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夕陽의 反省
(마 26:20~25)
1). 서론: 서양의 <돌아오지 것들>이란 어떤 시(詩)에, 쏜 화살, 급히 뱉은 말, 그리고 황금과 같은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한 해가 저문다.>는 것을 생각하면 허전한 느낌, 고독감과 같은 숙연한 의식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26살에 대구 제일교회 교회 전도사가 되었을 때, 공중 기도 때마다, "어린 종"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이 듣기 싫어서 어서 30대가 되었으면 했는데, 세월의 빠름과 그때가 그리워지곤 합니다.
"10대는 기어가고, 20대는 걸어가고, 30대는 뛰어가고, 40대는 수레를 타고 가고, 50대는 말을 타고 가고, 60대는 날아간다."라는 시간의 '가속 감' 을 말하는 속어가 있습니다. 남의 죽음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슬퍼하면서도, 자기만은 영원히 살것처럼, 착각 속에서 극성스럽던 사람들도 세모(歲暮)에 즈음해서 자기실존을 한번 뒤돌아보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것 같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Calendar를 볼 때마다, 그 소감들이 저마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허심탄회 하게 각자 스스로를 반성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본론: 본문 20절에 "저물 때에.....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할 때, 제자들은 최후의 석상에서 각각 "주여 내니이까."라는 <석양의 반성>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누구냐'는 철학적 사색도 할 수 있고, '내가 무엇을 하는 인간이냐'는 윤리적 반성도 있을 수가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높으냐'는 사회적 관심, '내게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나'는 예술적 관심, '내 살림이 올해에 얼마나 늘었느냐'는 경제적 관심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반성을 해도 그것이 다 유익한 반성이 될 줄로 압니다만, 우리가 신앙인(信仰人)이란 의식을 날카롭게 할 때, 남다르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르게 보다 좋은 생활철학을 가진 기독자라는 자각을 할 때, 스스로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긴 합니다만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제자들은 반성을 했는가? 본문 말씀 중에 "주여 내니까"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를 반성해 보는 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 제가 주님을 팔려고 했습니까?" 베드로를 위시한 11제자들이 모두 예수님께 "주여 내니까?"하고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비판하고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만은 예수님을 팔기로 하고, 모든 계약을 치르고 이제 불과 몇 시간만 지나면 자기의 사랑하는 스승님을 강도를 잡듯이 칼과 몽치로 잡도록 다 계획하고 온 가롯 유다도 다른 제자들처럼 "주여 내니까?"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2가지 Types의 "주여 내니이까?"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정말 진실하게 자기 자신을 반성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주님을 파는 반역자가 되면은 얼마나 창피하고 괴로운 문제일까? 하여서 문자 그대로 정직하게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어 본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가롯 유다와 같이 자기의 의사(意思)로 결정하여, 자기 손으로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겨주기로 다 진행시키고 온 사람이지만, 시치미를 딱 때고, 가장 선한 사람인양, 아무일도 없는 양, 결백한 사람인양, 버젓하게 또 담대하게 자기의 반역을 숨기고 예수님께서 자기의 비밀을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여 내니이까?"라는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모습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진실을 고백 할 기회를 다시 주기 위하여, "나를 팔려고 하는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사람"이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지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여 내가 그랬습니다."하는 고백 대신에 "주여 내가 그랬습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와 "내가 그랬습니까?"의 차이는 억양이 "다"와 "까" 차이입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서로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이 가로 놓여있는 것입니다.하나는 진실을 고백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끝까지 자기의 진실을 숨기고자 하는 불성실(不誠實)한 태도이었습니다. 여기에 가롯 유다는 사실인즉 예수님을 배반하기 전에 벌써 자기가 자신에 대한 반역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어느 편에 속하는 세모의 반성인가! "금년의 마지막 가는 날의 반성인가?" 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처럼 정말 염려스러워, "내가 주님을 파는자 입니까?"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자신조차도 속이고 가롯 유다처럼 가식적인 "주여 내니이까?" 라고 하듯이, "어느 편이냐?"라는 것입니다. 더 진실되게 말한다면, "주님 내가 당신을 반역하는 자입니다."하는 편이 서산(西山)에 해가 질 때, 솔직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내가 당신의 이름을 욕 돌렸습니다. 당신의 뜻을 거역했습니다."라고 나를 냉정히 비판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를 준엄하게 다루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책임을 더 무겁게 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내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할 때, 그 다음은 주님께도 진실하지 못한 법입니다. 성실히 좀더 노력할 수 있었는데, 태만한 것도 나 자신 때문이요, 교회가 성장하지 못한 것도 나 자신 때문이요, 내가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자신에게 반역하지 않도록 힘쓰자는 것입니다.
