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때의 고민
(본문: 요 12:27)
1). 서론: 영국의 Glasgow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인 William Barclay 박사는 “참 용기란 무서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용기란 무서워 떨면서도 그것을 이기고 담대한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공포와 난관을 뚫고 나가는 삶이 진정한 용기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33세의 꽃다운 청춘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싶지 않은 예수님의 단면을 우리는 본문에서 엿보게 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있어서, 괴로움과 희생이 없었다면, 조금도 훌륭한 것이나, 장할 것도, Messiah의 사명도 감당치 못했을 것입니다. 유명한 성경 주석학자 Bengel은 "예수님은 죽음의 무서움을 순종의 열정으로 승리하셨다."라고 본문을 해석했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지금’(νῦν) - ‘드디어’라는 뜻이며, ‘민망하다’(τετάρακται) -답답하고 딱하다, 괴롭다, 고민스럽다. 의 현재 완료형과 피동형인데 외부로부터 ‘고민거리’로 도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②.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 왔나이다.”-겟세마네 동산 고민의 기도문(마 26:39, 막 14:3536, 눅 22:42)을 전하지 않는 요한복음서에 있어서 이 기도문은 그것과 충분히 상통하면서도, 오히려 더 적극적입니다.
즉 이 기도문의 전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가게 하옵소서!” 하신 말씀과 버금가는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으로서는 당연한 기도이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심과 상통하며, 예수님의 인성적 나약함을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는 신적인 장엄함에서 표현된, 예수님의 사명에 충실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려는 열심히 서로 만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기독 신자들, 더욱이 주님의 종들인 성직자들도 어려운 난국에 처할 때마다, 이 기도를 되씹으면서, 이때 주님의 인성적인 나약함에서 도약하여, 신적인 엄숙하고 장렬한 충성심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뒤를 묵묵히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본론(Context): 지금 본문의 말씀 배경을 설명한다면, 예수님은 33년의 짧은 지상 생의 종언을 고할 즈음에 당도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때문에, 어쩌면 미움과 포박, 재판, 그리고 죽음이 더 빠르게 왔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 집안의 슬픔을 제거해 주신 가장 선한, 생명을 살리신, 그 이유로 유대의 결정적인 반감과 악의 및 죽이기로 작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고통과 고뇌를 돕는 일이, 불의를 정의로 바꾸고자 하는 일이, 우리에게도 이따금 비난과 조소 및 궁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예수님처럼 이런 기도를 해야 하겠음을 이 교훈에서 터득해야 하는 진리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이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 왔나이다."라는 기도와 신앙의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 고민의 기도문은 공관복음에서는 더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엔 그 의미만이 상통하면서도, 오히려 더 적극적인 면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인성(人性)을 가지신 예수님의 젊은 죽음에 대한 애석한 통한(痛恨)의 소리였습니다. 만약 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절망적인 상황으로 추락하는 때의 그 절박하고 나약한 심정을 이해 못 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구라손 이런 순간이 있더라도, 그런 실존에 절망하지 않고, 정신을 차려서, "내가 이를 위해서 이때 존재합니다.”라는 위대한 신앙과 삶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말씀 중에는, ‘지금'이란 말은 ‘눈'이란 헬라어의 원어의 뜻은 <드디어>란 의미이고, ‘민망하다'는 ‘소동하다'의 뜻으로, 현재 완료형, 피동형인데, 외부로부터 ‘고민꺼리'로 도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인성적인 나약함을 극복하고, 신적인 장엄함을 표시한 주님의 소명 의식에 충실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궁지에 봉착할 때마다, 이 기도문을 반복하면서 이때의 주님의 장엄했던 그 심정을 항상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자기를 지는 일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무슨 말을 하리요.”, 영문 번역엔 2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What Shall I say, Shall I say.) 주님께서는 적합하신 기도의 말씀을 찾는 중에 할 말이 없어서 '말문이 막히시었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지금과 여기”(Now and Here)를 위한 아픔도, 고경(苦境)도, 극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호 톨스토이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전개되는 사건과 상황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 신자들이 교회를 섬기거나, 직장생활을 하거나, 국가 사회를 위해 봉사할 때, 당면한(직면한) 문제 앞에서, 관계된 사람들과 "내가 이를 위해 이때 존재합니다."라는 심정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이때 召命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 왔나이다.”라고 하신 이 말씀의 정신을 따라서, 매일 매일 우리 삶에서, "내가 이를 위해 이때 존재합니다.”라는 존재의 의미를 소유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중요한 위기 때나, 중요한 사건을 위해 결단할 때, 도피하지 말고 "주님 제가 이를 위해 이때 존재합니다.”라는 결단적 삶을 본받으며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두 번째로 1977년에 도미하여, St. Louis Eden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교회 고등부 때의 신앙의 동지들이었던 친구 3. 사람들이 Chicago에 의사로서 잘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제 신학교 기숙사 생활비를 부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주간이었던 봄, 그것도 주님의 고난의 절정인 금요일에, 생활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Eden 신학교는 기숙사에서 저마다 주방에 설치된 주방 도구를 이용해서 자취형식으로 3끼 식사를 해결하는 제도였습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양식은 다 떨어지고, 먹을 것이라고는, 고국 집에서 붙여온 마른오징어 한 조각뿐이었습니다. 씹어 보니까, 오래되어서 퍼석퍼석한 것이 아무 맛도 없었습니다. 제 방으로 돌아와서 그냥 잠자리에 들어가 누워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프니까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다시 배를 채우기 위해서 물을 한 사발쯤 먹고, 읽어야 할 숙제의 책을 폈습니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Wiesel이란 유대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유대인 Auschwitz 집단 수용소에서 고생하다가 살아 나와서, 그때의 경험 이야기를 쓴 책명이 <Night>라는 것인데, 이 책을 Moltmann이 자기 저서에 인용한 내용이었습니다.
