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111. 明暗이 交叉하는 인생

solomong 2025. 11. 16. 11:49

111. 明暗이 交叉하는 인생

(본문: 요 3:1-5, 19:39-42)

 

I.서론: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눈이 하나밖에 없는 애꾸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의 집으로 화가를 불러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화가는 한쪽 눈이 감긴 모습을 정직하게 그렸습니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을 본 한니발 장군은 크게 노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병신 꼴로 그렸느냐!”라고 장군은 화가를 끌어내어 목을 치라고 명했습니다. 그 화가는 그림 하나 그린 대가로 죽고 말았습니다.

 

장군은 다시 다른 화가를 불러서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앞서 화가의 죽은 사유를 알고 온 화가는 한니발의 초상을 두 눈이 다 성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니발 장군은 이번에도 크게 성을 내었습니다. “내 눈이 어째서 둘이냐. 하나밖에 없는 눈이 네 눈에는 둘로 보인단 말이냐 이건 내가 아니라, 딴 사람이 아니냐! 괘씸죄로 이 화가도 역시 참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불려와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생명을 부지했습니다. 이유는 그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도록 한니발의 옆모습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터득할 수 있는 삶의 지혜는 어느 측면(側面)을 먼저 보느냐, 어디에 ‘焦點’을 두느냐가 인생의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평안, 고요함 및 행복은 권력과 부(富)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또한 <관심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나의 세계관, 인생관, 명예, 지식 및 지위가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문에 등장하는 <밤과 낮에 찾아온 사람>, 니고데모의 인간 됨과 그의 삶의 명암(明暗)을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밤에 예수께 와서”-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 대한 동정적인 해석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든지, 조용한 한밤중에 갖기 위한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높은 지위와 신분 때문이란 것이 지배적인 해석입니다. 그래서 그의 비겁한 면모를 책망하게 되고, 그는 일생을 이런 소극적인 신앙으로 멀리서, 숨어서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도 소극적인 면이지만, 전혀 용기가 없다고만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은 피고의 진술을 듣고, 그 행위를 심사하기 전에는 그를(예수님) 정죄하지 못한다.”(요 7:50-51)

 

②. “거듭”(ἄνωθεν)난다. -⑴. 꼭대기서, ⑵. 위에서, ⑶. 처음부터, ⑷. 다시, 등의 뜻입니다. 결국, 그 의미는 공간적으로는 ‘위에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시간상으로는 ‘다시’ 즉 새롭게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重生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난다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행복의 제 조건을 갖추었지만, 그것들은 현세에서의 행운의 조건이었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될 수 없었습니다. 重生이란 도덕적 수양으로 인격을 향상하는 것도, 명상을 통하여 無我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自我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하여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③. “물과 성령”으로 - “물”(ὕδατος)=성령으로 말미암은 성결함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여기 이 물은 ‘세례’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즉 세례요한의 ‘물세례’와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세례’(마 3:11)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물세례’란 외형적이며, 의식적인 것으로, 신앙자의 세계에서 제외될 수 없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세례란 의식은 물론 씻는 결례의 관념처럼, 죄를 회개함으로 씻음을 받고, 옛 육의 사람이 매장되는 것을 뜻합니다. (롬 6:3) 그리고 ‘성령’이란 내적이며 신령한 것으로서 新生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소극적인 면이고, 성령은 적극적인 면을 말합니다. ‘물’은 성결을 상징하고, ‘성령’은 살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들은 상호 補完的이라고 하겠습니다.

 

④.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요 19:39)- 밤에 예수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그의 친구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이 산헤드린 회원들이지만, 예수님을 고소할 당시엔 불참했거나, 침묵했었습니다.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의 꽃 한 가지가 죽은 후의 많은 花環보다 아름다운 것을 늦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돌아가심은 당신의 생전에 하신 감화 있는 교훈의 말씀보다 더 감동적이고, 만난을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용기를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주었습니다. 이 들은 주저와 공포를 넘어서, 요셉은 빌라도에게 주님의 屍身을 요청해서 받았고, 니고데모는 값진 향료와 세마포를 가지고 유대인의 장례 법에 따라서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때부터 적극적인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 니고데모의 어두운 면(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그는 전형적(典型的) 바리새인, 유대인의 관원(통치자), 70인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산헤드린 회의는 국내외 유대인의 종교적 최고통치권을 가졌으며, 거짓 선지자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출교(黜敎)하는 임무를 가졌습니다. 어떤 성서 해석자는 “그의 지위가 비겁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게 했고, 그래서 그의 신분으로 소극적인 신자가 되게 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관원(官員)이라는 것 때문에, 한때 공공연하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거침돌이 되게 하였습니다.

