위해 폴란드 핑켄발데(Finkenwalde)로 갔고, 지하 신학교를 세워 지도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이때 이미 본회퍼는 히들러 정권의 감시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본회퍼가 평화주의를 역설하며 독일의 광기를 지적하자, 독일인들은 그를 매국노라며 비난하엮던 것입니다.

1938년 본회퍼는 미국 대학의 초청으로 다시 도미하였으나, 이듬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고국의 고백교회가 탄압받게 되자 독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라인홀드 니버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나는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합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상 가장 큰 시련기를 겪는 이때에 나는 그들과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독일의 신자들은 문명의 재건을 위해 조국의 멸망을 원하든지 아니면 조국의 승리를 위해 문명의 멸망을 원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의 선택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안정된 미국에 거주한다면 그러한 동참도, 선택도 할 수 없습니다."

본회퍼는 문명의 빛을 위해 조국의 멸망을 바라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히틀러 정권 퇴진을 목표로 적극적인 저항 단계에 관여하였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우선적 관심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유대인들을 탈출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1943년 본회퍼는 유대인 탈출에 관여된 죄목으로 투옥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44년 7월 독일에서는 거의 성공할 뻔했던 히틀러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투옥된 본회퍼가 이들과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 나게 되었습니다.암살 단원들은 아니었지만,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전부터 히틀러 제거에 동의했었던 것입니다.

"미친 운전사가 사람을 치고 다닐 때, 이를 따라 다니며 장례식만 치루는 것이 아니라, 그를 끌어내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945년 나치 재판부는 "독일의 양심" 본회퍼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고, 종전 3주 전에 동생 및 두 처남들과 함께 39세의 나이에 교수형을 당했던 것입니다. 본회퍼는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삶에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죽음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축복받은 천상의 사건입니다. 사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죽음을 놀라운 사건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본회퍼는 최고의 신학자였고 좋은 교수이었으며 할렘가의 흑인들을 도왔던 은밀한 선행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는 "20세기의 순교자"로서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본회퍼의 석상이 세워졌습니다.

3. 결언: 본회퍼 처형 당시에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도 모른 채 시종을 지켜본 수용소의 의사(醫師) 휠스트롱(F. Hüllstrung)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처형당일) 감방으로 나는 그분이 마루에 무릎 끓고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분의 경건한 모습에 감동을 느꼈다. 그는 처형장에 이르자, 또 짧은 기도를 했고, 단상 계단을 용감하고도 의연하게 올라갔다. 잠시 후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그의 숨이 바로 끊어젺다. 나는 의사 생활 50년 동안 이렇게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을 본적이 없다." 끝.

2023년 11월 27일

山下연구소 소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