<Victor Hugo>는 인간에게는 3가지 싸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연과의 싸움, 두번째는, 인간과의 싸움, 마지막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싸워서 승리하기가 어려운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한해를 보내는 이 송구영신의 경계선상에서 진실된 자기 반성을 해야겠습니다. 인생은 선(善)을 향한 부단한 노력입니다. 빛을 찾아서 끊임없이 전진하려는 향상의 과정입니다. 자기 완성을 위한 꾸준한 수양과 수련의 생활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서는 심정은 그것이 바로 신앙이요, 기도요, 자기 심화요, 자기 향상 입니다.
자! 그렇다면 가롯 유다가 솔직하게 자기를 반성하지 못한 이유가 나변(那邊)에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분위기에 영합해 보려는 심리이었다고 분석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시는 도중에 돌연히 비장한 얼굴빛으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요, 폐부와 양심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범한 어떤 잘못이, 어떤 반역행위가 있어서 그런지 해서, "저희가 심히 근심하면서 내니이까?"하였습니다.
요 8장에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음행(淫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을 때, 그 완악한 바리새파 사람들도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을 받아서 돌아가고 말았는데, 제자들은 감히 "나는 그런 잘못한 자가 아닙니다."라고 나설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들의 결점을 고백하기 보다 예수님의 판단을 듣기 위해서 진지한 자기 반성의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이런 진지하고 솔직한 분위기에서 자기가 반역한 것을 고백하기에는 너무나도 장엄하고 비장한 분위기이었습니다. 다만, 다른 제자들이 진실하게 자신의 인격과 위신을 내 걸고, 묻는 질문에 가롯 유다도 이 분위기에 영합하여 "주여 내니이까?"라고 자기를 기만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이점입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다들 거짓으로 적당히 살아가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에 동조하기 일 수 입니다.
동업자 분위기 때문에 불의(不義)한 상도덕과 비리를 감행하였고, 직장 분위기 때문에 자기의 진실을 팔고, "세상이 다 그런데 뭐!"하면서 자기 합리화(合理化)가 얼마나 많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디나, 언제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돈주머니를 맡은 회계(會計)는 그래도 진실한 사람이라고 일단 평가해 보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제자 공동체에서 회계의 직책을 맡았다면, 상당히 신임도(信任度)가 높은 것으로 일단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銀) 30량(量)에 현혹되고 기타 이념의 차이 때문에 스승을 팔았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받은 신임(信任)은 완전히 배임(背任)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격적 위신과 체면 때문에 "주여 내니이까?"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의 심성(心性)은 체면을 상당히 내 세우고 있는 편입니다. 사람들은 부끄러워 할 때, 먼저 얼굴을 가리웁니다. 체면을 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난할 수록 기와 집 짓고 산다. , 냉수 마시고 입 쑤시게 한다." 등의 속어도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3). 결론: 우리는 이 세모에 즈음하여 "주여! 내가 그랬습니다."하는 자기 잘못을 긍정하는 우리들의 결단적 반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기를 속이고, 분위기 눈치에 영합(迎合)해서 사는 습성을 청산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2일 후)에 대한 우리의 결의를 구체적으로 종이에 적어서 일를 위해서, 기도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해마다 석양의 반성이 같은 문제로 반복해서 반성하는 일이 없도록 이 송구영신의 경계선에서 새로운 결의를 다져야 하겠습니다. 끝.
'04. 신약설교마당(135)'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18. 기다리는 마음 (3) | 2026.01.03 |
|---|---|
| 117. 夕陽 길에 나누는 對話 (2) | 2025.12.31 |
| 115. 삶의 감격 (0) | 2025.12.17 |
| 114. 때의 고민 (1) | 2025.12.03 |
| 113.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1) | 2025.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