 

니고데모가 빛이 되신 주님을 밤에 찾아와서, 참 만남(Encounter)의 對話를 하지 못 것은, 예수님을 <그분>(It)으로 단순히, 기적(奇蹟)이나 행하는 세상의 종교가 중에 한 분으로 보았고, 하나님의 아들 Messiah로 오셔서, 우리를 重生시키는 참 빛이 되신 <내 삶의 주인>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날 밤 대화의 주제를 ‘重生’으로 몰았습니다. (요 3:3) 하지만, 그는 중생의 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그날 밤 이후로 그는 몹시 고민에 휩싸였을 것이고, 어쩌면 그 밤이 그의 중생의 출발점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중생 자 일진데, 우리의 모든 삶에서 주인은 주님으로 알고 사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숙지하여,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 생명(목숨)의 문제는 “내가 보장하겠다.”라고 하시며, 의식주 문제는 염려치 말라고 하시면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신앙’이라는 先行 行爲는 그의 나라와 그 義였고, 衣食住 문제는 後行 行爲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온 것은 의식주와 관련된 직업의식이었던 것이 선행조건이었고, 신앙(구원)은 차선책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의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국가 사회적으로 어두웠던 시대를 반추(反芻)해 보면,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자유당 정부수립은 독립운동을 했던 주체세력이 아닌 비겁했던 親日 勢力을 등에 업고 정부를 세운 것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유당 정권이 부패할 수밖에 없었고, 붕괴의 원인 중의 하나이었다고 합니다. 선행(주체)과 후행(객체)가 전도(顚倒)된 것이 우리 사회를 어두움으로 몰고 간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오히려 조국 독립을 위해서 고생했던 사람들이 아닌, 비겁했던 친일 세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민족의 정체성(The Identity of Nation)이 없는 캄캄한 밤의 방황(彷徨) 속에서, 다시 말해서, 한민족의 정체성 위기(The Crisis of the Korean Identity)로 인하여, 결국 <밤에 찾아온 자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신앙이란 것을 祝福의 개념으로만 생각한다면, 優先과 次善이 전도(顚倒)되었단 말이고, 主題와 副題가 도착(倒錯)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지난날 거리 전도에서 <예수 천당>을 많이 부르짖었으나, 천당 가는 때까지 中間 倫理의 不在가 현재 한국교회가 수난을 당하는 이유 중에 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개가 <밤에 찾아온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책임질 청지기(Stewardship) 정신이 없어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 모습입니다. 비겁하고, 정체성이 없고, 타산적인 현실 타협주의가 신앙의 美名하에서 한국교회는 지금 부식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니고데모의 밝은 면을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낮에 찾아온 니고데모의 면모가 <요 19:39-42>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제1차 방문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始初였다면, 요 7:50에 한 번 언급이 있고, 낮에 찾아온 그 시간적 간격(間隔)은 적어도 2~3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밤에 찾아왔을 때는, 산 예수를 만났으나, 그는 아집(我執), 자기 선입견, 및 편견 때문에 캄캄한 밤이었으며, 예수님의 밝은 빛 앞에 對面했으나, 그 빛을 니고데모는 받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낮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통해서, 그의 가슴에 예수님의 빛을 받았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殞命)하시자, 평소 갈릴리 제자들(서민 출신)은 전부 失意에 빠져 도주해 버리고 말았을 때, 주님의 가장 고독하고 어두웠던 그 순간에 반대로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와 같은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 등의 貴族 出身에 의해서 장례(葬禮)의 집례가 된 것은 예수님은 모든 신분 계급을 초월해서 Messiah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값비싼 몰약과 침향 섞은 100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정성스럽게 예수님의 최후를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露出)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밤에 찾아왔지만, 낮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결정적인 순간에 비장한 용기, 친절 및 희생을 각오한 예수의 ‘숨은 제자’ 또는 ‘비밀의 제자’의 너울을 벗고, 그 사명을 다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 권력, 명예, 및 물질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해 다 잃어버릴 것을 각오한 사려 깊고, 과감한 그의 행동은 그의 신앙과 <행동하는 양심>은 길이길이 후세에 귀감(龜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집고 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다 산헤드린 회원들이요, 은밀한 제자들이 이었습니다. 그들이 유대 종교 재판권(宗敎 裁判權)을 가진 산헤드린 회의 당시 예수님을 고소할 때, 불참했거나, 침묵했다는 주경가나 역사가들의 문헌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의 두 목소리만이라도 예수를 성원(聲援)했더라면, ‘주님께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 두 제자는 무서워 떨었습니다. 우리는 이웃 죽은 후, 훌륭한 조사(弔辭)에는 관대(寬大)하나, 그가 산 동안의 칭찬 함에는 인색한 것을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죽은 후의 새 무덤, 새 수의와 향료보다 산 동안의 충성과 사랑이 더 아쉽습니다. “산 동안의 꽃 한 송이가 죽은 후의 세상의 모든 화환(花環)보다 값진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죽은 후의 길고 장광설(長廣舌)의 조사(弔辭)보다 산 동안의 한마디의 사랑, 찬사 및 감사가 더 귀한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자, 한 시간도 못 되어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요 19:32-36) 예수님의 십자가는 벌써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두 ‘비밀 제자’(숨은 제자)를 주께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이렇게 계속하여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마지막 충성을 바친 2~3년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의 율법주의 종교에서, 복음주의 신앙으로 전향(轉向)하기까지 심사숙고(深思熟考)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지성적 유대 율법 학자로서, 십자가 사건 앞에서 그가 Messiah 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가장 귀한 증거(證據)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증거의 첨예한 초점은 '십자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유일한 유산(遺産)인 십자가의 아픔을 오늘도 우리가 지고 갈 때, 주님은 가장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니고데모는 이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서, 정말 하나님의 아들 Messiah임을 確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참모습도 그의 죽음에서 露呈 됩니다. 진실은 죽음에서 나타납니다. 어떻게 사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생을 끝내느냐는 문제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보면, 생전에는 멋있는 사람 같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실망(失望)을 주고 가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인생의 종착역이 가까이 올수록, 끝을 잘 매듭하고 갈 수 있도록 평소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지휘관인 백부장과 함께 지키던 사람들이 예수의 臨終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눅 23:47)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重生의 도리를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의 결론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보아야 네가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날이 되어야만 네가 알겠구나!” 하는 뜻입니다. 정말 이 말씀이 현실로 실현되었습니다. 이 지성적 신앙의 ‘숨은 제자’, 니고데모는 십자가 앞에서 그의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체면, 명예 및 지위(재산까지 몰수당했다고 함.)를 다 버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운명을 더불어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신앙의 발로입니까!