집단 수용소를 탈주하다가 잡힌 2. 사람을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모아 놓고, 공개로 단두대에서 처형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수 한 분은 늙은이고, 다른 한 분은 청년인데, 노인은 이내 숨졌지만, 청년은 30분쯤 단두대 올가미를 쓰게 하여 고통으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 참혹한 정경을 보는 중인데, 저자(Wiesel)의 뒤편 군중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Where is God?), "그분은 어디 계시냐.”(Where is He?)라는 소리가 들렸고, 매달린 청년은 그냥 고통 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들려오기를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Where is God now?)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밤”(Night)이란 책의 저자 Wiesel은 자기 마음속으로, "그분은 여기에 계신다.”( He is here!)라는 생각을 할 때, 또한 "하나님은 저기 교수대 위에 목매 달려있다.”(He is hanging there on the gallows.)라는 소리가 외쳐지더라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인용한 Moltmann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란 대목을 제가 읽다가, "그래 맞아!"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해 놓고, 하나님은 "고통 좀 해라!”, "그럴 하나님이 아니잖느냐.”라는 생각 들었습니다. (물론 三位一體 교리를 포함해서) 같이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 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방방곡곡에서 당신의 백성들과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그냥 보고, 계실 예수님이 아니지!"라는 생각 문득 제 뇌리를 스쳐 갔습니다.
이때 저는 배고픈 것도 다 잊고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 제가 이 배고파하는 이 어려운 때를 겪으며, 공부하기 위해서 이때,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주님도 지금 저와 같이 배고파하십니다.”라는 기도를 한 적이 있었고, 금, 토, 주일 3일간 금식기도 기간을 보낸 적이었습니다. 그 다음 월요일에 시카고 친구들로부터 송금이 와서 어려움을 극복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교회를 위해서나, 삶을 영위할 때, 닥치는 어려움! 그를 때마다 우리 신앙인의 가슴엔 언제나, "하나님이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 왔나이다.”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경을 억지로 요령을 부려서 도피하려고 하지 말고, 정말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신앙 때문이라면, 정면으로 돌파하는 심정으로 "이를 위하여 이때 제가 여기에 존재합니다.” 이런 신앙독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살이 하노라면 수많은 역경이 닥쳐옵니다. 그럴 때마다 "이때를 면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만, 하지만, 예수님처럼, "그러나”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 P. Tillich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를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이라면,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 신자의 신앙의 자세입니다.
미국의 손꼽히는 명문 고교로서,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필립스 엣스터>라는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200년이 넘는 전통에 미국의 엘리트를 길러낸 곳이라고 합니다. 이 학교 강단엔 학교를 빛낸 졸업생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정계 실력자들이나, 재계, 모두 우수한 졸업생이라고 합니다. 세계 제1차 대전 때, 제2차 전쟁,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희생된 영웅들의 사진도 걸려 있다고 합니다.
이 학교엔 이처럼 저명한 언론인, 의사, 정치가, 경제인들을 배출한 학교이지만, 조국의 부름을 받고 목숨을 바친 동문들에게 최고의 명예로운 가치를 수여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살아있으면, 대통령, 노벨상감도 수다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자기를 순(殉) 한다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또한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캠퍼스의 아담한 정원에 대리석을 깎아서 만든 둥근 ‘벤치'에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동문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재학생들은 그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서 조국을 위해서 두 주먹을 불끈 쥔다고 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인류 사회와 신앙의 숭고한 발자취를 남긴 자들은 <언제나 소수 理想 主義者들>이었습니다.
그 가슴엔 언제나 직면한 난관 속에서, "이를 위해서, 이때 여기 존재합니다.”라고 하면서 최선의 삶을 산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큰일만이 아니라, 교회의 주교 교사, 성가대원, 평신도, 집사로서, 권사로서, 장로로서, 이 기도와 이 정신을 가지고 봉사하고, 신앙하고, 교회 생활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자연인으로 살 때는 아무리 해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일단 기독교인이란 것을 의식할 때는 벌써 자연인에서 공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자연인일 때는, "이때를 면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기독교인의 임무(任務)가 주어졌을 때는, "그러나 이를 위해서, 이때 왔나이다.”로 변화되고 승화되어야 하겠습니다. ‘화살은 그냥 있을 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활 궁 안의 시위(현)에 장착하여 당겨졌을 때는 커다란 힘이 발산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통 자연인으로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는 신앙인으로서, 당하는 역경 때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이때 존재합니다.”라고 자기를 승화시킬 때, 새로운, 거룩한, 임무와 더불어 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이런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기독 신자의 가슴속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왜 사느냐'에 대한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목적을 확인'하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아무 뜻 없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생의 의미와 목표를 '체크'하면서 사는 것이 훨씬 생의 보람과 기쁨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4). 결론: 주님의 원형적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 고투의 희생적인 말씀과 병행하는 본문의 한 때의 고민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도 순간순간마다 안이하고 이기적인 삶 때문에, 대승적(大乘的)인 삶을 도피 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그러나”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면서, "내가 이를 위해, 이때 존재합니다.”라는 <고민의 때>마다 반추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끝.
'04. 신약설교마당(13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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