 

알려지기를 두려워했던 이 ‘숨은 제자’가 이젠 뭇 대중 앞에, 공개된 제자가 되었습니다. 군중 속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서워 <예수 믿지 않는다.>고 부인하던 사람들이 그 순교자의 장렬한 모습을 보고, “나 역시 기독교인이다.”(I am too a Christian.)라고 한 것이 기독교 2000년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도 이 니고데모처럼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의 시신을 장례 한 뒤 그 사람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인 2~3일이 퍽 지루하고 참기 어려운 시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마치 그의 지나간 2~3년의 세월이 지루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그의 가슴엔 주님의 죽음에 대한 애석한 마음과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충격, 감격 그리고 도망가서 12. 제자들이 없는 사이에 자신이 주님의 제자 노릇을 대신 할 수 있었던 것에 흐뭇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의 3일간은 <침묵의 기다림>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호의호식하며 존경을 받으며 권력을 휘둘렸던 화려한 그의 삶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다 희생한 그의 위대한 결단! 그리고 고요한 침묵에 아련한 과거의 회상을 묻어버리고, 찬연하고 생명력 있는 부활의 주님을 맞으며, 주님으로부터 “공개된 나의 제자 니고데모야! 고맙구나, 너에게 平安이 있을지어다.”라고 감격스러운 再會가 있었다고 믿으면서 우리도 그런 소망에서 주님 향한 일편단심의 신앙을 견지했으면 합니다.

 

4. 결론: 밤에 주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높은 지위와 신분 때문에 비겁하게도 숨은 제자, 비밀의 제자였습니다. 산 예수를 만났으나, 그는 我執, 자기 선입견, 및 편견 때문에 그의 영혼도 캄캄한 밤이었으며, 예수님의 밝은 빛 앞에 對面했으나, 그 빛을 받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낮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통해서, 그의 가슴과 영혼에 예수님의 빛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의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체면, 명예 및 지위를 다 버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신앙의 발로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殞命하시자, 평소 갈릴리 제자들은 전부 失意에 빠져 도주해 버리고 말았을 때, 주님의 가장 고독하고 어두웠던 그 순간에 당당하게 12. 제자 몫을 대신했습니다. 만감이 교차 되고, 명암이 교차 되는 니고데모의 인생 모습에서, 지성적이고 용기 있는 결단적인 신앙의 모습을 배웠으면 합니다. 밤과 낮이 교차하는 니고데모의 인생 모습에서, 어떤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참다운 신앙자이면 판단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아래 어느 시인의 <무언의 기다림>이란 詩 내용을 여러 가지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특히 ‘니고데모의 침묵 시간’에서 희망을 견지하는 것과 우리 또한 氣槪 있는 신앙에서 어떤 소망 중에 살아야 할 이유를 이 시를 음미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無言의 기다림”- 절벽 사이에 한 그루 해당화/누구에게 꺾일세라 온 몸에 가시로 드리우고/황홀한 향기로 나그네 발길을 멈추게 하누나./실바람에 꺾일 것 같은 가냘픈 몸매/누구에게도 꺾이지 아니하려고/가시로 도도함을 지키네./만인의 사랑을 받기 위함인가?/그 누구에게도 소유됨이 싫어함이었던가?/날카로운 절벽 사이에 홀로 핀 한 그루 해당화/벗도 동반자도 없이 긴긴 세월에 휘어져 가는 허리/그러한 자신을 의식하지 아니하고/언젠가 올 나그네를 맞이하기 위하여 꽃봉오리 맺누나! 끝.